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북한교회를 가다㉜ 통일교(하)

tkaudeotk 2016. 9. 18. 08:42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72회)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 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측의 ‘평양장대현교회’ 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룰 것이며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필자 주

 

전환기를 보내고 새롭게 도약하는 통일교의 대북사업
     
통일교(가정연합)는 종교이자 기업이고 기업이면서 종교이다. 

때로는 이 두 가지가 종교적 사상과 이념아래 혼합적인 양상을 보이면서 인류사회를 상대로 매우 특이하고 확실한 목표를 추구하는 그룹이다. 

통일교에서 세운 ‘국제승공(勝共)연합’이라는 기구는 남북관계가 극단으로 치닫던 1968년 문선명 총재에 의해 창설됐는데 

이는 당시 ‘반공(反共)’을 국시로 삼고 북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박정희 정권 측에서 매우 환영할만한 일로 여겨 양측이 밀착관계를 형성해 왔으며 

통일교는 이를 활용해 반공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국내외에서 포교 활동을 해왔다. 

때론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로부터 이단 사이비종파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반공’이라는 큰 틀 안에서는 서로 하나가 되는 웃지 못 할 ‘적과의 동침’시절도 있었다.
     
당시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거나 박멸한다’는 뜻으로 ‘반공’또는 ‘멸공(滅共)’이란 단어를 널리 사용하고 있을 때였는데, 

통일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산주의를 대상으로 이기자’는 뜻의 ‘승공’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관련해 통일교 측에서는 “반공과 멸공은 무작정 공산주의를 적대시하는 것이라서 

철학적 배경이 약하나 승공은 공산주의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극복하자는 주장인 만큼 훨씬 더 논리적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던 통일교가 1990년대 들어 갑자기 활동방향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 ‘사랑’, ‘가정행복’등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문 총재가 특별히 공을 들인 지역이 바로 북한이었다. 

그 후 통일교의 대북사업은 이런 보편가치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북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사업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남북관계의 물고를 트거나 가교역할에 더 주력해 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통일이 현실로 이뤄질 경우를 대비해 교두보를 확보하거나 자신들의 기득권 확충에도 중점을 두었고 

동시에 종교적 목적을 실현하려는 취지에서 기업을 통한 대북사업을 벌여왔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필자가 밝혔다. 

이를테면 그동안 대북 통일운동사업과 이윤추구사업을 병행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동안 통일교의 대북 투자 중에 가장 핵심사업은 ‘평화자동차’와 ‘보통강호텔’운영이었는데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12년을 기점으로 통일교측은 이 두 회사를 북측에 모두 양도했다. 

그 동안 10개에 가까운 현지법인을 북에서 운영해온 통일교가 두 기업의 운영권과 지분을 관련 절차를 밟아 북 당국에 모두 넘겼는데 

이는 평소 문선명 총재의 유지였으며 마침 문 총재의 타계(2012.9.3.)를 기점으로 북에 양도했던 것이다. 

이것은 문 총재의 죽음이 양측 관계에 큰 변화를 주었으며 통일교가 새롭게 도약하고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하다.
    
이번 회는 필자가 문 총재 타계 직후에 몇 차례 방북해 간간히 참관했던 통일교 기업들에 관한 참관 이야기들로서 

지난 25년 동안 추진된 통일교의 대북투자 사업진출과 민간교역 사업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다. 

사실상 대북 투자의 선두기업으로 자리매김해 왔던 통일교가 2012년을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이해 2013년부터 새로운 대북사업을 모색하며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구책을 마련하며 새로운 대북사업을 모색하고 있는 통일교는 현재 

평양시내에 ‘이마트(Emart)’와 비슷한 형태의 대형 유통사업을 검토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이런 조직적인 유통업에 투자할 경우 통일교가 북 인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이전 보다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여졌다.

북에 진출했던 통일교 기업들을 찾아가다
      
1991년 문선명 총재와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이후 시작된 양측의 핫라인은 최근까지 작동되고 있으며, 

1994년 미국 카터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주선하며 남북간의 화해정국을 이끌어나갈 때도 문 총재의 역할이 있었다.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 남북정상회담,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과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도 

문 총재 측의 핫라인 역할이 일정부분 작용했는데 이런 밀착관계는 지금까지 유효하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문 총재는 남측의 국가보안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최측근인 박보희 회장을 평양에 조문사절로 보내는 등 

북 최고지도자와의 의리를 보여주며 특별한 협력관계임을 보여줬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후에도 북과 밀착관계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던 문 총재는 2011년 12월 김 위원장이 갑자기 타계하자 

후계자인 문형진 통일교세계회장 일행을 조문사절로 보내 금수산태양궁전 빈소와 김일성광장에 마련된 조문소를 방문토록 해 조문하게 하는 등 의리를 지켜왔다. 

이처럼 남북관계 변화와 상관없이 서로 꾸준한 신뢰관계를 보여주던 양측은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일정 중에는 남포에 있는 평화자동차공장을 직접 참관하도록 해 

역대 남한 정권들과 통일교와의 협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2012년 9월에는 문 총재가 타계하자 이번엔 당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자신 명의의 조화와 조의문을 장성택 부위원장을 통해 평양 조문소로 보냈고 

북 최고인민회의는 문 총재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분명한 것은 북측 최고지도부와 통일교 최고지도부와의 관계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 이상으로 매우 깊고 신뢰도가 높다는 것이다. 

지난 첫 회는 ‘평양세계평화센터’, ‘정주세계평화공원’과 문선명 총재 생가, 그리고 통일교 교회인 ‘평양가정연합교회’등 통일교의 종교부분 사업을 차례로 다루었다. 

지금부터는 그 동안 통일교가 북에서 벌여놓았던 대북 사업들을 현재 존폐여부와 상관없이 차례로 다루고자 한다.
    
원래 문 총재와 김 주석과의 협의서 체결시에 ‘금강산관광개발’, ‘원산항개발’, ‘두만강경제특구개발’에 합의했으나 

그 후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그후 금강산국제그룹을 통해 대북교류에 본격적으로 나선 통일교는 

‘평화자동차’공장신설과 통일교 예배당이 들어선 종교시설물인 ‘세계평화센터’설립, ‘금강산 쾌속선 사업’등을 단계별로 추진해 왔다. 

‘평화자동차’에 딸린 계열사들 중에는 ‘새기술연구소(자동차연구소)’와 ‘평화자동차 전시장’, ‘평화자동차 부품상점’

그리고 ‘평화연료공급소(주유소)’등이 있고 ‘평화항공여행사’를 통해서는 ‘평양골프관광’, ‘아리랑공연관광사업’, 

‘정주세계평화공원’과 ‘문선명 총재 생가 순례관광’등을 연계해 왔다. 

또한 ‘평화토건’을 통한 건설사업, ‘보통강호텔’과 ‘안산관호텔’, ‘안산관 식당’등을 통한 숙박업과 요식업을 연계하고 있었으며 

‘평화무역’을 통해 각종 남북 민간교역을 주도해 왔다.


▲ 남포의 평화자동차공장을 방문해 양정만 지배인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필자.[사진제공 - 최재영]


▲ 1990년 문선명 총재가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만나는 장면(상). 1991년 주석궁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찬을 하는 장면(중). 

1974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만난 장면(하). [사진제공 - 최재영]


▲ 문선명 내외가 2005년 7월 피스컵 개막식에 참석한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상). 

문총재가 1989년 2월 세계일보 창간 리셉션에서 당시 야당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한 장면(하). [사진제공 - 최재영]


노무현 대통령이 통일교가 설립한 남포의 평화자동차 공장을 방문해 양정만 지배인의 설명을 듣고 있다(2007.10.4). [사진제공 - 최재영]


4. ‘보통강호텔’
     
필자는 방북 중 여러 차례 보통강호텔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1층 로비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함께 찍은 대형 사진 두 개가 각각 걸려 있고 호텔 내부는 대부분 고급스런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로비에 성탄절 트리가 설치돼 있는데 서구사회 트리와 마찬가지로 네온사인과 장식품들이 매우 화려하다. 

로비에 있는 ‘은방울 커피점’의 커피는 매우 향긋해 많은 이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커피점 옆에는 평양 고려링크사의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어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사용하려는 투숙객들과 해외고객들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호텔 건물 밖을 나가면 호텔과 세계평화센터 중간에 화단이 조성돼 있는데 이곳에 통신기지국의 대형 접시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1973년 완공됐다는 10층 규모의 보통강호텔은 평양시내 대동강지류인 보통강변에 바로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 ‘보통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특급호텔로 불린다. 

행정구역상으로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동’에 위치해 있으며 객실 수는 총 163실이다. 

1등실(14개), 2등실(56개), 3등실(93개)등 약 1백 70여개의 다양한 객실을 갖추고 있으며 건축면적은 29,805㎡로 알려져 있다. 

보통강호텔을 건축할 당시 김일성 주석이 무려 아홉 차례나 건축 현장에 현지 지도를 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건축했으며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건축자재들을 운반해 건축했다고 한다.
    
그 동안 통일교의 대북투자 사업은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를 통해 대부분 이뤄졌으며 

이 호텔을 북 당국으로부터 최초로 사들인 회사가 바로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1993년 11월부터 통일교가 이 호텔을 인수해 경영을 맡기 시작한 것이다. 

북의 호텔들은 모두 국영인데 반해 이 호텔만큼은 통일교 법인에서 운영한 것이 특색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통일교의 대북 투자액은 당시 현대그룹에 비교하면 아주 미약했다. 

현대그룹이 6억 9천만 불을 투자한 것에 비해 통일교는 7천만 불 수준이었다. 

그러나 통일교는 이 보통강호텔을 운영하며 어느 정도 재정이 뒷받침 되었고 곧이어 평화자동차사도 설립할 수 있었다. 

보통강호텔은 주로 남측 인사와 해외동포들 그리고 외국인 사업가들이 방북시 주로 머물고 있는 호텔로서 지명도가 높으며 

각종 맛있는 산해진미 요리로도 소문이 난 곳이다. 

평화자동차처럼 이 호텔도 북측에 양도 절차를 모두 마치고 운영권과 지분을 북측에 넘겨주어 북 자체적으로 운영 중에 있다.


5. ‘안산관호텔’과 ‘안산관’
     
통일교의 대북사업은 체결이후 오랜 시간 일관성 있게 추진돼 온 것이 그 특징인데 

심지어 남북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문민정부 시절에도 평양시내 보통강호텔 인수와 펜션식의 ‘안산관호텔’운영에 착수할 정도였다. 

필자가 방문한 안산관호텔은 보통강 강물과는 별도로 그 인근 아름다운 호숫가에 조성되어 있었으며 

이 호텔과는 별도로 호숫가에 자리잡은 둥근형태의 ‘안산관’이라는 고급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안산관은 국내외 많은 미식가들이 찾고 있었는데 필자도 이곳에서 단고기(개고기) 코스요리를 비롯해 각종 고급음식들을 자주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동안 통일교측은 보통강호텔-안산관호텔-안산관을 하나로 연계해 운영해 왔던 것이며 

특히 두 호텔의 투숙객들과 안산관을 찾는 고객들을 위해 

일본인 요리사가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온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평양에 있는 외국 대사관들은 이 보통강호텔과 안산관을 연회장소로 선호했고, 

평양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이 두 호텔 객실을 장기 임차해 사무실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안산관호텔의 외형은 호숫가 둘레를 따라 마치 펜션주택이 늘어서 있는 구조로 세워진 호텔이라서 위압감이 없이 편안한 가정집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호텔 객실보다는 야영지의 별장같은 느낌을 주어 고객들에게 명성을 얻고 있다. 

보통강호텔 음식점과 안산관에서는 실내에서 만드는 ‘휘발유조개구이’를 비롯해 각종 다양한 요리들을 제공하고 있어 

필자는 지금까지도 그 맛들을 잊을 수가 없을 정도다. 

또한 안산관호텔 손님들도 보통강호텔 1층에서 운영되고 있는 고려링크를 찾아가 심카드를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어 

필자도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이 호텔의 고려링크를 통해 인터넷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 동안 통일교측은 호텔객실과 식당 등에서 발생하는 수익금과 임대료만으로도 웬만한 투자 경비는 회수했고 

흑자 경영으로 돌아섰으나 대북제재 조치와 남북관계의 경색 등으로 현재는 현상 유지만 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보통강호텔과 마찬가지로 안산관호텔과  안산관은 북 화폐가 아닌 엔화나 유로화, 미화만 받고 있다. 

박상권 회장이 2013년 7월에 필자와 잠시 대화를 나눌 때 했던 말에 의하면 앞으로 

통일교측은 안산관의 좌석수를 늘리고 대규모로 확장해 음식점 사업을 크게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무렵부터 ‘안산관’이 ‘원형식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며 새롭게 영업을 개시한 것으로 보아 통일교의 운영권과 관련이 깊어진 것으로 보였다.


▲ 보통강호텔과 평화센터 중간에 조성된 화단에 설치된 통신기지국 안테나 시설. [사진제공 - 최재영]


▲ 보통강호텔 1층 로비 모습. 성탄절 시즌을 맞이해 크리스마스 트리가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보통강호텔 로비에 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보통강가에서 바라본 ‘보통강호텔’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보통강호텔’건물 입구 앞에 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호숫가를 중심으로 조성된 펜션식 건물인 안산관호텔과 고급식당인 안산관(둥근건물)이 보인다. 

멀리 우측에 ‘보통강호텔’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원형식당’(하)에서 ‘안산단고기집’으로 이름을 변경한 안산관. [사진제공 - 최재영]


6. ‘평화자동차’
     
필자는 평양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평화자동차 남포공장을 참관한 적이 있다. 

방문했던 시기가 2013년도 봄이었기 때문에 이미 통일교가 북측에 운영권과 지분을 모두 넘긴 뒤였다. 

남포항  2㎞ 거리에 있는 ‘청년도로’바로 앞에 위치한 정문 입구에 도착하니 공장 총 책임자인 양정만 지배인이 미리 나와 따듯하게 영접해 주었고 

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공장 내부시설을 모두 둘러볼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양 지배인의 배려로 공장 내부에 있는 그의 집무실을 방문해 사업현황에 대한 브리핑도 청취하며 여러 가지 질의응답도 할 수 있었다.
    
이 공장의 총 부지가 무려 모두 33만 평이나 된다고 해서 필자가 놀랐으며 

부지 주변이 농지와 야산으로 조성돼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필요하면 부지 확장이 더 가능하다고 했다. 

공장 건물은 크게 자동차 종합생산 건물동과 수리와 개조를 담당하는 건물동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공장 시설들은 규모가 방대했고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은 매우 여유 있는 모습으로 각자의 맡겨진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공장을 건설하던 초창기에는 7000평이나 되는 공장 내부 설비 등을 갖추기 위해 통일교에서 710억 원 정도를 투입했으며 

그 결과 연간 1만대의 조립 생산이 가능한 시설을 갖추게 됐다고 한다.
    
행정적으로는 ‘평안남도 남포시 항구동’에 위치해 있으며 건립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33만 평 대지를 지정해 주었다고 한다.  

필자가 공장 부지 전체를 두루 둘러보니 공장 정문과 경비실을 비롯해 자동차 생산라인 과정을 담당하는 ‘제1공장(자동차 조립 건물동)’과 함께 

정비와 수리를 담당하는 ‘수리정비 공장동’외에 ‘변전급수건물’과 ‘연유공급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울타리를 따라 ‘자동차연구실’, ‘제관장’, ‘도서실’, ‘보위대’, ‘식당건물’, ‘운수건물’등이 즐비하게 있었다. 

평화자동차 본사는 남북 양쪽 모두 개설돼 있다고 하는데 남측에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북측에는 ‘평양시 축전동’에 있다고 한다.    
    
원래 ‘평화자동차총회사’는 북 당국으로부터 공장 부지를 제공받은 1997년 2월 27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해 1998년 1월 7일 출범했으며 

2년 만인 2000년 2월 3일 제1단계 착공식을 거행해 2002년 4월 6일, 공장 건설 공사를 모두 마치고 마침내 준공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준공식과 함께 본격적인 자동차 조립생산 가동에 돌입했는데 당시 남북경협 역사상 제조업 분야로는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대로 ‘평화자동차사’가 70% 지분을 갖고 북측의 기계공업전문회사인 ‘조선련봉총회사’가 30% 지분을 갖는 남북 합영회사로 출범했다. 

필자는 남측 통일교와 합작을 했던 북측 파트너 회사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당시 통일교를 담당한 북측 부서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평화위)였으며 

당시 김용순 위원장과 송호경 부위원장이 공장이 세워지고 자동차가 생산되기 까지 많은 역할과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북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서 통일교를 전담하는 부서가 별도로 마련돼 있다고 한다. 

필자는 북측 파트너였던 조선련봉총회사 리정철 총사장이나 량문범 부총사장과 신경림 총부사장 등이 

평소 평화자동차의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했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총사장은 잘 안 나타나고 실제로 북측 회사를 대표하는 인물은 신경림 총부사장이라고 했다. 

그는 고령이지만 엘리트 출신으로서 매우 개방적이면서도 사상이 투철하고 남측 관계자들과의 대인관계도 매우 좋은 인물이라고 했다. 

또한 매우 현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인이라고 평가해 주었다. 
     
평화자동차 내부 시설 공사가 한창이던 2000년도에는 남측 기술자 10여명 정도가 직접 이곳에 상주하며 기술지원을 했으며 

그 동안 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숫자가 초창기에는 350명 정도였고 그 이후 자동차 생산이 한창일 때는 500명 정도가 출근해 일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 공장 기숙사에 거주하거나 혹은 남포나 평양에 살면서 매일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번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행정적인 일을 보는 노동자들 모두가 굉장히 순수하면서도 성실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장 자체적으로 청년돌격대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루 노동 시간은 일괄적으로 모두 8시간이며 임금은 자체적인 인센티브가 있으며 

대부분 자발적으로 일을 하거나 배우려는 모습들이라서 노사간의 문제는 아무런 불상사가 없다고 한다. 

한 가지 독특한 것은 남측에서 주도했던 회사이지만 이곳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북측 인민들이다보니 매주 금요일에 되면 ‘총화시간’을 갖고 있었다. 

남측 보수집단에서는 북 사회 전반에서 시행되고 있는 총화시간을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자아비판’시간이거나 이웃과 동료를 고발하는 ‘몰인정한 상호비판’시간이라고 왜곡하고 있으나 실상은 현실적으로 매우 필요하고 건전한 모임이다. 

이곳 평화자동차 공장의 경우 노동자로서의 자기반성과 발전적인 제안 그리고 공장을 잘 운영하기 위한 아이디어와 노동자들끼리의 화합 등 

모두가 다 잘 살기 위한 목적으로 총화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필자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모임으로 비쳐졌다.  


▲ 평화자동차 준공식 장면. 우측에서 일곱번째부터 좌측방향으로 박상권 사장, 김용순 비서, 박보희 회장 등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평화자동차 준공식장을 가득 메운 북측 직원과 근로자들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화자동차 준공식 단상에는 이미 완성한 제1호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고 악단까지 동원해 행사를 지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필자가 볼 때 비록 이 공장은 남북 합작회사지만 북의 기간산업을 남측의 통일교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미와 상징성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통일교의 대북사업은 통일교와 박경윤 회장이 이끄는 기업이 공동 주주로 참여한 ‘금강산국제그룹’을 통해 벌여왔으나 

평화자동차총회사만큼은 박경윤 회장이 일절 관여하지 않고 통일교만의 고유한 대북사업이었다. 

그래서 이 평화자동차 출범을 계기로 통일교가 단독으로 북에 여러 대북기업들이 진출한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공장 안의 거대한 벽면에 부착된 게시판에는 자동차생산 연혁이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공장 완공 후에는 이탈리아 피아트사 제품인 2500㏄급 대형차 ‘알파로미오’와 소형차 ‘시에나’를 조립해 생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후 평화자동차만의 고유 모델을 생산해 출시한 연혁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준공식을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갑인 2002년 2월 16일에 맞춰 제1호 완성차를 내놓는다는 계획이 마침내 성공해 

준공식 행사 단상에는 제1호 완성차 모델을 올려놓고 행사를 치뤘다고 한다. 

또한 알파로미오와 시에나가 출시되기 전까지는 일본을 비롯한 제3국에서 중고차를 들여와 수리한 다음 

북측 자국민들에게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고 한다. 

자동차 운전석이 우측에 있는 일제차량을 좌측으로 옮기는 등 여러 가지 수리를 마친 후 고객들에게 판매했으며 

일반 차량들을 정비해주는 사업을 병행하며 오늘날의 평화자동차로 성장시켰다고 한다.
    
초창기부터 ‘휘파람’, ‘휘파람2’, ‘뻐꾸기’, ‘뻐꾸기2’, ‘뻐꾸기3’,‘뻐꾸기4WD’, ‘준마’, ‘삼천리’등 8개 차종을 생산 및 판매했는데 

특히 이탈리아 피아트사의 부품을 수입해 제작한 1600cc 승용차 ‘휘파람’은 지금도 평양 시내에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중국 서광자동차 모델을 들여와 생산한 스포츠 유틸리티(SUV) 차량 ‘뻐꾸기’도 많이 생산했는지 평양시내에 많이 운행되고 있었다. 

그 후 북 고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삼천리’미니버스를 비롯해 지금은 트럭까지 생산하고 있었으며 

필자가 방문하기 전 해(2012년)는 평화자동차의 총생산량이 1500대 정도였다고 한다.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은 북측에 지분을 양도한 이후 현재 명예회장으로 남아 있고 

자동차 생산과 판매 등 모든 운영권과 지분을 북측이 넘겨주어 북측 회사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 평화자동차 남포공장을 방문해 정문에서 셀카를 찍고 있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남포공장 내부 현황판에는 2002-2010, 2011-2013까지 생산된 차량 종류를 광고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남포공장 내부 종합 안내판 앞에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남포공장 내부 자동차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남포공장 총지배인과 함께 자동차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남포공장 내부 모습. 밴 차량이 조립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남포공장 북측 근로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술 회의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화자동차 집무실에서 총지배인으로부터 브리핑을 듣는 필자.[사진제공 - 최재영]


7. ‘평화자동차 전시장’
     
필자가 방문할 당시의 평화자동차 전시장은 통일교가 손을 뗀 직후인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었다. 

평양시 광복동 대로변에 자리 잡은 이곳 전시장은 오히려 성황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 해 생산되는 평화자동차 1600대 가량을 판매하기 위한 고객 유치에 힘쓰고 있는 모습이었으며 일하는 봉사원들 모두가 매우 친절했다. 

이곳은 전시장에 비치된 자동차 모델 외에 자동차를 구입하려는 고객들이 미리 타 볼 수 있는 ‘시험운전용 자동차 전시공간’을 비롯해 

부품가게와 커피점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준마’라는 차량을 제외하면 ‘휘파람’, ‘창전’, ‘쌍마’, ‘삼천리’등 각종 승용차와 승합차, 스포츠 유틸리티차량 등 대부분이 수동 5단 변속기 자동차들이었고 

소형화물차 ‘뻐꾸기3’등 여러대의 트럭을 포함해 모두 25개 차종이 전시되어 있었다.
     
최신 신차들이 전시된 이곳은 여러 단체나 기관에서 한번에 10대이상 주문하기도하고 혹은 한 두 대씩 주문하기도 한다. 

때로는 중동이나 러시아에서 해외 근로자로 파견돼 달러를 보유한 본인이나 가족들이 개인적으로 한 대씩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소위 신흥 부유층들도 방문해 원하는 자동차 모델을 서슴없이 구입한다고 한다. 

또한 사업상 북에 장기 체류하거나 상시 방문하는 해외동포 사업가들도 차량을 구입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가장 큰 고객층은 국가기관이나 기업소라고 한다. 

그 다음 고객들은 외국공관인데 현재 북 주재 대사관들과 유럽이나 중국 등 여러 나라의 무역관계 회사들이 실제로 다양한 자동차 구입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로 인해 요즘은 수요와 공급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북 사회는 자동차가 많지 않은 사회이다 보니 

장거리 이동할 때나 수하물을 운반할 경우 마땅한 운송 수단이 없어 소형버스인 ‘삼천리’가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한다. 

이처럼 평화자동차에서 지난 10년간 만든 다양한 종류의 차량들이 현재 북 전역에 운행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현재 자동차가 2만대 운행된다고 할 경우 다섯 대 중에 한 대는 평화자동차가 만든 차량’이라고 한다. 

차량 가격은 미화로 대략 10,000-15,000달러였으며 이는 남측 차량가격의 60-70%정도에 불과한 가격이다.
    
평화자동차 상업광고도 부쩍 늘었는데 공장이 있는 남포시 지역은 물론 아스팔트로 만든 국도와 대로변 

그리고 평양시내 대로변 등에 평화자동차 광고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특히 옥외 광고판들도 자주 보였는데 광고모델로는 유도영웅 계순희 선수와 

‘휘파람’을 부른 인기가수 전혜영이 자동차 이름 ‘휘파람’때문에 전속모델로 출연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자동차 판매 수익금을 보면 2008년에는 가동 6년 만에 50만 달러의 수익금을 냈고, 2010년에는 5.24대북조치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63만 달러,

 2011년은 79만 달러, 2012년에는 8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점차적으로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초창기 평화자동차 전시장이 들어설 건물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현재 평양시내에 자리잡은 현재의 평화자동차 전시장 외부(상)와 내부(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시내에 주차된 평화자동차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8. ‘평화자동차 부품상점’
     
평화자동차 부품점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 2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 200평 규모 공간에 각종 자동차 부품들과 액세서리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지난 2007년 4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다는 이 부품점은 자동차를 꾸미려는 서방세계 매니아들처럼 이곳 평양의 운전자들도 자주 찾아와 구입해 

자신의 차량을 개성있게 꾸미기도 한다. 

특히 부품이 필요한 운전자들은 이곳을 직접 찾아와 부품을 구입한 후 자기 손으로 직접 정비나 수리를 한다고 했다. 

평양은 남측이나 서방세계처럼 화려한 액세사리를 꾸미고 다니거나 요란스러운 자동차 매니아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웬만한 액세사리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으로 보아 북에도 새로운 자동차 문화가 유입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안타까운 소식 하나는 이곳 ‘평화자동차(平和自動車)’의 부품상점 말고도 평양시내에 북과 중국이 합작한 이른바 

‘평양자동차(平壤自動車)’라는 이름의 전시장과 부품상점이 영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자가 확인해보니 ‘평양자동차’가 태동된 배경이 따로 있었다. 통일교 관게자는 평화자동차그룹이 북에서 자동차 사업을 접은 이유에 대해 

“애초부터 우리는 북측에 양도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북측이 자립할 때가 되고 이윤추가가 극대화될 무렵이 되면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자연스럽게 양도할 계획이었다”라며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만 자동차 사업을 접은 가장 큰 이유는 통일교 측에서 볼 때 수익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문 총재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 동안의 수익성을 평가한 결과 크게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2009년부터 중국의 자동차회사가 북에 진출하면서 평화자동차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은 이유도 있다. 

중국이 북에서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면서 북 당국자들도 평화자동차 남포공장을 중국측 회사와 합병을 하든지 

아니면 아주 넘기려는 계획을 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통일교는 그동안 현상 유지만 했을 뿐 평화자동차의 발전과 사세 확장을 위해 더 큰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 당국이 이런 모습을 눈여겨 보며 사업 평가를 해왔고 결국 통일교측에 사업 포기를 권유했던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현재 북은 중국 단동의 ‘중조변경무역유한공사’와 함께 평양에 자동차 조립공장을 설립했고 

2011년부터 ‘평양자동차’라는 상표로 버스와 화물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에 평양자동차는 2013년 3월에 평양시내에 대형 전시장을 갖춘 자동차 부품상점도 만들었고 

남포가 아닌 평양에 종합자동차 조립생산 단지도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9. ‘평화연료공급소(연유공급소)’
      
평화자동차는 대북기업 최초로 평양시내와 남포에 주유소 사업을 시작했는데 평양시내는 ‘평천구역’, ‘광복구역’, ‘서성구역’등 

3개 구역과 ‘남포시’를 포함해 모두 4곳에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북에서는 주유소를 ‘연료공급소’나 ‘연유공급소’라고 부르며 주차장을 ‘차마당’이라고 부르는데 

필자가 방문한 곳은 보통강변 인근에 있는 평화자동차가 운영하던 연유공급소였다. 

매우 친절한 여성 1명과 남성 1명이 유니폼을 입고 주유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북에서는 주유용 기름이 값비싼 원료라서 

직원들이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주유원들을 채용할 때는 매우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 위주로 엄선한다고 했다.
    
연유공급소는 정부가 직영하지만 자동차 소유층들이 증가하면서 돈이 벌리는 사업이 되다보니 

최근 신흥 부자들도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고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요즘은 평화자동차들이 평양거리를 부쩍 누비고 다니기 때문에 도로 정체현상이 생기는 지역이 있는가하면 주차공간 문제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또한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로는 김일성광장과 평양역을 잇는 큰 대로 곳곳에는 CC카메라가 많이 설치돼 있었고 

평양역 광장에는 주차비를 징수하는 여성들이 상시 근무하며 운전자들로부터 주차비를 징수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운전자들이 주유를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주유소를 방문해야 하는데 

북에서는 남측이나 해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주유문화가 있었다. 

우선 ‘기름딱지’를 받는 주유소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 딱지는 일종의 ‘주유 쿠폰’과 같았다. 

이 딱지를 주유소에서 구입해 소지하고 다니다가 본인이 주유할 때 현금대신 주유원에게 건네주면 된다. 

주로 유로화나 미화로 판매되고 있었는데 1장에 10유로짜리도 있고 장거리 운전자들을 위해 300유로짜리도 판매한다. 

또한 장거리 운전자들은 비상 상황을 대비해 석유통에 따로 담아서 차량에 실고 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시골이나 지방에는 주유소가 많지 않아 연료가 떨어지면 바로 채워 넣기 위해서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대북사업을 계획하던 남측 정유회사들이 북에서 주유소 사업을 계획하던 중 

갑자기 5䞔대북 제재조치가 발표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발 빠른 중국기업들이 북에 주유소를 설립하기 위해 평양에 진출했다고 한다. 

주유소 사업에 진출하는 중국기업은 민간기업 2개사와 국영기업 2개사였는데 

북중 합작회사인 ‘중투신융국제투자관리유한공사’(이하 중투신융)와 MOU를 체결했다고 한다. 

중투신융은 2003년에 설립한 국제투자 전문회사로 북중 교류, 해외투자, 금융, 지하자원 개발 등을 하는 기업이라고 한다. 

과거 북 당국은 인도와 이집트 등에서 원유를 수입해 왔으며 최근에는 중국이 해마다 원유 50만톤을 북에 수출하고 있으며, 

무상 또는 장기 차관 형식으로 50만 톤 정도를 원조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알아보니 평양시내는 평화자동차 주유소외에도 일반 주유소가 30여 개 더 있는데 

이 중국 기업 4개사는 1차로 평양에 주유소 14개를 더 세우고 2차로 전국에 220개를 더 세울 계획이며 

북측과 중국측 기업 4개사가 50%씩 이윤을 나누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석유는 중국산보다 러시아산을 공급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의 대북 수출량 가운데는 석유가 55%를 차지하기 때문이며 

러시아산 석유가 중국산보다 저렴하고 질이 좋아 북측 인민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 밀리지 않으려는 러시아 회사들도 북에 주유소 체인망을 설립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북에는 외화만 있으면 누구든지 자동차 외에도 

개인소유의 ‘오토바이’나 ‘써비차(영업용 차량)’에 언제든지 연료를 넣을 수 있다고 하며 거래되고 있는 휘발유 가격은 

대략 1kg(1.4리터)에 중국돈으로 9위안 정도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연유공급소 외에도 시중에서 주민들끼리 서로 거래하는 기름은 대부분 러시아산이며 당국에서도 묵인하고 있다고 한다. 

평화연료공급소를 비롯해 모든 연유공급소에서는 주로 휘발유(연유)와 디젤유를 판매하고 있다.
     
요즘은 평양시내에 택시들도 무척 늘어났고 승용차도 많아졌는데 

특히 평양 시민들이 유선전화나 휴대전화로 幺번’을 눌러서 택시를 부르고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주유소가 드문 북에서는 운전 도중에 연료가 떨어지면 교통보안원이 해결한다고 한다. 

교통보안원은 경찰청에 해당하는 인민보안부 소속인데 

이들은 교통 위반으로 적발된 차량으로부터 벌금 대신에 일정량의 자동차 연료를 빼내기 때문에 항상 석유를 보유하고 있어 

비상시에 공급이 가능한 것이란다. 

아무튼 내가 우려가 되는 것은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북에 진출해 주유소 사업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에 

통일 이후에는 우리들의 미래 시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을 해보았다.


▲ 평화자동차 부속품 상점 건물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화자동차 부속품 상점 내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화자동차가 직영하는 연유공급소(주유소)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평화자동차가 직영하는 연유공급소(주유소) 내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화자동차가 직영하는 연유공급소(주유소)에서 여성봉사원이 주유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10. ‘평화무역’


2005년 5월 설립된 ‘평화무역’은 평화자동차 회사 계열의 대북 무역회사로서 대표이사는  박상권 회장이다. 

자동차부품, 완성차(CBU) 등 자동차 관련 품목 뿐 아니라 다양한 대북지원물자, 건축자재 등을 취급해 왔다. 

특히 그동안 다양한 북한산 제품 등을 국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하기도 하며 거래되는 무역 품목들을 운반하고 수송하는 업무를 담당해 왔다. 

대북 사업이다보니 주로 중국 단동에 설립한 지사가 가장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해왔으며 

북측 신의주를 통해 평양까지 각종 물류사업을 전개해 왔다. 

평화무역 지사들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동지사는 ‘단동평화무역유한공사’라는 법인으로 등록돼 있으며 

현재는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지 않다.


11. ‘평화토건’

‘평화토건’은 평화자동차회사의 계열사로서 2000년 1월에 설립된 건설회사이다. 

대북 사업을 위한 건설 전문기업으로 발족한 이 회사는 2000년 2월에 시작된 평화자동차 남포공장 건설을 필두로 

2008년에는 평양시내 중심가 보통강호텔 앞 부지에 세계평화센터 빌딩을 10년간에 걸쳐 건설하기도 했다. 

평화토건에 의해 평화센터 내부 3층에 통일교 예배당이 세워져 있으며 남측 법인회사가 북측에서 공사를 한 것은 최초이며 

완공 후에도 건물 운영권을 소유하는 것도 남북 역사상 최초로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그동안 왕성하게 대북 건설사업을 추진해 온 평화토건은 현재 그 활동이 소강상태에 있다.


12. ‘평화항공여행사’
    
평화항공여행사는 2003년 4월 11일에 설립한 대북 전문 관광회사로서 

평화자동차 대표를 역임한 박상권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평화자동차 계열사였다. 

이미 일본의 계열회사를 통해 1993년부터 평양, 백두산, 금강산 관광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2003년도에 국내 최초로 평양관광과 백두산 관광을 시작했다. 

2004년도에는 여행사 주관으로 중국 심양에서 ‘세계여자프로권투대회’를 개최하면서 스포츠 이벤트 분야를 새롭게 시작했다. 

그 후 2005년 3월에는 ‘심양세계여자프로권투대회’, 6월에는 ‘평양세계여자프로권투대회’를 열었고 

8월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골프장에서 2005년 ‘평화자동차배 KLPGA 평양오픈 골프대회’를 개최하는 등 

남북의 스포츠 외교까지 그 영역을 확대했다.
      
평화항공여행사의 운영은 통일교가 대북교류사업 차원에서 전개한 관광사업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북 포교활동 차원에서 오랜 기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추진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해외동포 2천명이 평양을 관광한다는 프로젝트를 세워 남측 통일부를 상대로 ‘남북경제협력사업자’신청을 제출해 승인을 받았는데 

이는 금강산관광총회사와 평양관광사업 계약서를 체결한 평화항공여행사가 아태평화위 명의의 확인서를 발급받아 

통일부에 사업 승인을 신청했던 것이다.
    
관광코스는 평양, 남포 관광, 묘향산, 백두산 관광은 물론 

평북 정주에 있는 문선명 총재의 생가와 인근의 세계평화공원 조성지 등이 포함됐는데 기존의 방북 관광비용보다 저렴한 비용을 책정해 

고객들에게 인기상품으로 각광받았으며 실제로 2003년-2005년 까지 3년간 약 5,000여 명의 관광객이 평화항공여행사를 통해 북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 관광상품을 이용한 고객들 대부분은 통일교신자들 위주였는데 

이는 통일교 신자들이 북 인민들을 직간접으로 접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대북 포교활동이 시작된 것으로는 해석된다. 

또한 통일교의 일반신자들이 문선명 총재의 평북 정주 생가와 그 인근에 조성중인 ‘정주세계평화공원’을 방문하는 일정은 

통일교 창시자이자 교주로서의 문 총재에 대한 평신도 교육과 홍보 측면에 큰 기여를 해왔다.
      
13. ‘금강산국제그룹’
     
‘금강산국제그룹’은 통일교 박보희와 금강산그룹 박경윤 회장이 공동 주주로 참여해 세운 통일교의 대북 사업 창구이다. 

이 금강산그룹에서 평화자동차총회사 설립을 주도한 것이다.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대적하는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오던 통일교가 

1987년 5월 15일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출범시키며, ‘승공(勝共)운동’에서 ‘남북평화통일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며 

91년 4월에는 소련을 방문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회담을 가져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었고 

연속으로 그해 11-12월에는 북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열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때 대북사업의 초보자였던 통일교가 도움을 받기 위해 두드린 대북 창구는 

당시 유일하게 북과 외부 세계를 연결해주던 박경윤 금강산그룹 회장이었다. 

북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이하 통전부)는 4䞏의거를 계기로 1961년 5월 13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하 조평통)’이라는 산하기관을 만들었는데, 1988년부터 북을 드나든 박경윤 회장이 이 조평통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통일교는 이 박경윤을 통해 조평통의 전금철 부위원장을 접하게 되며 인연이 시작된 것이며 

그러던 중 통전부는 1994년 5월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창구로 기존의 조평통과는 무관하게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평화위)’는 기관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조평통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통일교의 대북사업 파트너도 조평통에서 아태평화위로 변경된 것이며 

금강산그룹은 통일교와 아태평화위를 연계하고 중개하는 그룹이 되어 결국 금강산국제그룹 지분을 통일교와 아태평화위가 각 40%, 

박경윤씨가 20%의 지분 구조를 갖는 회사로 재편성된 것이다. 

과거의 통일교 입장에서는 가장 큰 적(敵)으로 여겼던 공산당 단체(통전부)와 동침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로써 금강산국제그룹 회장 직함은 박경윤씨와 통일교의 박보희씨가 공동으로 맡게 되었다. 

이에 대해 박경윤 회장은 “박보희가 나를 찾아와 금강산그룹의 공동회장직을 달라고 요청해서 수락했다”고 해명하면서 

자신과 금강산국제그룹은 통일교와 별개의 기업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동안 일심동체로 통일교와 합작으로 사업했던 기업이기 때문에 통일교와 무관한 회사라고 보기 힘들다.
     
1991년 12월 6일 문 총재와 김 주석의 회담에서 논의한 경제교류는 크게 금강산 개발과 자동차 사업이다. 

금강산 개발은 금강산국제그룹이 북측 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홍콩의 세계적인 개발조사 전문회사에 용역을 의뢰, 

약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금강산 개발에 대한 계획서와 타당성 조사 보고서를 내놓았으며 

김일성 주석이 타계하기 직전이던 1994년 박경윤 회장과 박보희 회장이 김 주석을 찾아가 비준을 받은 것이다. 

금강산국제그룹은 금강산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오염되지 않은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취지 아래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플랜을 세웠는데 초기 단계에서 연간 50만 명, 

완료 시점에는 연간 3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목표로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금강산 지역을 개발하고 후속 단계에서는 원산 방향의 해안지대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지경을 넓혀가기로 했다
      
1994년 1월 27일자로 김일성 주석의 친필 서명까지 받아낸 ‘금강산 관광개발 타당성 조사’를 통해 

금강산국제그룹은 북 정무원으로부터 50년 동안 금강산 관광개발 예정지 안에 있는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냈다. 

그런데 1998년 느닷없이 현대그룹측이 아태평화위 김용순 위원장으로부터 전격적으로 서명을 받아내 금강산 개발권을 확보했던 것이다. 

북에서는 김 주석이 서명한 사업은 소위 ‘불가침’으로 통하는 것이 관례인데 

금강산국제그룹의 지분을 소유한 주주이기도 한 아태평화위가 현대그룹과 계약을 맺고 금강산 개발권을 넘겨준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강산 개발권을 현대그룹에 넘겨준 이유와 결과에 대해 북 당국은 적절한 해명이 없었고 

박경윤 회장과 통일교 박보희 회장 측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지만 통일교측은 이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자동차 등 다른 대북사업을 위해 금강산 개발권 문제를 덮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이후 통일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보다 더 뜨거운 햇볕정책을 고수하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한학자 총재에게 보낸 풍산개 한 쌍
    
문선명 총재 사후 가정연합(통일교)은 한학자 총재를 중심으로 

12,000쌍 국제합동결혼식 등 여러 가지 대규모 행사들을 거뜬히 치러내는 등 한 총재의 지도 아래 

흔들림 없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듯 보인다. 

게다가 지금까지 각인된 ‘사이비 정치집단’혹은 ‘이단 종교기업’이라는 오명을 벗고자 한국사회와의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생활종교’혹은 ‘국민종교’로의 변모를 모색하고 있으며 

북측과는 문 총재의 죽음으로 인한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새로운 대북사업을 모색중에 있다. 

한 총재는 2015년 5월 국내 최초로 일반 언론 기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자신의 대북관과 대북사업에 대한 생각을 아래와 같이 내비쳤다.


“나는 평생 위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나라를 위한다면 못할 게 없죠. (방북) 시기를 보고 있어요. 

되도록이면 양쪽(남북한 정부) 면을 세워 줘야 하잖아요. 

북한에서는 (우리에게) 지극정성이에요. 

문 총재님과 김일성 주석과의 관계는 굉장히 끈끈했어요. 

김정일, 김정은 위원장이 다 (통일교에 대한 김일성의) 유지를 받들었어요...”


특히 자신은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이미 초청장을 받아놓은 상태라고 언급했으며 

한 총재의 대북관은 아직 통일교 교주로서의 시각에서 북을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2013년 2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박상권 회장을 통해 풍산개 암수 두 마리를 한학자 총재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는데 

이 풍산개들은 통일교 성지이자 본부로 알려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천정궁박물관에서 전달됐다. 

통일교 절기 중에 하나인 ‘천일국 기원절’경축식 오찬 자리에서 한 총재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문 총재의 90세 생일이던 2009년 1월 30일에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90년 된 산삼 전달식이 가평 ‘천주청평수련원’에서 있었다. 

당시 문 총재의 90세 생일잔치 자리에는 1천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했는데 

박상권 회장이 북에서 들고 온 선물 보따리에는 90년, 80년, 60년 된 산삼 세 뿌리와 함께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과 더불어 장미꽃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문 총재의 90회 생일뿐이 아니고 매년 생일 때마다 선물을 보내왔다. 

이처럼 양측의 최고지도자는 대를 이어 서로 끈끈한 우정과 의리를 나누며 밀착관계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그 동안 자주적인 남북통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들이 자국에 유입되거나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는 북이 종교 자체를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이나 미국에서 유입된 종교들을 통해 자칫 인민들이 잘못된 사대주의에 물들거나 

그 동안 지켜왔던 반일반미정신이 쇠퇴해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함이다. 

종교 때문에 통일지향적인 민족정신과 자주정신을 갉아먹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며 

선교를 빌미로 북 영토에 지하교회를 조직해 북 체제를 비판하거나 체제를 전복하려한다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 때문에 

북한은 쉽사리 남한이나 미국 교회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통일교만큼은 예외로 대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통일교(가정연합)는 남과 북 모두에 교두보를 확보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통일교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사회 각 분야를 향해 전면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평화자동차그룹의 박상권 회장이 통일부에 남북 경제협력사업자 승인 취소를 신청(2012년)함으로써 

이제 통일교는 평화자동차와의 인연을 모두 끊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평화자동차에 투자했던 통일그룹은 자동차 사업을 접는 대신, 

유통업이나 다른 사업계획으로 전환하며 기존의 자신들의 대북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계속)



대북건설업체 ‘평화토건’이 평화자동차 남포공장 건설을 위해 기초공사를 하는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이 김양건 회장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2011.2.16.). [사진제공 - 최재영]

 

 2013년 2월, 김정은 위원장이 박상권 회장을 통해 통일교 한학자 총재에게 선물로 보낸 풍산개 암수 두 마리가 

가평 천정궁에서 개최된 통일교 절기행사인 ‘천일국 기원절’경축 오찬장에서 전달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2009년 1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문선명 총재의 90회 생일잔치에 박상권 회장을 통해  

90년산 산삼 선물을 전달하고 있는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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