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스크랩] 테마여행 서울문화유산 부암동 코스 #2

tkaudeotk 2013. 5. 28. 22:34

 

  巢水雲簾菴 (소수운련암: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이란 글을 새긴 바위


김흥근이 석파정을 조영하기 이전에 석파정의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석파정 초입 사랑채 맞은편에 커다란 암반이 있고, 

거기에 “巢水雲簾菴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소수운렴암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김흥근 이전에 석파정에 대해 추정하게 한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으로, 

한수옹(寒水翁)(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 벗 정이(定而)(조정만趙正萬, 1656∼1739)에게 

신축(辛丑,1721)년에 글을 써주다” 라는 뜻의 이 글귀는 

매우 운치 있는 시적 표현으로 자연을 대하고 노래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심성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조정만의 별서 조정에 관한 기록은

 따로 전해지지 않으므로 더이상 고증된 자료는 없지만, 

이 암각을 통해 석파정 현재의 위치에 18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 별서가 조성되어 경영되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자하문 터널을 지나 부암동 쪽으로 500m쯤 가다보면 

왼쪽 인왕산 자락 아래로 한옥이 펼쳐진다. 한옥은 인왕산 너럭바위 위에 가지런하고 단단하게 앉아 있다. 

이곳 주변으로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이 전통 건물들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몽롱한 모습으로 인간의 마을을 향해 열려 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사용된 석파정이다. 

1974년 이곳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됐다. 

대원군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은 운현궁이다. 

하지만 시인·화가·풍류객으로서 대원군의 자취가 밴 곳이 바로 이곳이다. 

석파정은 부암동 큰길가에서 언덕으로 조금 걸어올라가야 한다. 

이곳에는 수령 200여년 된 반송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이 소나무는 현재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중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가 자리하고 있고, 안채 오른쪽 높은 곳에 별채가 있다. 

안채 위쪽으로는 ㄱ자 모양의 사랑채가 나온다. 인왕산 자락에 자리잡아 앞으로는 북악산이, 

뒤로는 북한산이 펼쳐진다. 규모나 앉음새, 주위 풍광이 서울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만한 옛 별장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 말기 최대 권력 가문인 ‘안동 김씨’ 김흥근의 소유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이 별장을 탐낸 대원군이 자신에게 팔 것을 요구했지만 김흥근이 듣지 않자, 

아들 고종과 함께 이곳을 다녀간 뒤 별장을 차지했다고 나온다.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는 것이 김흥근이 대원군에게 별장을 넘긴 이유였다.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원래는 김흥근의 소유였던 것을 고종 즉위 후 대원군이 사용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호인 석파를 본따 이름을 지은 이 집은 안양각, 낙안당, 망원정, 유수성중관풍루 등

모두 7채의 건물이 있다.

안양각 뒤쪽에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삼계동 이라 불리웠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원군이 머물렀던 이후 후손에게 전해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곳에 있던 별채 한동은 현재 홍지동의 석파랑 위쪽으로 옮겨 놓아 이곳을 대원군 별장이라 부르고 있다.

 

 조선 말기 세도가였던 김흥근이 갖고 있던 것을 대원군이 인수,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뀌었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됐다. 한옥 7개 동(棟) 중 사랑채·안채·별채·정자 4개 동이 남아 있다.

 

미술관 입장료를 낸 뒤 옥상 정원을 통해 석파정으로 가야 한다. 입장료는 성인 9000원

 

 

 

 

 

 

 

 

 

 

삼계동은 무계동 아래쪽인 부암동 318번지 일대다. 이곳에는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石坡亭(석파정)이 있다.

원래는 조선 말기 里門大臣(이문대신)으로 알려진 金興根(김홍근)의 별장인 삼계동亭子(정자)였다.

흥선대원군이 그의 아호인 石坡를 따 石坡亭으로 고쳐 불렀다.

석파정의 사랑채는 후에 홍지동으로 이동했다.


석파정(石坡亭)은 흥선대원군이 석파정을 소유하면서 별서에 붙인 이름으로, 

김흥근이 별서를 지어 경영할 당시에는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 

삼계정(三溪亭), 삼계동 산정(三溪洞 山亭) 등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현재 석파정 사랑채 서쪽 후면 암반에 새겨져 남아 있는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각자와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집필한 『소치실록(小癡實錄)』과 양의영(梁義永)의 『유북한기(遊北漢記)』 등

 일부 문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을 소유한 후 별서의 앞산이 모두 바위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또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출처 : 부천산수원산악회
글쓴이 : 사명대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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