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동부에 있는 상위 4개 공항 중 하나로서 랴오닝지방 북부와 남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상 면적은 2만 8,446ha이고 활주로 길이는 3,300m, 유도로는 길이 3,168m이다.
터미널빌딩의 면적은 6만 5,000㎡, 계류장 면적은 24만㎡이고,
25개의 게이트를 갖추고 있어 세계 각지의 다양한 대형 비행기가 이, 착륙한다.
또한 22개의 항공사가 취항하는 랴오닝성의 주요 공항이다.
국내선 75개와 국제선 43개를 포함하는 118개의 정규 항공노선과
중국 내 89개 도시와 해외 15개국의 36개 도시로 가는 특별행정지역(SpecialAdministrative Regions)노선 등이 있다.
일주일에 총 1,300편 이상이 한국, 일본을 비롯하여 유럽,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세계로 뻗어나간다.
1998년 이래 2006년까지 지난 8년 동안
중국 북동부 12개 민간공항 가운데 승객 수, 화물 및 우편물 양, 이착륙 횟수 등 3가지 지표에서 최고를 유지해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롄공항 [大連空港(대련공항)] (두산백과)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게 된 후 1907년 현재 형태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총 면적은 약 26,000㎡로, 275개의 여러 형태 감방이 있으며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형무소는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15개의 공장 등이 있고
담장 밖에는 강제노동소인 벽돌 공장과 과수원, 채마밭 등이 있었다.
건물의 외형은 큰대(大)자 형으로 방사형 구조이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으며
복도 중간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소통 역할을 하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였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당했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곳은 1909년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수감되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다.
1945년 8월 소련 붉은 군대가 뤼순에 주둔하면서 사용이 중지되었고,
그후 1971년 복원을 통해 전시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988년 중국 정부는 이곳을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뤼순형무소 [Lushun Prison] (두산백과)
피의자가 일단 이 감방에 들어오면 먼저 검신실(檢身室)을 거치는데
일반 잡범은 푸른 옷, 사상범은 붉은 색 수의를 입혔다고 한다.
이 좁은 공간에 10여명씩 수감했다 합니다.
낡은 침대,의자 하나
안중근 의사가 갇혀있던 감방안입니다
형장으로의 이동중 사형수에게 씌우는 죽모..
이것을 머리에 쓰면 아래를 볼 수 없다 합니다.
지금도 감방 안에는 그 무렵에 죄수들이 쓰던 식수통 변기들이 그대로 있었고,
죄수들의 밥그릇도 진열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감방 규칙에 따라 매끼 7등급으로 배식을 받았다는데 7급 밥그릇이 가장 적고 1급 밥그릇이 가장 컸다.
감옥 안에서도 밥그릇이 같지 않았으니 밥그릇을 사이에 둔 죄수들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여순감옥의 서쪽 감방과 중앙감방 건물사이 뒤쪽에는 삼각구역이 있었는데
이곳은 수감자들의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운동하는 기회를 이용해 서로의 소식도 전하고 위로도 하였다.
사진속의 해골들은 나무 들통에 담겨 매장된 실제 수인들의 시신들로
현재 일제의 참상을 증명하기 위해 여순감옥에 전시되어 있다.
교수형으로 살해된 후 사진과 같은 통에 담겨져 매장되었다.
이유는 일본군 앞에 무릎을 꿇지않는 한국인과 중국인들로 하여금
죽어서까지 무릎을 꿇게하기 위함이었다.
안중근 의사도 이렇게 살해 되었을 것이다.
죽는 자리에서조차 편히 못가시고
수그린자세로 처참히 가신 것이다.
여순감옥 내에는 국제항일 열사기념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 주은래 총리(1898~1976)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중조인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_ 주은래-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백성이 된 의무를 다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사형선고 받은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쓴
조마리아 여사 편지 전문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시도했던 이봉창(1900~1932) 의사의 순국 전 사진이 발견됐다.
윤주 매헌기념관장은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1932년 9월30일자 아사히신문 호외에 실린 이 의사의 사진을 발견했다며 3일 이를 공개했다.
사진 속 이봉창 의사는 볼이 깊이 팬 수척한 모습이다.
사진 오른쪽에는 '대역범인 이봉창(위) 그의 생가(오른쪽 아래)와
도쿄의 숙박부에서 확인한 필적'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된 장소입니다.
일본사람으로 한국남편을 만나 한국에 살고 있는데
마음속으로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에서 형이 집행됐다.
안중근 장군의 유해는 감옥 뒷산에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에 성공한 이후 관동법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는 이 재판장에서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이토를 사살한 것에 대해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한국의 용병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총살한 것이라며 의거의 정당성을 당당히 주장하였습니다.
안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기 까지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1910년 2월 7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어, 2월 14일 6차 공판이라는 고속 재판으로 사형판결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 당시 영국의 '더 그래픽'지는 이 재판을 두고 “세기적인 재판의 승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월계관을 거머쥐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나갔다.
그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이렇게 일본관동법원은 항일지사들에 대한 탄압의 도구로 사용된 사법기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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