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정보

고상돈

tkaudeotk 2011. 11. 25. 11:57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한 산악인. 대한산악연맹 충청북도지부 이사를 지냈으며
알래스카산맥의 매킨리산 등정 후 하산하다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1977년에 청년대상, 체육훈장 청룡상을 받았다.
국적한국
활동분야등산
출생지제주
주요수상체육훈장 청룡상(1977)
본문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며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청주에 있는 전매청 연초제조창에 근무하면서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년을 수료하였다. 

1970년 3월 대학산악연맹 회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한국일보사 대한산악연맹이 공동으로 후원한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 대원 19명)의 제주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77년 9월 15일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하였다. 

1977년 구성된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2차 공격조로서

 셰르파(Sherpa) 펨바 노르부와 함께 9월 15일 낮 12시 50분(한국시간 오후 4시 30분)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을 출발한 지 7시간 20분간의 사투 끝에 정복하였다. 

등정을 마치고 무전을 통해 "여기는 정상, 더이상 오를 데가 없다"고 했던 당시의 말이 유명하다.

당시에는 원정대의 장비상황이 열악하여 1차 공격조이던 박상렬 부대장이 28개의 산소통을 다 쓰면서도 정상 앞 100m 지점에서 실패하여 

그의 등정이 힘든 상황이었으나 에베레스트산 기슭에서 

프랑스 원정대가 버리고 간 신품 산소통 12개를 그가 주운 것이 정상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행운이었다. 

그는 정상에 1시간 가량 머물면서 

1976년 설악산 동계훈련을 받다가 눈사태를 만나 숨진 최수남·송준송·전재운의 사진을 만년설에 묻었다. 

1971년 네팔정부에 에베레스트 입산 허가신청을 내면서 시작된 에베레스트 원정은 무려 6년에 걸쳐 도전한 끝에 그에 의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한국은 국가별로는 세계에서 8번째, 등반팀으로는 14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가 되었다. 또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몬순(계절풍) 기간인 9월중 등반과 21일간의 고속 캐러밴 등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대한산악연맹 충청북도지부 이사로 있으면서

 1979년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알래스카산맥 매킨리산(McKinley;해발 6,194m) 원정대에 참가하여 1979년 5월 29일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이일교와 함께 5월 29일 하산하다가 자일 사고로 추락하여 사망하였고,

 이때 박훈규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써 그는 영원한 산사나이로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1977년에 청년대상, 체육훈장 청룡상을 받았다. 

제주도의 한라산 해발 1,100m 고지에 묘소가 있으며 고() 고상돈대원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해마다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2002년 6월 에베레스산에서 청소활동을 벌이던 단체에 의해 고상돈 원정대의 깃발이 발견되었는데,

깃발에는 '77 K.E.E(77: 등반연도, K.E.E: Korea Everest Expedition)'라고 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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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돈(高相敦, 1948년 12월 9일 ~1979년 5월 29일)은 1948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산악인이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고상돈.

일제 시대에 한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손기정 선수 못지않게,

당시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훌륭한 인물이었다. 

일생

청주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71년 네팔정부에 입산허가서를 제출한 지 6년 만인 1977년에 등반할 수 있었고, 

그해 9월 15일 낮 12시 50분 에베레스트 산을 한국인 최초로 등정하였다. 

당시 고상돈이 한 말은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였다. 

정상의 눈을 손으로 파헤친 뒤 성서와 사진 석 장을 묻음으로써 먼저 간 동료들을 추모했다고 한다.

[편집]사망

1979년 알래스카산맥의 매킨리산(6194m) 원정대에 참가하여 

1979년 5월 29일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하산도중, 이일교와 함께 1,000m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하였고,

 박훈규(현재 58세)는 목숨은 건졌으나 10개의 발가락과 7개의 손가락을 잃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써 그는 지금도 존경받는 영원한 산사나이로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한편 박훈규는 퇴원 후 방황하다가 6년후 한라산 등반, 제주산악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산악인의 삶을 다시 시작하였다.[1]

[편집]사망뒤

1977년에 청년대상, 체육훈장 청룡상을 받았고 한라산 해발 1,100m 고지에 묘소가 있다. 

그가 죽은 후, 고상돈대원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해마다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2002년 6월 에베레스트 산에서 청소활동을 벌이던 단체에 의해 고상돈 원정대의 깃발이 발견되었는데, 

깃발에는 '77 K.E.E(77: 등반연도, K.E.E: Korea Everest Expedition)'라고 씌어 있다.

[편집]

에베레스트서 '고상돈 깃발' 발견  
한겨레신문2002년6월16일(일)22:27

지난 5월 중순 에베레스트산에서 청소활동을 벌이던 단체가 우연히 1977년 한국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했던 고상돈(1979년 사망)원정대의 깃발을 발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에베레스트 국제청소원정대(대장 노구치 켄)'는 16일 "지난 4월부터 두 달간에베레스트산을 청소하던 중 해발 6천m 지점에서 고상돈 원정대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주황색 삼각형 깃발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청소원정대측은 "이 깃발에는 '77 K.E.E'라는 표기가 되어 있는데 '77'은 등반연도를, 'K.E.E'는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Korea Everest Expedition)'의 약자로 고상돈 원정대가 정상정복 루트를 만든 후 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77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씨는 79년 5월 29일 알래스카의 매킨리산 등정 후 하산 도중 사망했다.

한국,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 5개국 산악인 40여명으로 구성된 '국제청소원정대'는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하는 등반대원들이 버리는 산소통,등산용품 등의 쓰레기를청소하기 위해 지난해 결성된 단체로 지난 4월1일부터 두달동안 에베레스트산에서 2.2t의 쓰레기 수거 후 지난달 28일 귀국했다.

(서울/연합뉴스)



2002년 6월17일자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에베레스트 국제 청소 원정대’가 산을 청소하던 중 

해발 6천m 지점에서 ‘77 K. E. E.’라고 표기된 주황색 삼각기를 발견했다는 것. 

K. E. E.는 Korea Everest Expedition, 즉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약어다. 

1977년 한국인으론 처음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에 오른 고상돈 원정대가 사용했던 깃발이었다. 

고산설원에 묻혀 잠잔 지 25년 만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감히 넘보기 어려운 경외의 대상 ‘히말라야’


히말라야 마나슬루 참변서 본 등반 고투사
1972. 4. 15 [동아일보] 3면


공교롭게도 ‘77 한국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출발기사 역시 6월17일자 신문에 실렸다.

 동아일보는 선발대 3명이 전날 김포공항을 떠나 네팔로 향한 사실을 스포츠 면에 보도했다.

 10월3일 개천절을 D-데이로 잡고 8848m 도전에 나섰다고 보도했지만 성공가능성을 낮게 봐 

8면 신문 마지막 페이지 맨 밑단에 1단 기사로 처리했다.

 관심 있는 산악인 외에 보통 독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겨우 찾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62년 처음 다울라기리 2봉 ‘정찰’(고도 8172m 중 6700m지점까지만 갔다 왔다.)을 한 이후 

15년간 단 한 번도 히말라야 정상에 서지 못했다. 

오히려 71년엔 마나슬루 도전에 나선 김기섭씨가 정상을 400m쯤 앞두고 몰아친 돌풍에 날려 숨졌고


이듬해 동생의 한을 풀겠다며 마나슬루에 간 기섭씨의 형 호섭씨 등 4명까지 눈사태를 만나 숨지는 참변을 겪었다

76년엔 기섭 호섭씨의 큰형 정섭씨가 3차 마나슬루 원정에 나섰으나

예상치 않은 부상으로 하산, 끝내 형제의 한을 풀지 못했다


히말라야 현지에서만 조난당한 게 아니었다. 

국내에서 원정 대비훈련을 하던 산악인들도 잇달아 조난사하는 악운에 시달렸다.

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히말라야등반 대비훈련을 하던 한국산악회 해외파견 훈련대 

이희성대장 등 10명이 한꺼번에 눈사태로 숨졌다.


                                                                          설악산 조난현장..설악에 묻혀버린 산 사나이의 의지
                                   1976. 2. 18 [동아일보] 7면


77년원정에 앞서 76년에는 설악산 공릉능선에서 ‘에베레스트 원정’ 막바지 동계훈련을 하던 

최수남 대장 등 3명이 또 눈사태로 숨졌다. 

이런 연유로 한국과 한국인에게 히말라야는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는, 

감히 넘보기 어려운 경외의 대상이었다.

 

72년 마나슬루 조난 때 한국산악회 회장은 “우리나라 등반수준으로 히말라야에 도전하기엔 

그 기술이나 훈련 면에서 부족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면서 

“히말라야 도전을 대학입학에 비유한다면 

현재 우리나라 산악인들은 초등학교 과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알프스 등반훈련대의 한 간부는 “외국인들이 고산등반에 사용하는 우수한 최신장비를 산에 가져가고도

사용법을 몰라 쓰지도 못하고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다”며 우리 산악계의 낙후성을 한탄하기도 했다.


세계 정상을 밟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다


한국, 에베레스트에 서다
1977. 9. 17 [동아일보] 1면


그 같은 엄청난 시련과 좌절을 딛고 우뚝 섰기 때문일까. 77에베레스트 원정대는 과감하게 속전속결식 도전에 나섰다. 

8월 중순 5400고지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고 9월 초 8500고지에 최종도전을 위한 제 5캠프(C5)를 세웠다.


9월 9일 체력이 뛰어난 박상렬 부대장과 셰르파로 구성된 제1차 공격조가 정상 정복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정상을 100여m 남겨놓고 심하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목까지 묻혀 완전히 탈진한데다 

산소마저 모두 써버려 하룻밤을 비박하고 10일 새벽 C5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6일 후인 15일 새벽4시. 제2차이자 마지막 공격조인 고상돈대원과 셰르파 펨바 노르부가 C5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두 사람은 5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오전 9시 반 정상까지 수직거리 110m를 남겨놓은 남봉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칼날능선이라는 장애물이었다. 


훗날 고대원은 “약 50m 길이의 이 칼날능선은 너무나 뾰족하여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아찔했다”며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고 술회했다.


참으로 “심장이 터지고 어깨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희망이라면 거기서 보이는 에베레스트 8848m 정상의 하늘이 의외로 맑게 개어있다는 점,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낸다면 분명히 거기 오를 수 있다는 낙관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작은 언덕 3개를 넘었다. 또 하나의 봉우리가 보였다. 다시 결사적으로 올랐다. 더 오를 곳이 없다. 

두리번거리며 정상을 찾았다… 

낮 12시50분, 벅찬 감정을 누르고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를 외치면서 본부를 불렀다.”



1977년9월15일 낮 12시 50분. 고상돈은 한국인 최초로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우뚝 섰다. 

그는 자신보다 앞서 정상에 오른 중국대가 남겨두었다는 3각 받침대가 보이지 않아 

처음엔 에베레스트 아닌 다른 봉우리에 올라온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셰르파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던 중 발 밑에 딱딱한 것이 밟혀 

눈 속을 파보니 3각대가 나와 제대로 정상에 올라왔음을 완벽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정상까지 고이 간직해온 3명의 사진을 꺼내 만년설 밑에 묻었다.

 

76년 설악산 공릉능선에서 숨진 ‘77에베레스트 원정 3차 훈련대’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대원의 사진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에 청춘을 걸었으나 끝내 정상을 밟지 못하고 

설악산 능선에서 스러진 동료 산사나이들을 향한 눈물의 고별 의식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오르고 싶어 했으나 생전에는 오르지 못한 그 정상에서 고상돈은 무려 1시간을 머물렀다. 

국가별로는 세계 8번째, 등산대별로는 14번째, 

그리고 개인으로는 55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그는 그곳에서 자연석 4개를 가져오기도 했다.


 

원정대 18명, 열렬한 환영 속 금의환향


최단기 속공"..한국인의 저력 과시
1977. 10. 7 [경향신문] 7면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등정에 성공한데다 

그것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는 소식에 온 국민은 감격했다. 

“여기는 정상, 더 오를 데가 없다”는 고상돈의 무전 발언은 그해 최고의 인기어록으로 꼽혔다. 


어린이들까지 “더 갈 곳이 없다”는 농담을 입에 달고 살았다.


또 한국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36일간의 최단 등정 기록(종전 영국팀 37일)을 세웠으며

 보통 6개가 아닌 5개 캠프만 설치했고

9월 하순 이전에 동남 루트를 개척해 이루어진 최초의 등반으로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자부심이 높았다.

 

제주도 고상돈대원의 집에는 축하인파와 취재진이 구름처럼 몰렸다. 

평소 심장병을 앓았던 고 대원 어머니는 “1차 공격조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밤 방안에 촛불을 켜놓고 

아들의 성공을 빌었다”면서 “결국 정상을 밟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병이 다 나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설악산 훈련 때 숨진 대원의 유족들은 “비닐 커버로 곱게 싼 사진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놓았으니

정상을 밟은 것과 마찬가지로 생전의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진정한 산사나이


산악인 고상돈, 77년 에베레스트를 정복
1979. 12. 24 [동아일보] 8면


고상돈은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해 79년 5월.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해발 6194m)를 정복하고 하산하던 고상돈은 

영하40도의 강추위 속에서 자일사고로 조난, 숨졌다. 그가 죽은 후 딸이 태어났다.

 

고상돈은 매킨리로 떠나기 전 한 인터뷰에서 고산을 오르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의 심정이다.

“빙벽에 매달려 강풍을 맞으면서 한 발짝을 올려놓을수록 피로감은 반비례로 엄습해왔고 의식은 점점 몽롱했다. 

그 순간에 그대로 묻히고 싶은 충동이 뇌리를 마구 할퀴었다. 

그러나 나는 가야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몸을 전율시켰다. 정상이 바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한국인 최초로 세계의 지붕을 밟았던 산사나이는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 이후 히말라야 8000고지 14좌를 완등한 한국인이 남녀 4명이나 나오고 ‘무산소 등정’, ‘알파인 방식등반’ 등 새 기록을 세우려는 산악인이 줄을 잇지만 고상돈이 진정한 한국산악계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의 말에 그대로 녹아 있다. “나는 가야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정상이 거기 있기 때문에 …” 그의 묘는 한라산 1100도로에 있고 지인들은 그 도로를 ‘고상돈 로’로 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