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기할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18일부터 문루 상부 1층 특별 관람 시행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국보 1호 숭례문이 5년 2개월 20일간의 복구공사를 마치고 4일 위엄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오후 2시에 시작된 준공식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귀빈이 참석했다.
준공식 행사는 식전행사로 오후 1시 50분부터 어린이 합창과 액운을 씻어내는 ‘천도(薦度)’ 공연이 진행됐으며,
명예수문장의 개식타고(開式打鼓), 영상물 상영 경과보고, 현판 제막식,
국립국악원의 전통공연 ‘고천(告天)’, 개문(開門)식 등이 이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축사에서 “새롭게 탄생한 숭례문은 우리 국민 모두의 작품”이라며
“기와 한 장 단청 하나에도 혼신의 노력을 담아 땀 흘린 수많은 장인 여러분의 노고와,
대를 이어 길러 온 소나무를 아낌없이 (숭례문 복구를 위해) 기증하고
7억 원이 넘는 성금을 모아 보내준 국민 여러분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고 전했다.
또 “오늘 숭례문 복구가 우리 문화의 저력과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축사했다.
이날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는 오후 4시 개방임에도
일찍부터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민이 몰려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숭례문을 환영했다.
울산에서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숭례문을 보기 위해 서울을 찾은 김윤수(16) 학생은
“불이 났을 때 뉴스를 보고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복구 됐으니 다시는 불에 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동생 김지수(12) 학생은 “복구됐으니 관리가 더욱 잘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아내와 함께 숭례문을 찾은 오용식(서울시 상계동) 씨는
“허망하게 무너졌을 때 정말 안타까웠는데 5년 만에 이렇게 복구해서 매우 기쁘고 반갑다.
다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시민과 더불어 같이 잘 보존해서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정겨운 숭례문이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복구된 숭례문은 기념식 이후부터 국민에게 시간대별로 공개한다.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18일부터는 문루 상부(1층)를 매주 토요일(오전 11시, 오후 1시․3시)과
일요일(오후 1시, 2시, 3시)에 특별 관람할 수 있으며,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20명씩 신청을 받는다.
문화재청은 5월 중에 숭례문 관람 시간을 오후 7시까지 1시간 연장한다.
개방에 따라 감시 인력 총 21명이 배치, 교대로 돌아가며 숭례문을 철통 경비한다.
한편 이날 오후에는 숭례문 복구 기념식을 맞아 세종로와 광화문 광장 곳곳에서도
자유연희마당, 비나리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됐다.
[헤럴드경제=채상우 인턴기자]
‘국보 1호’ 숭례문의 ‘홍예문’ 천장의 용문양이 기존 문양과 다르게 복원됐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홍창원 단청장의 아들이라는 누리꾼이 이에 대해 해명했다.
숭례문의 복원 공사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가운데 지난 25일 화려한 단청문양으로 치장을 마친 누각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홍예문 천장의 용문양으로 중요 무형문화재 48호 홍창원 단청장에 의해 복원됐다.
그런데 이 용문양을 두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복원 전 문양과 전혀 다른 문양이라는 논란이 일었다.
누리꾼들은 “웬 만화 속 용이...”, “소실되기 전 문화재 그대로 복원해야지”, “우리나라 복원 사업이 이렇지 뭐...
대충 대충 하는 것 좀 그만둬라 뭐냐 이게 답답해서 원...” 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전문가와 파워 트위터리안 등도 가세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지난 30일 트위터를 통해 “용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 십중팔구 ‘단가’일 겁니다.
디즈니 캐릭터 같은 이 용이 ‘가격’ 중심문화의 상징인 셈이죠”라고 지적했다.
이상호 MBC 기자는 이 멘션을 리트윗(RT) 하며 “이러다 다보탑은 레고로 만들겠네”라고 비꼬았다.
이에 홍창원 단청장의 아들이라는 누리꾼이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해명에 나섰다.
그는 “이번 숭례문 단청 복원에서 핵심은 조선 초기 단청의 복원이다.
숭례문이 조선 태조 때 완성된 초기 건축이기 때문”이라며
“그때는 화려하지 않은 굉장히 수수한 단청으로 돼 있었다”고 반박글을 올렸다.
그는 이어 “이번 논란이 되고 있는 용은 1963년 용을 복원한 것이다.
그 때의 숭례문 단청이 조선초기 단청으로 알고 있고
문화재청 등에서 그 때의 용으로 하라고 한 것으로 알고있다”고 덧붙이며
1963년도 용사진을 함께 게재했다.
해당 누리꾼이 올린 사진을 보면,
63년 당시 용문양은 복원 직전의 용문양과는 다른 모습으로 현재 복원된 문양과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본 누리꾼들은 “사실 확인 없이 동조하며 비난하는 댓글문화 고쳐야 한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만들어낸 해프닝 이었다”,
“저 그림이 기존 모습을 가장 잘 복원한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doubleu@heraldcorp.com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은 1394년 한양 천도 후 새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는 역할을 맡았다.
종묘와 사직, 궁궐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 아니라 각종 궁궐 및 전각, 거리의 이름을 손수 지었다.
그는 1395년 도성축조도감 책임자가 되어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약 17㎞의 성벽도 쌓았다.
성곽의 4대문을 건설하면서 이름에는 유교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나타나도록 했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라 이름지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현판 글씨를 통해 보완했다.
숭례문의 경우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불로 다스리기 위해 다른 문과 다르게 세로로 쓰도록 했다.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자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가리킨다.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도록 비보(裨補)를 쓴 것이다.
숭례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오랜 논쟁거리다.
태종의 큰아들로 한때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지금 남대문의 숭례문 석자는 그가 쓴 글씨”라고 했다.
한편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숭례문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했다.
정난종(1433~1489)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서예에 뛰어나 비석이나 종에 글을 새겼다.
추사 김정희는 ‘완당 전집’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신장의 글씨”라고 적었다.
신장(1382~1433)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서체로 이름을 날린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으나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1929년 9월호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 때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기록했다.
옛 기록의 서술이 엇갈리는 것은 태조 7년(1398년) 준공된 숭례문이 크고 작은 화재로 손상되면서
세종 30년(1448년) 개축과 성종 10년(1479년) 중수를 거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장대함과 우아함을 갖춘 숭례문 서체의 수려함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와중에도 현판을 구해낸 것은 천만다행이다.
현판은 2009년 7월 완전 복원됐다.
한국전쟁 이후 수리과정에서 일부 글자 획이 변형된 것은 19세기 탁본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숭례문 현판이 공개될 그날이 기다려진다.
서울신문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도성(都成) 숭례문 밖 바로 앞에 있던 ‘남지(南池)’라는 연못터이다.
관악산의 강한 화기(火氣)에 노출되어 있는 경복궁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에서 만든 큰 연못으로,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옛 지도를 보면 남대문(숭례문) 앞에 남지(南池),
서대문 북쪽에 서지(西池), 동대문 안쪽에 동지(東池)라는 연못이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연꽃이 피는 연못이었다 한다.
1629년 화가 이기룡이 원로들의 잔치를 묘사한 <남지기로회도 南池耆老會圖>에서
연꽃이 가득했던 남지를 확인할 수 있다.
소덕문은 도성의 서남쪽 숭례문과 돈의문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고
도성의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건설되었다.
그러나 성종 3년(1472) 소의문(昭義門)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종이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에게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는데
이 시호와 소덕이라는 문 이름이 같으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소덕문도 태조 5년(1396)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9년(1743)에 금위영에 명하여 동년 8월에 문루를 건축하였다.
도성내의 시체는 광희문과 소의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으므로
도성내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시체는 모두 이 문을 통하여 나갔다.
500여 년을 내려오던 이 소의문은 일제 때인 1914년 도시 계획이라는 구실로 모조리 철거하였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서소문동이라는 동명만이 남아 그 옛날의 소의문을 연상케 한다.
돈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문이 준공되었을 때에 함께 준공되었다.
그러나 태조 13년(1413) 6월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장의동의 창의문과 관광방(觀光坊)의 동령(東嶺)에 있는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하여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길을 막고 거기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는 동시에 같은 이유로
사직동 고개에 있던 돈의문도 폐쇄하고 그 남쪽에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태조 5년에 건립된 돈의문은 오늘날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태종 13년에 건립되었다는 서전문(西箭門)도 그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의정부에 명하여 새로 서문을 세울 만한 곳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의 집 앞에 있는 구로(舊路)를 따라서 문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숙번이 인덕궁(仁德宮) 앞에 작은 동(洞)이 있는데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하여
그가 말하는 곳에 서전문을 세웠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서전문은 경희궁(구 서울고등학교 자리)이 있던 서쪽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수축할 때에 서전문에 옹성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군인 1,000명을 계상(計上)하였으나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그 남쪽의 마루턱에 새로 문을 세우고 문명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고 하였다.
서전문을 헐고 새로 돈의문을 건립한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서전문이 있던 곳은 지대가 놓고 험하여
통행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편리한 곳으로 문을 옮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현재 돈의문이 있던 위치와 서전문이 있던 위치를 살펴보면
돈의문의 위치가 서전문의 위치보다 통행에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종 37년(1711) 9월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건의에 의하여
광희문을 개건할 때 돈의문과 함께 건립하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을 보면
돈의문도 숙종 때에 재건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태조 5년(1396)에 도성의 서쪽에 대문으로 건설되었던 돈의문은
태종 13년(1413)에 그 남쪽으로 건립하고 서전문이라고 하였으며
세종 4년(1422)에는 다시 그 남쪽으로 이건하고 본래의 명칭대로 돈의문이라고 하였다.
이 돈의문은 서북쪽의 관문으로 410여 년 간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열어 행인을 통제하고 또 유통하였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 확장이라는 구실로 철거되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신성한 대상물이 되고 있는 바위로, 마치 중이 장삼-검은 베로 만들어진 품과 소매가
넓은 중의 웃옷-을 입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불교의 ‘선(禪)’자를 따서 이와같이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쌓을 때 당시의 문신이었던 정도전과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로 크게 의견대립을 보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만일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면 불교가 왕성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문신들은 힘을 못쓰고,
성 밖에 두면 반대로 승려가 힘을 못쓰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결정을 못 내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눈이 녹지 않은 자리가 있어 태조는 이것을 성터라고 생각하였고
결국 바위는 성 밖으로 밀려났다 한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있는 자연석으로서, 직접적인 신앙대상물은 아니지만
불력(佛力)을 지닌 존재처럼 신성시 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높이 338.2m이며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北岳)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조선 초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鄭歚)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지명이 환원되었다.
군사적인 이유로 1968년 1월 21일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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