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붙이면[付岩] 아들을 낳는다?!
金玧珽(조갑제닷컴 인턴기자)
우리나라에는 祈子信仰(기자신앙∙자식, 특히 아들낳기를 기원하여 행하는 신앙)이 만들어낸
다양한 미신과 조형물이 있다.
제주도에는 돌하르방, 부산에는 용궁사 得男佛(득남불), 그 외 수 많은 선바위들이 있다.
서울에는 이러한 祈子신앙이 만들어낸 洞名(동명)이 있다.
바로 자하문 터널 너머에 있는 付岩洞(부암동)이다.
이 지역은 북한산과 인왕산 자락에 위치해 바위, 계곡 등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부암동 洞名은 지금의 134번지에 있었던 2m 높이의 부침바위[付岩, 붙일 부/바위 암]에서 유래되었다.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수만큼 문질러 이 부침바위에 붙여 떨어지지 않으면 사내아이를 얻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祈子信仰을 믿는 많은 여인들이 다녀가 그 표면에 벌집같이 오목한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1977년 12월27일 자 <동아일보>에 이 부침바위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려 중기 元의 침입이 있었을 때, 元으로 끌려간 많은 장정 중에 결혼한 다음 날 끌려간 신랑이 있었다.
하루 만에 낭군과 생이별을 한 신부가 날마다 소복차림으로
이 바위를 찾아가 남편이 무사하기 바라며 치성을 드렸다.
이 광경을 우연히 왕이 보고 곧 元에 수소문해 여인의 남편을 찾아 마침내 부부가 다시 상봉했다.
더욱이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는 바위에 돌을 붙여도 안 붙던 것이 상봉 후에는 달라붙었다.
이로부터 옥동자를 祈求(기구)하거나 잃어버린 아들, 딸을 찾으려는 여인들이
이 바위에 돌을 붙이려 애쓰면서 이곳에서 소원을 빌었다.”
부암동 洞名을 만든 이 부침바위는 주변도로가 정리되면서 제거돼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付岩洞은 武溪洞(무계동), 白石洞(백석동), 付岩洞(부암동),
三溪洞(삼계동)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계동은 중국의 武陵桃源(무릉도원)에 있는 계곡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안평대군이 이곳에 武溪精舍(무계정사)를 짓고 자주 찾았다고 한다.
현재 터만 남아있고 안평대군이 썼다고 추정되는「武溪洞」 刻字(각자)가 남아 있다.
백석동은 115 및 115-1번지에 「白石洞天(백석동천)」이라 새겨진 글자 때문에 그리 불렸다.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삼계동은 무계동 아래쪽인 부암동 318번지 일대다.
이곳에는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石坡亭(석파정)이 있다.
원래는 조선 말기 里門大臣(이문대신)으로 알려진 金興根(김홍근)의 별장인 삼계동亭子(정자)였다.
흥선대원군이 그의 아호인 石坡를 따 石坡亭으로 고쳐 불렀다.
석파정의 사랑채는 후에 홍지동으로 이동했다.
부암동에는 옛 건물뿐 아니라 유금와당박물관, 환기미술관, 부암아트연주홀, AW컨벤션센터 등이 있다.
유금와당박물관은 瓦當(와당) 전문박물관으로 다양한 양식과 표현방법,
제작방법, 채색이나 문양 등을 알 수 있는 전시품이 있다.
환기미술관엔 한국의 추상미술가 수화 김환기의 작품뿐 아니라 다른 미술가의 작품 또한 전시되어 있다.
산모퉁이
MBC <커피 프린스 1호점> 한성이네 집
조용한 동네였던 부암동에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여름부터다.
산모퉁이에서 드라마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산모퉁이의 가장 큰 매력은 야외 테라스.
▷가는 방법: 창의문 사거리에서 능금나무길을 따라 약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나온다.
▷운영시간: 오전 11시~밤 10시 문의 02-391-4737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유적(사적 462호 → 명승 36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은 1800년대 도성에 인접하여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사랑채, 안채 등)와 연못 등이 남아있으며,
인근에"백석동천(白石洞天)"·"월암(月巖)"등의 각자(刻字)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백악산(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정면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 :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의 하나로 주변에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고 전하며, ‘
백석’이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석산’은 ‘백악산(북악산)’에서 착안된 것으로 풀이 된다.
백석동천 유적 일대를 백사골 또는 백사실로 불리우며,
백사실이란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재상 백사(白沙 ) 이항복(李恒福)의 별서(別墅)가 있던 곳이다.
서울 지역의 별서로서는 김흥근(金興根) 별서인 석파정(石坡亭), 김조순(金祖淳) 별서인 옥호정(玉壺亭),
심상응(沈想應)의 별서로 알려진 성낙원(城樂園) 등이 남아 있다.
백석동천은 남북을 중심으로 육각정자와 연못이 있고,
약 3.78m 정도의 높은 대지 위에 사랑채 부분과 안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 사랑채와 정자 등은 건물터에 기초만 남아 있고,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백석동천은 사랑채 등의 건물지와 연못, 각자바위 등이 잘 남아 있고
마을과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는 등 별서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춘
격조 높은 조원(造園)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헤럴드경제=박동미 기자]
서울 부암동 백사실 계곡 일대가 한때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별장이었던 걸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영원)는 명승 제36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내 건물터와 정자터 등
백사실(白沙室) 계곡으로 잘 알려진 이곳은 전통조경 양식의 연못, 정자터, 각자(刻字) 바위 등의 보존상태가 좋아
그동안 백석동천 관련 기록은 서울특별시가 발간한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35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2면 왼쪽 상단에 실린 백석동천 정자의 모습. 동아일보DB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보석을 찾았습니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울 최고 경관지 가운데 하나인 종로구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이곳의 정자 복원 방식을 둘러싸고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가 벌여온 논쟁을 옛날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해결했다.
2011년부터 백석동천 종합정비계획을 진행해 온 종로구청은 6일
“1935년 동아일보 지면에서 정자의 실물 사진을 찾았다.
신문에 실린 원형 그대로 되살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악산 북쪽 중턱에 펼쳐진 백사실 계곡은 경관이 수려하기로 이름 높다.
특히 백석동천은 흰 돌이 많고(백석) 신선이 사는 별천지(동천)라 불릴 만큼 절경이라
2008년 명승 제36호로 지정됐다. 1800년대에 조성된 별서(別墅·별장의 일종) 유적으로
연못 주위에 정자와 사랑채 터,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국회의 탄핵 의결로 직무가 정지됐을 때 이곳에 왔다가 감탄을 쏟아냈다.
지난해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소유였다는 숨겨진 역사도 밝혀졌다.
여러모로 가치가 높아 복원은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구청은 주춧돌만 남은 정자 원형이 어땠는지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건축사사무소에 의뢰해 창덕궁 후원의 태극정(太極亭)과 소요정(逍遙亭)을 참조한 계획안을 수립했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대 의사를 밝혔다.
조선시대 문인의 정원이라면 담백해야 하는데 궁궐 정자는 과하다는 지적이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지붕이 너무 화려하고 계자난간(鷄子欄干·닭 모양 부재로 지지한 난간)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동아일보 사진이 발견되며 한 방에 풀렸다.
1935년 7월 19일자 2면에 게재된 온전했던 정자 전경을 종로구청이 찾아냈다.
시민단체 주장대로 단아하고 소탈한 풍취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종로구청은 “실물을 확인했으니 기존 설계를 폐지하고 9월경부터 원형대로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세검정(서울시 기념물 4호)
세검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한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이귀, 김류등이
광해군과 그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해 이곳에서 칼을 씻었다 하여
영조 19년인 1743년에 정자를 세우고 불의를 무찌른 정의의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는 의미를 담아
세검정(洗劍亭)이라는 현판을 써서 하사한 것에서 연유하고 있다.
이 정자는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영조 24년(1748)에 고쳐 지었으나 11941년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주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 서울시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정자 앞의 홍제천 안쪽으로는 넓고 넙적한 바위가 은빛을 띠고 있어 마치 모래사장과 같은 분위기를 주었었으나
정자 뒤로 도로가 개설되고, 하천 정비 과정에서의 인공적인 제방 축조로 인하여
조선시대 정자 본래의 정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석파랑
흥선대원군이 탐낸 석파정'석파랑'은 조선후기의 건축물로 흥선대원군과 인연이 깊다.
대원군은 집권 후, 안동 김문 김흥근이 가지고 있던 창의문 밖 별장 '석파정'을 탐내서 구매를 원한다.
1958년 서예가 손재형이 석파정의 건물 일부를 지금의 부암동으로 옮긴다.
음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궁중음식과 반가음식의 재현이다.
홍지문 및 탕춘대성(서울시 유형문화재 33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으며,
한성의 북쪽에 있다 하여 한북문이라고 불리웠으나,
숙종이 어필로 ‘홍지문 ’ 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았으므로 공식 명칭을 홍지문이라 하였다.
홍지문은 1921년 홍수로 홍제천이 불어나 유실되어 50 여년 동안 방치해 오던 중
1977년에 복원하였으며, 홍지문 바로 옆에는 홍제천을 가로질러 건설되었던 오간대수문이 있는데,
오간수다리라고도 불리웠던 이 문 역시, 당시 홍수로 인해 유실되었다가 홍지문과 함께 복원된 것이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동쪽에서 서울 도성과 갈라져 홍제천을 가로질러
북한산 남서쪽의 비봉 아래 북한산성까지 연결된 약 4Km 의 서울 방어 성곽이다.
이 성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얻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숙종 44년인 1718년 윤 8월에 치열한 찬반양론 끝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숙종 45년인 1719년 봄에 완성되었다.
이 성의 명칭은 홍제천 상류의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던 장의사를 연산군이 없애고
경치 좋은 이곳에 연회장을 짓고 돌로 만든 주전자에 술을 채워
미인들과 즐기던 부근의 큰 바위를 ‘탕춘대 ’ 라고 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또 서울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 이라고도 한다.
이 성을 쌓은 후 장의사 터에 군사훈련을 하는 연융대를 비롯하여
경기도 일대 11개 읍의 대동미를 저장하는 평창등 중요한 군사시설을 두어 유사시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옥천암 마애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17호)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옥천암 경내의 거대한 암석에 새겨진 높이 5m의 마애불로
‘백불(白佛)’또는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 불린다.
현재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사면을 모두 개방한 각(閣)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 앞에서 기원하였으며,
조선 후기 고종의 어머니도 아들을 위하여 이곳에서 복을 빌었는데 이때부터 하얗게 칠을 하였다고 한다.
머리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팔꿈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비교적 둥근 얼굴은 눈이 가늘고 입이 작게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옷은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옷주름은 선이 깊지는 않지만 신체 전반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마애불로서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 앞에서 기원하였으며,
조선 후기 고종의 어머니도 아들을 위하여 이곳에서 복을 빌었는데 이때부터 하얗게 칠을 하였다고 합니다.
① 시기: 1901 추정
② 작자: 엘리아스 버튼 홈즈 (Elias Burton Holmes: 1870-1958)
③ 출처:
* “Seoul, The Capital of Korea” <Burton Holmes Travelogues 10> (1908)
* “The white Buddha” <Burton Holmes Travelouges> Vol. 10 (1917) p. 87. (Digitalized by Microsoft, http://www.archive.org/details/seoulcapitalofko00holmuoft)
* 전종숙, <전차표 사셨어요? (1987)>
④ 카페 참고: http://cafe.daum.net/distorted/c5L/646
① 시기: 1894-1903 추정
② 작자: 무라카미 코지로
③ 출처: 까를로 로제티 (Carlo Rossetti), <Corea e Coreani (1904, Parte I)>
④ 카페 참고: http://cafe.daum.net/distorted/c5L/641
① 시기: 1910 전후
② 작자: William W. Chapin, of Rochester
③ 출처: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1910년 11월호
가져온 곳: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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