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彰義門)은 도성의 4소문 중의 하나로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조 5년(1396) 도성을 축조할 때에 함께 건축되었다.
태종 때에 와서는 한때 폐문이 되었는데 폐문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숙청문 설명에서 기술한 바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거니와 태종 13년(1413) 최양선의 지리도참설에 의하여 폐문하였다.
태종 16년(1416)에 태종은 흥천사(興天寺)와 흥복사(興福寺)에서 기신재(忌晨齋)를 설할 것을 명하면서
「전에는 기신재(忌晨齋)를 장의사에서 행하였는데 지금은 장의동문(藏義洞門)을 폐하였으니
수미(輸米)와 왕래의 폐가 많아서 성내에 있는 2사에서 설행(設行)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한 것을 보면
이 때에도 창의문은 닫혀 있었으며, 또한 세종 4년(1422)에도 숙청문과 창의문 두 문을 열어서
군인의 출입통로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 28년(1446)에도 술사(術士) 이양달(李陽達)이
「일찍이 창의문은 경복궁을 누르고 또한 해를 끼치므로 그 곳을 통로로 하여 인적을 남기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여
길에다 소나무를 심고 항상 문을 닫아 두고 열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은 늘 사람이 통행하여 불편하니 지금부터 왕명을 받은 사람만 출입시키고
그 외는 항상 문을 닫아 두십시오.라고 하였고
광해군 9년(1917)에 수성도감(修城都監)에서는
「지금 이궁(離宮)과 북장(北墻) 축조는 그 주위가 넓고 멀어 대석(臺石), 잡석(雜石)의 운반 역사가 매우 큰데
만약 지세의 편하고 가까움을 취한다면 공력이 생략될 것이니
궁장(宮墻)을 완축하는 동안에는 창의문을 개폐하여 연입(連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건의하여 광해군은 이것을 허락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창의문은 태종 13년부터 항상 닫혀 있었으나
궁장 축조와 같은 국가의 대역이 있을 때에는 역력(役力)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창의문을 열어서 통행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영조 16년(1740)에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의로운 군대가 유입한 곳이니 개수하여 표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여 영조는 다음해 봄에 이것을 개수하라고 하명하였고
영조 17년(1741) 1월에는 구성임이 성문을 개수하려고 하면서
문루도 개축할 것을 청하여 영조는 이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인조반정시 공을 세운 김류(金臘) · 이귀(李貴) · 이괄(李适) · 원두표(元斗杓) 등의
1등공신에서 3등공신까지의 공신명이 기록된 현판을 만들어 걸었는데 이 현판은 지금도 보존되어 온다.
1956년에 창의문을 보수하였는데 이 때에 영조 17년에 창의문의 문루를 건립하면서
기록하여 둔 묵서(墨書)가 장여(長茹)에서 나왔다.
이 묵서는 ‘건륭육년신유유월십육일오시상량(乾隆六年辛酉六月十六日午時上樑)’이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현재에 있는 창의문의 문루는 영조 17년(1741) 1월 구성임의 건의에 의하여
그 해 6월 16일에 상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의문도 그 서쪽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통행로가 되었으므로
항상 닫힌 채 그 모습은 변함없이 49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다음 창의문의 건축 양식을 살펴보자.
창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우진각기와지붕으로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지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중 잔존하고 있는 완형의 유일한 유례이다.
목조문루(木造門樓)는 튼튼하고 정교하며 석문은 아담하다. 문에는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과 성북구 성북동에 걸쳐 산으로 경복궁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정면적은 약 3,598,127㎡에 이른다. 국유지·공유지·사유지가 섞여 있으며 서울특별시가 관리하고 있다.
백악산은 북악산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의 도읍지인 한양(漢陽)의 후현무(後玄武)에 해당하는 북쪽 주산(主山)이다.
이 지역에는 서울이라는 도성의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궁인 경복궁의 후원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귀중한 식생경관을 유지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큰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 도성 축성에 있어서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북악산은 낙산, 인왕산, 남산과 더불어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중 하나로, 각종 고문헌에서 '백악(白岳)'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에
그 지명을 살려 '서울 백악산 일원'이라는 지정명칭을 붙였다 한다.
2007년 12월 3일 사적 및 명승 제10호 '서울 백악산(북악산) 일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2월 9일 지정해제됨과 동시에 명승 제67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서울 성곽의 성벽 돌 중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들이 있다.
이는 대개 성벽 축조 당시 공사 구역을 표시한 것(천자문의 글자 劒, 崗, 辰 등), 공사 담당 군현(의령, 흥해 등),
그리고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을 표시한 것이다.
서울 성곽은 태조 5년(1396) 처음 쌓을 때부터
전체 59,500척(약18.2km)을 600척 단위로 나누어 총 97구역으로 구획하고 천자문 순서로 표시하였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天 자로 시작하여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조민벌죄弔民伐罪, 불쌍한 백성을 돕고 죄지은 자를 벌하다의 조弔 자에서 끝난다.
성벽 곳곳에는 ‘진자종면辰字終面, 진자 구역 끝지점’,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
강자구역 600척’ 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도道 또는 현縣의 담당 지역을 표시하여 ‘의령시면宜寧始面, 경상남도 의령 시작 지점’,
‘흥해시면興海始面,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 시작 지점’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대에는 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가경 9년(1804년) 갑자 10월일嘉慶九年 甲子 十月日 패장牌將 오재민吳再敏, 감관監官 이동한李東翰 변수邊首,
기술자, 편수 용성휘龍聖輝 등을 기록한 글씨도 보인다.
숙청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도성의 북문으로서
이 문도 다른 도성의 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그 18년 후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함께 폐쇄해야 한다고 상언하여
이에 따라서 숙청문은 항상 닫아 놓고 통행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숙청문은 최양선의 건의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폐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니
그것은 숙청문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백악산의 산맥으로 산이 높고 험해서 통행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산을 넘으면 또 북한산맥이 앞을 막고 있으므로 이 문을 통과하여 다른 데로 연결되는 도로가 없었다.
이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경원가도(京元街道)로 연결이 되나
경원가도는 숙청문에서 훨씬 남쪽에 있는 혜화문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 혜화문은 거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경원가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쉽고 편리한 혜화문을 이용하지 않고 불편한 숙청문을 이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폐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재가 심할 때는 숙청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으며 장마가 심하면 이 문을 닫고 숭례문을 여는 풍속이 전하였으니
그것은 태종 16년(1416) 예조에서 마련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서,
한재가 심하면 먼저 종묘 · 사직과 명산 · 대천에 기우제를 거행하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아니하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며 시장을 옮기고
인정과 파루를 알리는 종루의 종을 치지 않고 쟁(錚)을 치고,
비가 오면 숭례문을 열고 숙청문을 닫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을 환원하였다.
이것은 북은 음이요 남은 양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
혜화문은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도성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창축과 함께 건설되었는데 이 때의 문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러나 성종 14년(1483)에 세운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였으므로
이 창경궁의 동문 이름과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중종 6년(1511)에 홍화문을 혜화문이라고 개칭하였다.
그리고 《영조실록》에 영조 20년(1744) 8월 경술조에
‘혜화문은 전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건립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혜화문도 처음 건립 당시의 문루는 언제인가 없어졌고
석문만 남았던 것을 영조 20년에 어영청에 하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도성의 대문에 못지 않은 기능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이 문과 연결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통행했으며
또한 북대문인 숙청문이 항상 폐문되어 있었으므로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하였다.
현재의 위치로는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었는데
일제의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인들 손에 의하여 문루는 1928년에 헐리었으며
홍예로 된 석문마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 후 1994년 원래의 위치보다 북쪽에 웅장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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