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스크랩] 테마여행 서울성곽돌기 3

tkaudeotk 2013. 5. 18. 22:48



세월의 흐름속에 돌이 삭아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오랜 눌림속에 배불뚝이도 되고.....

살아있는 역사를 그대로 체험합니다

판소리를 직접 체험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실내도 아닌 야외에서....

우린 마이크가 장착되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체험,새로운 감동....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다. 통칭 동대문이라고 한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正東)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출처] 서울흥인지문 | 두산백과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중구 을지로(乙支路)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오간수문은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수문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다. 

이 때문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복원하였다.

그후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이유로 수문을 헐고, 

이듬해 3월에는 동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었다. 

대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것이다.

오간수교는 1926년 다시 확장·건설되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출처] 오간수문 | 두산백과


을지로6가 18번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한다.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광희문은 도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도성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다른 문이 설치될 때에 함께 건축되었다.

 광희라는 문 이름을 붙인 것은 광명(光溟)의 문을 의미하는 것이며

수구문이라는 속칭은 그 위치가 개천수구(開川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고

또한 남산의 동북 기슭 일대의 물이 이 문의 부근을 통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되거니와

한편 이 문으로 시체가 많이 나간다고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는 속칭도 있었다.

 

광희문은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있는 남소문(南小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문 이외에 별도로 남소문이 있었다.

별도로 남소문을 설치한 것은 세조 때이며 그 이유는 한강 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이 거리가 멀고 불편하므로 한강 나루터를 도성에서 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을 하나 새로 설치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세조도 남산 동쪽에 한강 나루로 바로 통할 수 있는 문을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세조 3년에 남소문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남소문은 설치된 지 12년 만인 예종 1년(1469)에 임원준(任元濬) 등의 건의에 의하여 폐지되었는데

경연도상에서 예종이 남소문을 막는 데 대한 의견을 묻자 임원준은 

 '도읍을 정하고 시설을 할 때에 살피고 생각하지 않아서 이 문을 설치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이 문이 설치되었어도 수레가 통하지 못하여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음양가(陰陽家)에서 손방(巽方)을 매우 꺼리기 때문에 처음 이 문을 설치할 때에도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과연 그 후에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음양설은 믿을 것이 못되는 일이지만 이 문은 막는 것이 가합니다.'라고 하여 폐문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남소문은 세조 3년(1457)에 설치되었다가 음양학적인 면에서도 좋지 않고

또한 실용적인 면에서도 큰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그 12년 후인 예종 1년(1469)에 폐문되었다.

그 후 명종·숙종 때에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수금기설에 의한 반대론에 부딪쳐 끝내 개통을 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남소문의 설치로 광희문이 남소문으로 오용되기도 하였으나

 남소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한 시기를 알 수 없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광희문은 서울특별시가 복원하여

지금도 광희문은 1915년경 문루가 자연붕괴된 이래 홍예만 남아 있었는데

1966년에는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그 후 1975년 서울 성곽을 다시 옛 모습으로 수축할 때 홍예석축을 해체하여

 남측으로 15m 이전 복원하고 멸실된 문루 12평을 원칙대로 복원하며 위 200평을 녹지화하는 조경사업을 실시했다. 

광희문 공사비 4,600만원과 보상비 1,810만원을 합하여 도합 6,410만원을 들여

1974년 12월 11일 착공 1975년 11월 17일 준공 복원되었다.


 성곽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이게 뭔지도 몰랐겠지요.

문화재라는 인식보다는 먹고사는 문제가 더 급했겠지요.










 1985년10월17일 중앙일보사가 창간20주년 행사로 매설

500년 후인 2485년 개봉예정

길이240cm로 15m 땅속에 묻고 그 위에 매설을 표시하는

석물을 세웠다.

태극기 주민등록증 화폐 크레디트카드 등 실물200점과

2만5천 페이지 분의 각종기록 통계 VTR테이프 가요 및 오디오 등

총 466점의 물증이 들어있다.

이 전망대는 1969년 12월 동양방송·동아방송·문화방송 등 3개의 민영방송국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종합전파탑과 함께 관광전망대의 건설을 허가받아 한국 기술과 장비로 착공하여 

6년간의 공사 끝에 1975년 8월 완공하였다.

1981년 10월 15일 일반에게 공개(3층까지만)되어 관광명소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탑에 올라가면 서울 전역은 물론 멀리 송악산(松嶽山)과 인천항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2000년 YTN에서 인수하고, 2005년 4월 YTN이 CJ와 서울타워 리노베이션 계약을 맺고 

전면 개설공사를 하여 2005년 12월 N서울타워로 개장하였다.

N서울타워는 해발 479.7m이며, 철탑·탑신 높이가 각각 101m·135.7m이다.

 

[출처] N서울타워 | 두산백과











출처 : 부천산수원산악회
글쓴이 : 사명대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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