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존덕정(昌德宮 尊德亭) 일원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후원의 애련지를 지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존덕지(尊德池) 주변에 4개의 정자와 2개의 연못만 남아있다.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로 보인다.
창덕궁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란지라고 부른다.
존덕정 일원의 정자는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覽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를 세웠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창덕궁 존덕정(昌德宮 尊德亭)은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이다.
조선시대 인조(仁祖) 재위 22년인 1644년에 만들어졌으며 당시에는 육면정이라고 불렀다.
정자의 마루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어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정은 우물정자로 구성되고 보개 천정과 같이 화려한 장식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황룡과 청룡의 쌍룡이 장식되어 있다.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이 그림은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한다.
이 건물과 이어진 다리 남쪽에 시간을 재는 일영대(日影臺)가 있었다고 한다.
존덕정은 본 건물을 짓고 그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따로 만들어 지붕이 두 개다.
바깥 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하나를 세울 자리에 가는 기둥 세 개를 세워 이채롭다.
존덕정의 은행나무는 궁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줄기 둘레 약 세 아름에 높이 23m, 나이는 약 250년 쯤 됐다.
존덕정에는 정조의 편액이 걸려 있을 만큼 임금이 자주 들른 곳으로
학문을 숭상한 정조가 제자를 가르치던 공자의 행단(杏壇)을 대표하는 이 은행나무를 일부러 심었다고 추정된다.
http://www.heritagechannel.tv/hp/hpContents/photo/storyView.do?contentsSeq=3858&categoryType=4
선향재(善香齋)
연경당에 장성한 아들이 살고 있다면
그 아이를 위하여 교육에 소용되는 여러 가지들을 구비하려고 어른들은 노력한다.
서당의 구비도 그 중의 한 요소가 된다.
수천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유능한 스승을 모셔다 열심히 가르치면 영재교육에 손상이 없을 것이다.
선향재는 독서와 서고를 겸한 건물이다.
특히 이 집은 서향하여 여름철이면 석양의 뙤약볕이 따가우므로,
건물 바깥으로 사랑(斜廊)을 설비하여 차양하도록 했는데,
유지(油紙) 바른 차양막을 고패에 걸린 끈으로 잡아당겨 개폐하도록 마련하였다.
또 사랑지붕엔 청동판을 인갑처럼 박아서 비바람에 견디게 하였다.
연경당은 순조 28년(1828년) 조선시대 5대 궁궐의 하나인 창덕궁 후원에 사대부가의 풍모로 지어진 120칸 궁중 건물이다.
연경당은 순조를 대신해 섭정의 자리에 있던 조대비가 왕세자의 명에 의해 건립하게 한 만큼,
당시 최고의 경지에 있던 도목수(都木手)와 동산바치(원예사)가 건축을 하고 뜰을 조성했다.
연경당이 완성되자 조대비는 연경당의 아름다움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건축을 담당한 도편수와 목수들에게 상을 내렸다.
19세기 후반에는 왕궁 건물을 민가 양식으로 짓는 게 유행이었다.
그 좋은 사례가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이다. 낙선재는 연경당과 마찬가지로 단청을 하지 않았지만
민가에서는 쓰지 못하는 장대석과 괴석 그리고 사고석 담장 같은 건축법으로 지었다.
연경당은 창덕궁 후원 골짜기의 안쪽에 넓은 터에 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면서 대문간 행랑채, 중문간 행랑채를 차례로 세우고,
그 안쪽에 사랑채인 연경당과 안채를 연속된 하나의 몸채로 세웠다.
다음 사랑채의 동쪽에 독서당인 선향재(善香齋)와 정자인 농수정(濃繡亭)을 짓고,
안채의 서쪽에는 아래채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동서로는 중문간 행랑채와 ㄱ자형으로 연이어 있다.
안채 뒤 북쪽 담에 문을 내어 부엌을 만들어 음식을 장만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는 허드렛일 공간인 반빗간(飯婢間)이 자리 잡고 있다.
연경당 건물 뒤편 숲으로 이어진 능선을 넘어가면 창덕궁 후원의 백미인 옥류천(玉流泉)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바깥행랑 마당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는 괴석을 심은 석함(石函)이 놓여 있다.
괴석은 일부러 돌을 기이하게 만들거나 구멍이 숭숭 뚫어지거나 바짝 마른 진기한 자연석을 말하는데,
이것을 조경의 한 요소로 삼은 것은 중국의 궁중 원림 조경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괴석은 모두 중국에서 가져온 일종의 사치 풍류로,
연경당·사랑채·안마당·샛담 아래 여럿 놓인 것 말고도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후원과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후원
그리고 덕수궁·창경궁 등의 후원과 정자 주변에 두루 놓여 있다.
괴석을 심은 석분 사면에는 꽃문양 장식을 하고 그 윗면 네 귀퉁이에 개구리 한 마리씩 돋을새김을 해놓았다.
이 중 세 마리는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한 마리는 밖으로 기어 나오게 하여
정적 공간을 동적 공간으로 생동감 있게 만든다.
동쪽 석함은 대석 위에 괴석을 얹어놓은 것으로 그 전체적인 모습이 현대의 추상 조각을 보는 듯하다.
그 옆의 8각 석주는 측우기의 밑면을 올려놓고 고정하는 대석이다.
이들 석물들이 있는 곳에도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겨울 오후 석물 그림자가 연경당 바깥행랑채의 나무 판장벽에 드리워져
처마의 그림자와 쓸쓸한 풍경을 자아낸다.
연경당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종2품 이상의 관료가 초헌(軺軒)이라 부르는 외바퀴 수레나 사인교(四人轎)를 탄 채
대문을 드나들기 위해 지붕을 주변의 행랑채보다
한층 높일 수밖에 없었고, 문지방 중앙에 홈을 파서 외바퀴가 지나가도록 했다.
이런 이유로 솟을대문은 지체 높은 양반집의 상징이었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있는 바깥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로 둘러싸인 행랑 마당은 장방형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조선시대는 남녀와 반상(班常)의 구분이 철저한 유교 신분 사회였다.
따라서 남자들은 솟을대문인 장양문(長陽門)을 통해 사랑채인 연경당으로 드나들었고,
여자들은 평대문인 수인문(脩仁門)으로 출입하였다.
연경당 장락문 앞 괴석
괴석의 고졸함이 군자의 아취에 어울려 궁가 왕족 및 사가의 선비들이 좋아하였는데 연경당 괴석은 석분에 사방으로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를 조각하고 월궁(月宮)을 상징하여 더욱 특별한 의미를 두었다. 중국 전설에 의하면 불사약을 가진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살던 월궁의 이름을 장락(長樂)이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연경당 - 민가의 양식을 빌려온 궁가 (한국의 미 산책, 2007. 11. 30.,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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