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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테마여행 서울문화유산 부암동 코스 #1

tkaudeotk 2013. 5. 28. 22:34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시인 이상(李箱)이 살던 집터에 기념관이 세워진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과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는 17일

통인동 154-10번지에 위치한 이상의 집터에 새로운 형식의 기념관을 올해 안에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통인동 154-10번지는 이상이 3살 때부터 23살까지 살았던 백부 김연필의 집터 중 일부로,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국민은행의 후원을 받아 매입했으며

아름지기가 건축계획과 시설조성 및 운영을 맡아 최근 '이상의 집'이란 이름의 기념관 건립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건축가 김원, 민현식의 자문 아래 최욱(one o one 건축사무소) 소장을 필두로

이지은(SSWA 소장), 신혜원(Lokal Design 소장), 이소진(아뜰리에리옹서울 소장),

장영철ㆍ전숙희(WISE건축 소장) 등이 기본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아름지기 측은 오는 6월 착공해 연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기념관 형식을 탈피하고 인물을 기념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한편,

통인동을 비롯한 서촌 일대의 풍부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증폭시킨다는 계획이다.

 







이같은 취지로 아름지기는 기념관 착공 전인 4~5월 두 달여간 현재 집터에 남아있는 가옥을 중심으로

 '이상과의 대화'라는 표제를 걸고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등으로 꾸미는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작가 이주영은 가옥 내부를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 다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다방, 작업실, 워크숍, 공연장 등으로 사용하며 이상의 일상을 만나기 위한 플랫폼으로 활용한다.

어린이들과 함께 서촌 일대를 걸으며 일상 속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기념비 투어'도 진행한다.

미술비평가 정현은 이상 문학의 키워드 풀이와 응용, 출간된 관련 서적 목록 등을 정리하는 워크숍을 열고

건축사진가 황우섭은 이상의 집 프로젝트 과정 전체를 기록한다.

자세한 프로그램 내용은 재단법인 아름지기 홈페이지와 프로젝트 블로그 '다방'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박노수 미술관 7월 개관                                                                                 2013.02.26

기증한 약 1,000여점 담은 박노수 가옥 리모델링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종로구(구청장 김영종)는 한국 화단의 거장 남정 박노수 화백이 25일 별세함에 따라

박 화백이 2011년 구에 전달한 작품 약 1,000여점을 담을 박노수 가옥을 박노수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해

 7월 개장할 예정이다.

구는 2011년 11월 박 화백 본인 작품과 소장품 약 1000여 점을 기증받고 ‘구립 박노수 미술관’ 설립을 추진해 왔다.  

고인의 주요 작품은 선소운(仙簫韻), 하(月下)의 허(虛), 산(山), 고사(高士) 등이 있다.

종로구는 고인 생전의 작품과 소장품을 토대로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인 옥인동 박노수 가옥을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리모델링, 올 7월 경 개관해

고인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소개하는 열린 문화예술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할 예정이다.

박노수 화백이 25일 오후 1시20분경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고인은 1927년 충남 연기 출생으로 청전 이상범을 사사했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

‘한국화’ 아카데미즘의 기수로 평생을 전통미학의 계승과 이의 현대적 해석에 생애를 바쳤다.

박 화백은 제2회 국전 국무총리상 (1953), 제4회 국전 대통령상(1955), 대한민국 예술원상(1987),

5·16 민족상(1994),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 수훈(1995), 3·1 문화상(2000) 등을 받았다.

박 화백의 작품은 전통적 화제(畵題)를 간결한 선묘와 절제된 색채,

여백과 대담한 구도로 표현해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빈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발인 27일 오전 9시 ▲장지 여주 남한강공원 묘원
 

 

300년 전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수성동 계곡’… 원형에 가깝게 복원
 
ㆍ‘수성동’처럼 소나무 심고 돌 쌓아 11일부터 개방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대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水聲洞)’의 배경인 인왕산 수성동 계곡이 그림 속 원형에 가깝게 복원, 공개된다.

서울시는 종로구 옥인동에 위치한 수성동 계곡 복원공사를 완료, 11일부터 시민들에게 개방한다고 10일 밝혔다.
서울시는 2008년부터 진행된 옥인시범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수성동 계곡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
현존하는 그림 속 돌다리(기린교)와 계곡 일대를 서울시기념물로 지정하고 복원공사를 해왔다.

1060억원이 투입된 복원공사는 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 남아 있는 바위를 두드러지게 하고,

계곡 양쪽에 전통방식의 돌쌓기를 하는 등 그림 속처럼 암석 지형 회복에 중점을 뒀다.

또 옛 경관 복원을 위해 구부러진 소나무 등 나무 1만8477그루를 심었다.

시민들이 겸재의 시선으로 계곡을 즐길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초입에

관람 공간 등 편의시설도 마련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수성동계곡’이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졌다. 

서울 종로구는 1971년 건축되어 인왕산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지적을 받아 온 옥인아파트 9개동을 헐고 

수성동계곡 복원공사를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5월부터 시작하였던 수성동계곡 복원공사는 조경전문가와 문화전문가, 

서촌주거공간연구회가 30여 차례의 회의를 거듭하여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그대로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수성동계곡’에 등장하는 정자 ‘사모정’을 전문가 자문을 얻어 재현하고, 

계곡 부근에는 전통 조경 방식으로 소나무, 버드나무, 벚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를 식재했다. 

특히 계곡 아래에 걸려있는 돌다리는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며,

 통돌로 만든 제일 긴 다리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은 지난 2010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었고,

 안평대군의 집 ‘비해당’이 있던 곳이다. 

이곳과 관련하여 추사 김정희의 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 등 많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옥인동의 동명은 옥동과 인왕동의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옥인동의 동명이 유래된 옥동은 옥류동(玉流洞) 혹은 옥골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옥인동과 통인동에 거쳐 있는 지역이다. 

박종철 종로구 공원녹지과 주무관은 

“인왕산 수성동계곡 복원공사를 위해 옥인아파트 9개동 308세대를 철거하고 

서울시는 960억원의 예산으로 2009년까지 보상을 완료했다”고 밝히면서 

“조선시대 명승지인 수성동 계곡복원으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공원이자 

역사박물관인 종로가 새로운 가치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http://www.la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3389


 


▲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수성동계곡(돌다리보임)’1751년(간송미술관 소장)


지난 11일 서울 인왕산 수성동계곡이 시민에게 공개됐다. 이 계곡에는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옛 집터가 있었던 곳이다. 조선후기 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했던 명승지로, 추사 김정희의 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 등 많은
시에도 등장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린 계곡물은 청계천으로 유입된다.

특히 계곡아래 걸려 있는 돌다리는 정선의 그림에도 나왔던 '기린교(麒麟橋)'로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현재까지 제자리에 보존된 다리다. 이 돌다리는 좁고 깊은 암반을 교각으로 이용
했으며 길이 3.7m 정도의 장대석 2개를 붙여 가설했는데 다리 폭은 70cm 정도다.

기린교는 지난 1960년대 옥인아파트를 건설하면서 멸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모습이 전해져왔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중 수성동(당시 지명)의 그림이나

 1994년 출간된 '서울육백년(대학당 펴냄)'의 '수성동에 걸려 있던 기린교 돌다리'라는

1950~1960년대 사진에도 기린교가 등장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기린교가 원래 안평대군의 집이었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서울시 문화재위원인 손영식 전통건축연구소장은

"수평으로 놓은 다리이면서 교각이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소박하면서도 품위가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돼 보물로 지정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수성동계곡에는 1971년도에 9개동 306세대의 옥인시범아파트가 건축되었으나

 2010년 아파트가 노후 돼 주민들이 재난위험이 있다며 철거를 요구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아파트를 철거한 후, 이일대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해 기념물 31호롤 지정하고

 정선의 그림속의 경관처럼 원형을 되찾았다.

 특히 복원에는 옛 수성동 계곡처럼 암석지형을 회복하고 역사·생태·문화공간으로 만든다는 목표 아래

소나무·상수리·산철쭉 등 크고 작은 나무 1만8477그루를 심었으며,

전통 정자인 '사모정' 목교와 데크 등 1060억원을 들여 새롭게 단장했다.
또한 시민들이 ‘겸재 정선의 수성동계곡’과 똑같은 위치에서 계곡의 실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에 관람공간도 마련했다.

최광빈 서울시 공원녹지국장은 “현장을 방문한 결과 경관이나 물소리까지 옛것과 다르지 않다며,

 개발시대에 사라졌던 수성동계곡이 주변의 인왕산 한양도성과 함께

서울 서쪽지역의 대표적인 역사경관의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 밝혔다.

 

[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 시비와 함께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시인의 언덕'은 문학관이 개관하기 이전인 2009년에 조성됐다.

이후 2012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수도가압장을 개조해 '윤동주 문학관'이 탄생한 것이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윤동주문학관은 우리 영혼의 가압장이다.

세상사에 지쳐 타협하면서 비겁해지는 우리 영혼에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운 자극을 준다.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든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

별빛 쏟아지는 인왕산 자락, 하숙생 윤동주가 걷던 그 언덕                                      2012.08.31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출판계와 공연계에 시인 윤동주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예술단은 이달 창작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

뿌리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을 쓴 베스트셀러작가 이정명씨는

 윤동주의 삶을 모티프로 한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을 내놨다.

 

'청년 시인 윤동주의 생애 마지막 1년,

차가운 감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는 의문을 품고 집필하기 시작한 이 소설책은

현재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인기를 끌고 있다.

윤동주가 우리 곁을 떠난 지 70여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그는 고뇌하는 순수한 젊은이의 모습 그대로 연출가와 소설가,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뮤지컬과 소설책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으로 향했다.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청운공원에는 윤동주를 기리는 '시인의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시인의 언덕 아래에는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만든 '윤동주 문학관'이 지난달 25일 문을 열었다.

 

윤동주와 청운동의 인연은 그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하던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시절, 그는 학교 후배였던 정병욱과 함께 종로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 송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아침식사를 하기 전 집 뒤편의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삼아 오르곤 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그리고 '쉽게 씨워진 시(詩)' 등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완성됐다.

 

'제1전시관'에 들어서면 추운 겨울 눈 속에 핀 꽃과 같았던 윤동주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인의 집이라는 의미의 '시인채'로 불리는 이곳 전시실에서는 시인의 일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열한 

사진자료와 함께 친필원고 영인본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명동 소학교 졸업사진부터 그의 장례식 사진까지 볼 수 있다.
 
고뇌에 찬 낙서가 가득한 친필원고도 눈에 띤다. 

1942년 일본유학을 결심한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히라누마로 창씨개명을 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 '참회록'이라는 시 한편을 남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로 시작되는 유명한 작품이다.
 
그가 남긴 시 옆에는

'시인의 삶, 비애, 생(生), 생존(生存), 문학(文學), 모르겠다(不知道)' 등 단어들이 복잡하게 적혀 있다.

이 시를 쓸 당시 그가 느꼈던 죄책감과 자괴감 등이 글자들 사이에 녹아있는 듯하다.

아쉽게도 이곳에 전시된 원고들은 원본이 아닌 영인본, 즉 복제본이다.

윤동주의 유가족들이 시인의 육필원고와 유고(遺稿), 

유품 등 일체를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영구 기증한 때문이다. 

연세대는 기증을 계기로 윤동주 시인이 연세대 재학 시에 머물렀던 기숙사를

'윤동주기념관(가칭)'으로 확대 개편할 계획이다.

 

'제1전시실'의 가운데에는 그의 고향인 중국 길림성 명동촌에서 가져온 우물 목판이 놓여 있다.

'우물'은 윤동주 시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매개체로 우물은 곧 '성찰'을 뜻한다.

이 우물에 대한 기억은 그의 대표작 '자화상'을 낳았다.

이곳 문학관의 전체적인 테마도 '우물'이다.

제 1전시실을 지나면 물탱크를 개조한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로 이어진다.

'제1전시실'과 연결된 철문을 지나면 천장이 뚫려 있는 야외 정원인 '열린 우물'이 나온다.

 문학관 설계 도중 발견된 물탱크를 윗부분만 개방해 그대로 활용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 풍경이 액자에 담긴 그림 같다.

 물탱크에 저장됐던 물의 흔적이 벽체에 그대로 남아 있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느낄 수 있다.

다시 이 정원과 연결된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깜깜한 방이 나온다.

'열린 우물'과 대비되는 이곳은 '닫힌 우물'이라고 불린다. 물탱크를 그대로 활용했으나

 '열린 우물'과 달리 윗부분을 개방하지 않아 사방이 막혀 있는 감옥 같다.

1945년 윤동주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후쿠오카형무소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1943년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경찰에 검거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했다.

 

철문이 닫히고 '닫힌 우물' 내부에 빛이 모두 사라지면 윤동주의 삶을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당황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깜깜한 우물 안은 침묵 속에서 숙연해졌다.

영상을 통해 시인이 살았던 시간으로 돌아가보니 '모자에 진 작은 주름 하나도 견디지 못한 사람,

영혼의 구김도 참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던 윤동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윤동주 문학관의 제2전시실인 '열린 우물'. 물탱크의 윗부분을 개방해 열린 야외 정원으로 만들었다.

 

 

 

 

 

창의문

창의문은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청운동 일대에는 골이 깊고 물과 돌이 맑고 아름다워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고,

 창의문은 바로 이곳에 있어 다른 말로 자하문이라고도 불리웠다.

창의문은 서울 도성의 4소문 가운데 하나이며,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백악)의 서쪽 날개 부분에 해당되는데,

태조 5년인 1396년에 서울의 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립되었을 때 함께 건립되었다.

태종 13년인 1413년에는 풍수학생 최양선이 백악산의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올려 동쪽 고개에 있는 숙청문 (숙정문) 과

 이곳 창의문을 한때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하기도 했다.

 

이후 세종 28년인 1446년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 통제가 어느 정도 풀려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이외에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성안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 또한 아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진건 집터

현진건(1900-1943)은 대한제국 말기에 대구 우체국장을 지낸 경운(慶運 혹은 炅運)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빙허(憑虛). 1900년 8월 9일(음력) 대구 출생.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7년 일본 세이조중학(成城中學)을 졸업하고,

그해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 상하이로 가서 후장대학(?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1919년에 귀국했다.

당숙인 희운(僖運:필명은 현철(玄哲))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0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게 된 것도 그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1922년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백조〉 동인이 되었고,

그해 직장을 종합시사지 동명사(東明社)로 옮기고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200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되었다.

현진건은 근대 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의 마지막과 맞물렸던 부암동 생가

 

1937에 이사를 오고 1943년 까지 지낸 곳 2003년 헐렸다.

마지막 시기인 1930년대 이후에는 주로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

그는 이 시기에〈무영탑〉(동아일보, 1938. 7. 20~1939. 2. 7)·〈흑치상지〉(동아일보, 1939. 10. 25~1940. 1. 16)·

〈선화공주〉(춘추, 1941. 4. 9) 등을 발표했다.

종로구 부암동 325-2번지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리얼리즘 기초에 큰 기여를 한
빙허(憑虛) 현진건(1900~1943)이 살았던 곳이다.

1936년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 그는 이듬해 동아일보를 사직한다.

그는 출옥 후 이 집에서 생계를 위해 닭을 쳤었다.

그러다가 그는 친구의 꼬임에 빠져 미두(미곡을 이용한 투기로, 현물 없이 약속만으로 미곡을 사고 파는 일)를 하다가

재산을 탕진하면서 술과 가난 속에 빠지게 된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그의 흔적 [소설가 현진건 부암동 집 종로구 ‘문화재지정’ 건의]

 

서울 종로구는 16일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가인 빙허(憑虛) 현진건(1900~1943)선생의 집필공간이었던

부암동 325의2 옛집 에 대한 문화재 지정과 현진건 기념관 건립을 서울시에 건의했다고 밝혔다.

부암동 집은 현진건 선생이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옥고를 치른 이후 거주하면서

 ‘무영탑’ ‘흑치상지’ 등 의 소설을 집필한 곳으로 현재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고

앞 마당은 인근 주민의 주차장으로 이용되는 등 폐가로 방치되고 있다.

종로구 문화재위원인 김홍식(명지대 건축학부) 교수는

 “빙허 선생의 대구 계산동 생가와 서울 관훈동 고택 등은 모두 흔적없이 사라졌다”며

 “이제 빙허 선생의 흔적이 남은 곳은 부암동 집이 유일한 만큼

하루빨리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빙허 현진건 고택, 한순간에 철거되다]

 

종로구 부암동 325-2. 우리나라 근대문단의 사실주의 대표작가 빙허(憑虛) 현진건 선생의 고택을

지난 14일 중장비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철거한 사실이 밝혀졌다.

인근 주민은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중장비를 동원해 철거됐으며,

기와는 강원도의 업자가 가져갔고 덤프트럭에 폐자재들이 실려나갔다"고 전했다.

27일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는 빈터만 남아있었고,

300년이 넘어보이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현진건 고택과 붙어 있는 무계정사(서울시 유형문화재 호)를 지키는

 강아지들만 방문객을 향하여 거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선생의 고택은 서울시가 94년과 99년 두 차례 문화재 지정을 검토했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지정되지 못하고 표석만 설치한 채 인근 주민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표석도 7월 22일에 누군가 뜯어가 버리고 말았다.

 

※ 안평대군·현진건 부암동 집터 경매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과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인 현진건의 집터가 법원 경매로 나왔다.

 19일 대법원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부암동 319의4, 325의1, 325의2, 348의4 등 4개 필지가

 다음달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경매 처분된다.

이 중 319의4는 안평대군의 집터이고, 325의2는 현진건의 집터다.

경복궁 북서쪽에 있는 이들 집터는 아래 위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4필지의 땅 1635㎡(약 494평)와 안평대군 집터에 있는 기와집 108㎡(32평)가 경매 대상이다.

모두 민간인 J씨 소유이며, 감정가격은 40억7333만원이다.

 현 주인의 채무액이 34억원에 달해 경매 취하 가능성은 낮다고 경매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안평대군 집터 한쪽의 큰 바위에는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는 서예와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 명필로 꼽혔다.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에 의해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은 후 폐허로 변했다.

지금도 후대에 지은 낡은 한옥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집 바로 아래에 있는 공터가 현진건의 집이 있던 자리다.

 ‘운수좋은 날’ ‘빈처’ 등으로 유명한 현진건이 말년에 이곳에 살면서 우수한 작품을 쏟아냈다.

종로구가 공용주차장을 짓기 위해 빈집을 헐었지만 주민 반대에 부딪쳐 공터로 방치돼 있다.

집터 한쪽의 우물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솟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안평대군 집터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로 지정돼 있다.

 

조성근 기자 2012-09-20

 

 

 무계정사지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사용하던 정자인 ‘무계정사’가 있던 터이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1만 권의 책을 갖추고 
용산 강가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선비들과 함께 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대군이 역모로 몰려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 1년(1453) 이후에는 이곳도 폐허가 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한편 이곳에는 커다란 바위면에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무계정사’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 2003년 12월 5일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2호 무계정사에서 무계정사지로 명칭변경됨.
 

 

 

 

 

 

 

반계 윤웅렬 별장(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 → 서울시 민속문화재 12호)

 

높은 터 위에 행랑대문채가 있고 그 안에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집이다.

대문채는 一자형으로 오른쪽 둘째 칸은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는 방과 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안채는 행랑대문채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넌방, 안방이 배치되어 있다.

안방의 남쪽에 부엌과 방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의 옆면 뒷쪽에는 정원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내칸을 두었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안채와 정원이 잘 꾸며져 있으며,

전통 한옥건물에서 조금씩 현대화해가는 초기 과정의 특색을 보이고 있는 집이다.

 

 

 

 

 


출처 : 부천산수원산악회
글쓴이 : 사명대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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