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서울시티투어 창덕궁후원 2

tkaudeotk 2018. 2. 5. 21:48




창덕궁 부용정


창덕궁 후원에 조성된 인공 연못과 열 십(十)자 모양의 정자. 
조선시대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어 축하해 주던 장소로 정조가 신하들과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인 부용지는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네모 반듯한 연못으로, 연못 중앙에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하나 떠 있다.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튀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연못 남쪽에 위에서 봤을 때 열 십()자 모양을 이루는 정자가 있는데, 초석 2개가 연못에 들어가 있다. 
이 정자는 원래 숙종 33년(1707)에 ‘택수재()’를 지었다가 
정조 16년(1792)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부용정()’이라 불렀다.

연못 안에 팔각 석주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을 지었다. 
연못을 향한 쪽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반대편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정자 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다. 
연못 쪽으로 난 창에는 완자살창을, 너머지에는 띠살창을 달았다. 
창을 들쇠에 매달면 정자는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2012년 3월 2일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부용정 [Changdeokgung Buyongjeong, 昌德宮 芙蓉亭] (두산백과)



宙合樓

주합루는 1776년(정조 1)에 지어 1층을 규장각, 2층을 주합루라 칭하고 어필로 편액을 달았다. 

정조가 지은 규장각지 서문을 보면 

이 제도는 송나라의 용도각(龍圖閣), 천장각(天障閣)에서 어서를 보관했던 제도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원래 규장각은 숙종이 종친의 업무를 관장하는 

종부시(宗簿寺)에 세운 것으로 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의 이름을 계승하여 기능을 크게 확대시켰다. 

즉 학문을 연구하면서 임금을 보필하는 국왕 직속의 근시기구로 개편하였다. 

주합루에서는 세칭 사검서(四檢書)로 불렸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이 근무하였다. 

주합루에는 정조의 어제, 어필, 어진, 보책, 인장 등을 보관했는데, 

정조 12년에는 경쇠와 쇠북을 봉안하였고, 18년에는 사서삼경을 보관했다. 

또 순조 7년에는 단종의 역사를 적은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순조 12년에는 세자 익종의 이름을 정하여 봉안했으며, 

순조 14년에는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와 

사도세자의 문집 『경모궁예제(景慕宮睿製)』를 봉안했다. 


순조 27년에는 순조의 어제를, 순조 30년에는 순조의 어진을 봉안했다. 

철종 12년에는 철종의 어진을 봉안했다. 

이렇듯 역대 임금의 어제, 어필, 어진을 보관했던 주합루는 

통감부가 설치된 순조대 이후 일본 관인들의 접대소로 변모되었다. 

순종은 1908년 7월 12일 주합루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접견했으며, 

같은 달 20일에는 부통감이 데려 온 일본 화가를 접대했다고 한다.

주합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계 중층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5단의 화계 위에 있다. 

1층 규장각의 실내는 가운데 칸을 마루로 하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한 칸씩 두었다. 

아궁이는 건물의 후면에 있다. 2층 주합루는 모두 마루방이다. 

가구는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고 고주와 평주 사이에는 툇보를 건 평범한 7량가 구조이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기둥 위로 창방만을 짜 돌렸고, 기둥 사이 창방 위로는 화반을 얹었다. 

마루 둘레는 계자각 난간을 설치했고 방 안에만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주합루 주변은 화계(花階)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화계 첫 단에는 어수문(魚水門)을 두고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주

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임금을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져 있다. 

어수문으로 임금이, 그 옆 작은 문(협문)으로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魚水門


너비 1칸으로 2개의 사각기둥 위에 화려하게 조각되고 단청된 가구(架構)를 올려 지은 

겹처마 우진각지붕건물로 주합루(宙合樓)의 정문이다. 

이 문 양옆에는 문 위를 무지개꼴로 만들고 

특이한 형태의 곡선형 지붕을 얹은 작은 문이 하나씩 세워져 있어서, 

어수문과 함께 3문형식을 이루고 있다.

어수문은 주합루로 오르는 여러 단의 기단 중 맨 아래 기단 앞에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는 6단으로 된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연못을 사이에 두고 부용정(芙蓉亭)과 마주보고 있다. 「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문의 좌우에는 덩굴식물울타리인 취병(翠屛)이 길게 둘러쳐져 있어서, 

주합루 일곽과 부용지 일곽을 공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부근의 운치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였을 것이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어수문의 구조를 보면 

장대석 기단 위에 돌출된 심방석(心枋石: 대문의 기둥 밑에 가로지른 부재)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심방목을 얹은 다음 기둥을 끼워 세우고, 

기둥 안쪽에 문설주를 세우고 문인방을 걸쳐서 문꼴을 만들었다.

기둥몸에는 용지판(龍枝板)을 대어 보강하고, 기둥 윗몸에 보를 걸친 다음, 

여기에 의지하여 사면에 창방(昌枋)을 둘렀다. 

이를 밑받침으로 하여 안쪽 9포(包), 바깥쪽 7포인 공포(栱包)를 짜올리고, 

그 위에 궁궐 정문이나 남대문 같은 성문에서나 사용되는 우진각지붕을 얹었다.


지붕 용마루 양끝에 취두를 설치한 점, 기둥에 초각한 나무판을 댄 점, 

창방 아래쪽에 마치 궁궐 정전의 천장이나 옥좌의 보개(寶蓋)에서처럼 투각한 장식판, 

즉 낙양(기둥 상부의 측면과 창방의 하부에 돌려붙인 波蓮刻한 장식)을 댄 점, 

건물의 규모가 작음에도 공포를 화려하고 복잡하게 많이 짜올린 점 등이 이 건물의 특색인데, 

주합루의 품격을 정문에서부터 보여 주려는 의도로 이 문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 편, 두 개의 작은 문은 「동궐도」에 그려져 있는 문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연경당(演慶堂)의 위치에는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그려져 있어서 

어수문과의 관계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어수(魚水)라는 이름은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군신의 관계도 친밀해야 한다는 뜻에서 지어붙인 것이다.





부영지 동쪽에 있는 건물로, 광해군 때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숙종 18년(1692)에 재건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원래는 건물 앞쪽에 ‘춘당대()’라는 마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창경궁의 담으로 막혀 있고 ‘춘당지()’라는 연못으로 바뀌었다.

영화당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거나 활을 쏘기도 한 정원이었는데, 정조 때부터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하였다. 

영화당에는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관이 자리하여 시제를 내리고, 

춘당대에서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마지막 시험을 보았다.

조선 시대의 궁궐에 대한 기록인 ‘궁궐지()’에 의하면, 

건물 안에 선조, 효종, 현종, 숙종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이다.


영화당은 특별한 꾸밈이 없는 소박한 건물이면서도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우러져 한국의 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춘향가에서 이도령이 장원급제할 때의 시제가 영화당과 관련된‘춘당춘색고금동()’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영화당 [Changdeokgung Yeonghwadang, 昌德宮 暎花堂] (두산백과)


대온실(식물원)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위치한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해 건축 당시 동양최대의 규모였다.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있다. 

건축 양식은 19세기말 시작된 세계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보고 중 하나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식물원 자체는 창경궁 복원공사에 따라 1983년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에 궁이 복원된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不老門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진 문으로 창덕궁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돌문이다. 

세로판석에 돌쩌귀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나무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전해진다.

궁궐지’에 의하면, 불로문 앞에는 불로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앞에 불로문이 있어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문은 하나의 판석을 ㄷ자 모양으로 깎은 뒤 다듬은 것이다. 

문의 윗부분에 전서체로 불로문이라 새겨져 있다. 

지금의 불로문은 창덕궁 궁궐 배치도인 ‘동궐도()’에 나와 있는 모습과 일치하지만 주변 풍경은 그림과 많이 다르다. 

마치 종이로 오려낸 듯한 단순한 형태이지만 두께가 일정하게 돌을 다듬은 기술이 세밀하다. 

불로문과 잇달려 있는 담장과의 조화로움에서도 전통 조형물의 우수함을 엿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불로문 [Changdeokgung Bullomun Gate, 昌德宮 不老門] (두산백과)



창덕궁 애련지 및 애련정 (,亭)


조선시대 숙종 18년에 세워진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각으로, 

'애련'이란 명칭은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의 시 '애련설'에서 유래하였다.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인 애련지()는 창덕궁 불로문()을 지나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애련지 북쪽에 서 있는 간결한 정자가 애련정()이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입수구가 독특한데,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물길을 따라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애련지의 물가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이다, 

건물을 받치는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사방으로 평난간을 둘렀는데, 낙양창 사이로 사계절이 변하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가 ‘궁궐지()’에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애련지 및 애련정 [Changdeokgung Aeryeonji Pond & Aeryeonjeong, 昌德宮 愛蓮池,愛蓮亭] (두산백과)

군자의 성품을 닮은 경치 

1692년(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 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창덕궁 뽕나무는 창덕궁의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 주위에 위치하며 

나무높이 12.0m,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239.5㎝로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노거수일 뿐만 아니라 

창덕궁 내 뽕나무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수형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예로부터 조선은 농본사회로 ‘농상’이라는 말에서 전하듯 농사와 함께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일은 조선시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궁의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며 일반인들에게 양잠을 권장하였는데, 

조선조 궁에 뽕나무를 심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태종 9년 3월 1일)으로 

창덕궁 건립 후 태종 9년(1409) 중국 주나라 성왕의 공상제도를 본따 

궁원에 뽕나무를 심도록 명한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태종실록」 외에 「성종실록」에도 왕이 승정원에 양잠의 중요성을 말하며 후원에 뽕나무를 식재토록 하고, 

후원에서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는 

양잠의 신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는 “친잠례”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양잠은 예로부터 나라의 귀중한 산업으로 왕실에서는 뽕나무를 매우 중요시 여겼왔다. 

1911년, 창덕궁 후원 주합루 좌측 서향각에서 조선총독부가 양잠소로 만들고 친잠례를 거행하였으며, 

주합루에서도 1925년 6월 17일, 1929년 6월 15일, 1939년 6월 26일 친잠례가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처럼 창덕궁 뽕나무는 친잠례 거행 등 궁궐 역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목으로 

우리가 보호 관리하여야 할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소중한 문화재이다.


궁궐에 있던 나무들은 비록 일제 강점기에 그 원형을 대부분 잃었으나. 

다행히 우리 손으로 복원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많은 나무를 심었다. 

남해안에서 자라는 몇 수종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의 숲을 대표할 수 있는 나무의 대부분을 궁궐에서 만날 수 있다.






창덕궁 관람지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 중 하나이다. 
연못가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합죽선() 모양의 정자인 관람정이 있다. 
한반도처럼 생겼다 하여 반도지()라 불렸다가 관람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1908년 무렵 제작된 동궐도형()에 묘사된 연못은 호리병 모양이었으나 
고종 때 일제가 연못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고쳤다고 한다. 
함경도 지역을 남쪽에, 경상도·전라도 지역을 북쪽에 배치하여 
한반도의 지형을 바꿔놓았다고 알려지면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관람지 [Changdeokgung Gwanramji Pond, 昌德宮觀纜池] (두산백과)







창덕궁 관람정(觀纜亭)


한반도의 모양을 닮았다는 반도지()에 있는 정자이다. 

1820년 경에 제작된 조선시대 궁궐을 묘사한 동궐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자의 모양은 부채꼴 선형()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으로 매우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건물의 일부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며 6개의 원주()를 세우고 

원주마다 주련()을 달았으며 난간을 돌렸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추녀마루 6개가 각각 3개씩 모였으며 

그 사이에 용마루를 설치하는 양식을 취하였다. 

건축적이기보다 공예적인 수법을 많이 구사한 정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관람정 [Changdeokgung Gwanramjeong, 昌德宮觀纜亭]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