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엄홍길 | |
출생 | 1960년 9월 14일 (51세) 대한민국 경상남도 고성군 |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호암초등학교 |
직업 | 산악인 |
자녀 | 1남 1녀 |
상훈 | 2009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선정 올해의 인물 |
웹사이트 | http://www.umhonggil.com/ |
엄홍길(嚴弘吉, 1960년 9월 14일 -)은 대한민국의 산악인이다.
아시아 최초로, 인류 역사상 8번째로 히말라야 8천미터급 14좌에 완등했고
8천미터급의 위성봉 얄룽캉을 완등했다.
2007년 5월 31일 8400미터의 로체샤르도 완등하면서 세계 최초로 16좌 완등에 성공했다.
병역
k2
엄홍길은 해군 특수부대 UDT 출신이다.
군생활 시절 포항 감포에서 독도까지 5박 6일동안 수영해서 가보기도 했다.[2]
[편집]등정
1985년 9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원정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1988년 9월에 다시 도전하여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시샤팡마(8,027m)등정에 성공하여 13년 만에 14좌 등정을 모두 성공했다.
2004년 5월 5일에는 14좌에 속하지 않는 위성봉 얄룽캉(8,505m) 등정에 성공하였다.[3]
[편집]로체샤르
로체샤르는 히말라야 산맥중에서도 등정이 가장 어려운 산맥으로
엄홍길은 2001년 첫 도전에 실패했으며 2003년 도전에서 성장을 150미터 앞두고 판상 눈사태가 일어나 동료 두 명을 잃었다.
2006년에 3번째 시도도 실패했다. 2007년 5월 31일에 4번째 도전에서 로체샤르 남벽을 통해 등정했다.
평균 각도가 70에서 90도에 이르는 남벽 높이만 3500미터나 된다.[4]
오르다보면 눈이 쌓인 부분이 있는데 절벽의 눈을 깎아낸 후 두평정도 되는 작은 텐트를 설치해 휴식을 취한다.
낙석, 낙빙 위험도 있으며 실제로 돌이 텐트를 뚫고 들어와 동료가 다친적도 있으며
드물게 텐트 전체가 쓸려가는 경우도 있다.
빙벽은 발 전체가 닿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앞발로만 디디고 25시간씩 올라가야 한다.
대소변도 그 상태에서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고 봐야한다.[5]
8천미터의 산에서는 산소가 해수면의 1/3가량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세발 움직이고나서 3~5분간 숨을 거칠게 쉬어야 다음 한 발을 내딛을 수 있고 체력도 금방 고갈된다.
평균 기온이 영하 30~50도 가량 되어 손끝과 발끝은 감각이 사라진다.
거기에 환각증세가 일어나 옆에 동료가 말을 시키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며 꿈을 꾸기도 하며
이 상황에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6]
엄홍길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자주 느끼지만 정신력으로 극복한다고 말했다.[7]
로체샤르에 오르는 순간 38번의 히말라야 등정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숨진 동료들이 생각나 태극기를 꼽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동료 변성호 대원에게 눈에 빛이 반사되어
설맹이 걸려 앞이 안보이는 현상이 발생했다.
대원들은 당황했으나 어쩔 수 없이 안보이는 대원을 데리고 하산을 결정했고
서로의 몸을 묶은상태에서 내려가는 도중에 발을 헛디뎌 죽을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다행히 무사히 하산했다.[8]
5시간이면 내려오는 것을 12시간동안 통신 두절이 되 베이스캠프 기자들이 실종기사를 내보내려는 순간 엄홍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엄홍길은 떠난 동료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을 달라며 기도했다고 한다.[9]
[편집]휴먼 원정대
2004년에는 에베레스트산에서 숨진 박무택, 백준호, 장민 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엄홍길과 대원들이
'휴먼 원정대'라는 팀을 꾸려 등정하기도 했다.
세 명의 대원들은 엄홍길과 함께 한국에서 준비한 후 네팔에서 헤어져 에베레스트로 갔고
엄홍길은 얄룽캉이라는 15좌에 등정하기 위해 흩어졌었다.
엄홍길이 정상에 등정 후 하산길에 후배들의 조난 소식을 들었다.
8750미터에서 설맹에 걸려 주저앉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결국 내려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시신이 실종된것도 아니고 산에 매달려 있어 다른 사람들이 등정할때마다 지나치게 되는데
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 휴먼원정대를 꾸려 시신 수습에 나선 것이었다.
휴먼원정대는 산악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써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다.
엄홍길은 컨디션이 아주 안좋아 고생을 많이 했다.[10]
[편집]기타
엄홍길은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정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이 정상을 잠시 빌려주는 것일 뿐 사람이 어떻게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자신이 산에 올라간것도 산이 자신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
엄홍길은 산에 오를 때 대원들에게 엄하게 대한다.
엄홍길은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풀어지면 죽을수도 있기 때문에 예민해질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정상에 오르면 엄홍길이 엄하던 모습에서 온화한 모습으로 변하며 산에 내려와서도
그동안의 나쁜 감정들은 다 잊어버린다고 말했다.[7]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위험한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딸과 함께 히말라야 트랙킹 특집을 했는데 목표가 4~5천미터 베이스 캠프였다.
하지만 딸은 생각보다 훨씬 잘 걸었고 불평도 하지 않아 엄홍길이 놀라기도 했다.
엄홍길은 딸이 데려온 미래사위가 산악인으로 로체샤르를 간다고 하면 말리겠다고 말했다.[7]
엄홍길은 피서철에도 산을 찾을정도로 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바다로 갈 경우에도 산이 인접한 곳으로 간다.[7]
엄홍길은 보험에 들 수 없다.
보험 약관에 전문 산악인은 가입할 수 없다는 규정때문이다.[12]
1년중 6개월을 등정에 쏟는 기간때문에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어렵다.
서양 국가들의 경우 정부 지원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기업, 사회 전반적으로 도전정신, 모험정신이 바탕이 된 문화, 스포츠 분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7]
14좌를 완등한 사람은 세계적으로 12명이 있는데 유일하게 대한민국이 3명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엄홍길은 "한국인의 끈기와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엄홍길은 이제 후배들에게 산을 등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으면 한다며
청소년, 어린이들에게 자연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7]
학력
봉우리 |
높이(순위) |
산위치 |
등반일자 |
8850 m (1) |
중국/네팔 |
1988년 9월 26일 |
|
8201 m (6) |
중국/네팔 |
1993년 9월 10일 |
|
8463 m (5) |
중국/네팔 |
1995년 5월 8일 |
|
8047 m (12) |
중국/파키스탄 |
1995년 7월 12일 |
|
8516 m (4) |
중국/네팔 |
1995년 10월 2일 |
|
8167 m (7) |
1996년 5월 1일 |
||
8163 m (8) |
1996년 9월 27일 |
||
8068 m (11) |
중국/파키스탄 |
1997년 7월 9일 |
|
8035 m (13) |
중국/파키스탄 |
1997년 7월 16일 |
|
8091 m (10) |
1999년 4월 29일 |
||
8126 m (9) |
1999년 7월 12일 |
||
8586 m (3) |
인도/네팔 |
2000년 5월 19일 |
|
8611 m (2) |
중국/(파키스탄/인도) |
2000년 7월 31일 |
|
8027 m (14) |
2001년 9월 21일 |
*엄홍길의 시샤팡마 등정은 1993년에 이루어졌으나 등정의혹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의 국제 공인 기록은 2001년 재등정을 인정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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