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사살하고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어 1909년 11월3일 뤼순으로 압송된 안의사는
1910년 2월14일 이곳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요동반도의 권익을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뒤
만주 일대를 통치할 기구로 관동도독부를 뤼순에 설치하고 산하에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을 두었다.
사실상 일본 영토인 뤼순에서 일본은 자국의 의지대로 안의사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자 했다.
일본 패망 뒤 인민병원으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1999년 한때 철거 위기에 몰렸다.
그때 한국의 민간단체인 여순순국선열재단이 다롄 시 당국에 건의해
문화재로 지정받은 뒤 건물을 매입해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11개 전시장에는 각 법정과 각종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총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나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안의사는 여섯 차례 공판에서 세계를 향해
대한 독립의 정당성과 항구적 동양 평화를 위한 자신의 사상을 웅변했다.
심리 과정에서 안의사는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 시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동양 평화 교란 등 15가지로 제시해 대한 독립의 정당성과
일본이 조선을 부당하게 침략한 사실을 전세계에 알렸다.
안의사의 재판을 지켜본 영국 <그래픽>의 찰스 머리모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입을 통해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평가했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 변론을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 관선 변호사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안의사는 항소를 포기하고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시작했다.
동양평화론 집필을 마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유보하겠다던 일본이 약속을 어기고
조기 집행을 강행해 본론과 결론 부분은 고등법원장과의 대화를 통한 속기록으로 남겼다.
“우리 대부분은 안의사를 이토를 저격한 순국열사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안의사는 위대한 정치사상가이자 학교를 두 개나 세운 육영 사업가였으며
명필이었고 독실한 신앙인(가톨릭)이었습니다.
안의사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오늘날의 유럽연합과 같은
지역 경제공동체를 동북아시아에 만들 것을 제창하였습니다.
동양평화론에는 당시 뤼순을 동양 평화의 근거지로 만들고 한·중·일 공동 군대를 편성하며
동양 3국의 국민이 1전씩 걷어서 동양평화 유지기금을 조성하고
공동은행을 만들어 공용 화폐를 발행하자는 주장이 나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선각자적인 제안이었지요.”
여순순국선열재단의 박귀언 이사는
“안의사의 의거 100주년을 맞아 늦은 감은 있지만
안의사의 삶과 업적, 사상이 재조명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처형실 곁에는 널찍한 전시관이 있다.
안 의사 흉상을 중심으로 양쪽 벽면 가득히 안 의사의 유묵(복사품)이 진열돼 있다.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에 눈길이 멈춘다.
필체가 웅혼하다.
죽음을 초월한 영혼을 만나는 순간이다.
당시 안 의사는 지바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동양의 평화와 한·일 우호가 이뤄지고 내가 다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다시 만날 겁니다.”
이에 감화된 지바는 일본에 돌아가 안 의사 기념비를 세웠고,
이후 20년 동안 안 의사의 글씨와 영정을 모시고 매일 추모를 했다고 한다
'경천'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국가와 국민이 스스로 본분에 맞게 도리를 지키고 양심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일본인의 부탁을 받아 쓴 글씨다.
여행,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었는데
가슴이 메어져 아무말도 못하고 마음이 무거워지며 우리가 밥을먹고 숨을 쉬고 있는 사실만으로 감사했습니다.
碎身具(쇄신구, 시체의 흔적을 없앨 때 쓰는 기구로 맷돌처럼 만들었음)
포화로(抱火爐) : 손과 발을 도르래에 달아 쇠사슬에 묶어 난로에 몸을 붙여서 타 죽게 함
사람 가죽을 벗기는 도구 :
산 사람을 고정시키고 사람의 피부를 벗긴 후 배를 갈라 사람의 담낭(쓸개)을 꺼냈다.
[출처] 대련여행기5. 우리에게 2월 14일은 무슨 의미입니까?|작성자 얼음심장
인체를 고정시키고 발가락에 바늘을 박았다.
또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 먹고 마신다.
숙소나 음식이 생각했던 것 보다 기대 이상이다.
나무인 것 같지만 안쪽은 실상 시멘트 건물 퍼세식 화장실이다.
청소도 안돼있고 평소에 맡아보지 않던 지독한 냄새에
모두 기겁을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도 그렇게 살았기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옛날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곳에 가면 한줄로 죽 서서 일을 보던 시절이 오래전이 아니다.
사람들 참....
물이 내려가지 않아 고여 썩은내가 나도 그냥 방치해 놓고있었다....
우리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일부사람들에겐
다시는 가고 싶지않은 경험일 것이다.
오랜만에 불길이 직접닿은 불고기.
그것도 소고기다.
강 건너가 바로 북한땅 남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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