북한, 남포....
애들에게 무슨 의미일까?
열심히 셀카질~~~~
장수왕릉(長壽王陵)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퉁화 시 지안 현(輯安縣)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흔히장군총(將軍塚)으로 불린다. 산 아래에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미터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으리라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
이곳은 현재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정책으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석실의 위치는 높고 밑으로부터 3단째 단을 상(床)으로 하고 있다.
최상단의 상면(上面)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장방형의 거대한 1매의 천정석이 있으며,
연도(羨道)는 서남방으로 있으며 천장은 큰 돌 3매로 되어 있다.
현실의 4벽은 6단으로 쌓고 각 벽의 위에는 굵고 모진 기둥을 옆으로 높여서 천정석으로 받치고 있다.
현실의 크기는 가로·세로의 높이가 모두 5미터 이상이며 상(床)으로 오기(基)의 관대(棺臺)가 있으며,
기단의 4주에는 넓이 4미터의 돌을 두르고 자갈로 채워져 있다.
4벽과 천장에는 본래 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전부 박락(剝落)되고 없다.
각 층의 외부에는 기와로 덮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모두 무너지고 잡초만이 무성하다.
장수왕의 후궁의 묘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유류왕(儒留王=유리왕),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직접 사진촬영이 안되고 밖에서 유리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광개토대왕비 모형 한국돈 10,000원.
태왕비에서 서쪽으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솟아 있다. 가까이서 보니 거대한 돌무지다.
아래쪽 여기저기에 직육면체의 대형 돌들이 무더기를 이루며 나뒹굴고 있었다.
돌무지 주변에는 이름을 알수 없는 잎 넓은 풀이 초원을 이루고 있고, 때를 잊은 야생화가 군데군데 피어 있다.
이곳이 바로 한민족 최대의 ‘영광시대’를 이끈 광개토태왕이 묻힌 ‘광개토태왕릉’이다.
1600여년이 지난 2004년 늦은 가을, 광개토태왕릉은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처음 능이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무덤 주인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무덤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큰 바위처럼 단단하기를 기원한다)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나와 광개토대왕릉임이 확인시켜 줬다.
또 최근에는 ”신묘년호태왕0조0구십육(辛卯年好太王0造0九十六,신묘년에 호태왕이 만든 96번째 방울)“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청동방울이 발견돼 학자들간의 이견이 확연히 줄었다.
중국 당국은 2003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태왕비에서 태왕릉 사이에 무질서하게 자리잡고 있던 400여호의 인가를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발견된 대형 제단 유적은 태왕릉의 주인을 다시 확인시켜 줬다.
통상 제단은 무덤의 앞쪽에 위치한다. 제단의 발견은 무덤의 앞과 뒤를 분명하게 해줬고,
제단보다 앞쪽에 위치한 태왕비가 능비임이 확실해 졌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더욱 확연해졌다.
그 동안 태왕비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위치했던 장수왕릉과 태왕릉을 놓고 어떤 것이 태왕릉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태왕릉은 한변의 길이가 66미터에 이르는 정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계단식 석실묘다.
그러나 태왕릉은 현재 그 형상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높이만 14.8미터에 이른다.
실로 눈으로 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크기다.
그 크기에 압도당하고 있노라면 당시 고구려의 국력과 왕실의 위상을 가늠하고 남을 만 하다.
*출처 : 이옥현기자 고구려문화유적 답사기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만으로도 감동이다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한시간 가까이 올라왔다.
낮은 계단이지만 1,400여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천지연에 대한 기대를 안고 품고....
달리고 싶지만 혼자가 아니니까
가족이니까 여유를 가져본다.
힘도들지만 쌓여있는 눈이 신기하기도 할것이다.
순간순간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알기에
내 머리속엔 천지연 조망만이 가득한데
서두르고 싶지만 마음껏 자유를 누리기를~~~~
V자를 그리고 있을때가 아니련만....
우박을 처음 만난 딸내미가 찐은 사진
도중에 비를 만나고, 애들은 처음으로 우박도 맞았지만
드디어 천지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중국
북한
해발 2,470M 고지에 우리가족이 같이 서있다....
몇분 상관으로 조망을 못했다.
화장실만 안갔어도 볼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금강대협곡도 출입이 금지되어 되돌아 서야했다.
너무 아쉬웠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이 역사현장 앞에 섰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고1 큰딸이 아빠를 위로한다.
그래 고맙다.
아빠 마음을 알아주어서....
해서 우리보다 몇분 먼저 오른 사람들의 사진으로
위로를 받아 봅니다
5M앞은 보인 것 같다.
거대한 용암이 지하로 흘러 생겨난 제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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