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솜 기자]
‘부르심 속 부르심’을 받은 테레사 수녀는 미혼모와 고아, 나병환자를 위한 집을 만들고 그들의 재활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테레사 수녀의 선행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그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에 반신반의했던 가톨릭 교단과 인도 정부도 이를 인정했고, 1950년 교황청에서는 ‘사랑의 선교회’결성을 허가해줬다.
테레사 수녀는 사랑의 선교회가 돕는 대상에 대해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 불구된 사람, 눈먼 사람,
나병환자, 사회에서 남이 자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사회에 짐이 된 사람들, 모두가 상대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마더 테레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후원단체도 점점 늘어갔다.
인도 콜카타에서 13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사랑의 선교회는 급성장해 1960년에는 인도 전역에 25개의 지부가 생기고
1963년에는 ‘사랑의 선교회 형제단’이 창설됐다.
테레사 수녀 사망 당시 수녀 4천 명과 봉사자 10만 명이 123개국에 있는 610개의 지부에서 활동 중이었으며,
테레사 수녀가 죽은 이후에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테레사 수녀는 국제적으로도 난민 등을 돕기 위해 전쟁 한 가운데 뛰어들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베이루트가 포위되었을 때 격전지에 갇혀 있던 어린이 37명을 양측으로부터 휴전 약속을 받고 구했으며
에티오피아 아사자들, 체르노빌 원전 희생자들, 아르메니아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세계를 누볐다.
이 같은 그의 선행을 지켜본 세계인들은 테레사 수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작 테레사 수녀 본인은 이러한 찬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낡아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선명한 흰색사리 하나만을 걸친 채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찾아갈 뿐이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에도 시상식 만찬을 거부하고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으며
상금은 물론 모두 콜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1997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순간까지도 더 비싼 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이 돌봤던 환자들과 같은 수준의 치료를 받길 원했다.
이렇듯 오직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했던 테레사 수녀에게도 고뇌는 있었다.
테레사 수녀의 전기 ‘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는 거의 50년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신념에 대해 의심하면서 살았다.
테레사 수녀를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지금도 나오고 있다.
당시 세계전쟁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봉사활동에만 힘을 기울였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비난마저도 테레사 수녀가 평생을 약자를 위해 일했던 수고와 성과 앞에서는 무색하다는 평가다.
크고 거창한 활동보다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선행에 일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
개개인의 평화를 찾아줌으로더 큰 평화를 불러온 결과 역시 테레사 수녀가 예상했던 결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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