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북한교회를 가다㉚ 통일교(상)

tkaudeotk 2016. 9. 18. 07:38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70회)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 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측의 ‘평양장대현교회’ 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룰 것이며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필자 주

 

‘통일교’에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간판을 바꾸다
    
필자는 통일교가 북에 진출 후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며 포교와 선교를 하는지 

직접 통일교 관련기관을 참관하며 알아본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우선 대부분의 한국교회와 기성 종교들로부터 줄곧 이단종교로 비판받아온 통일교는 그 공식명칭의 변천사도 굴곡이 많았다. 

통일교가 태동된 이후 지금까지 어떻게 공식명칭을 변경해 왔는지, 

그것을 인지해야 북측에 세워진 통일교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으로 생각되어 우선 명칭 연혁부터 알아보고자 한다. 
     
1954년 문선명 총재에 의해 창설된 통일교는 교단명칭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로 출범해 활동해 왔다. 

그러다가 1996년 7-8월에 들어서 문 총재가 미국 워싱톤 D.C에서 ‘세계평화가정연합’을 창설했는데 

그 이듬해인 1997년 4월 8일 기존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와 ‘세계평화가정연합’을 하나로 통합해 

그 명칭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으로 바꾸고 12년간 공식적으로 사용해 왔다.
     
그 후 2009년 7월 17일부터는 공식적으로 ‘통일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사용되다가 

2013년 1월 7일 문 총재 사후 그의 부인 한학자 총재가 ‘통일교’라는 공식명칭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통합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는 명칭으로 또 다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서 국내외 모든 통일교 산하의 공식교회들과 교단 간판들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ㅇㅇ교회’ 

혹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ㅇㅇ본부’로 교체되어 2016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울러 명칭이 변경될 때마다 북측에 있는 통일교 기관도 동일하게 변경되었다.  
     
이처럼 통일교가 교단 명칭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꾼 이유는 사회적 의미의 건전한 ‘참된 가정’이 아니라 

문선명 총재와 관계성이 있는 가정을 모토로 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통일교의 독특한 합동결혼식도 이 같은 맥락에서 진행한 것이며 

‘통일교’란 옛 이름 대신 현재는 ‘가정교회’라는 간판으로 전부 바꿔 달은 것이다. 

필자의 이번 방북기에는 북 전역에 500개 정도로 흩어져 있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 소속의 공식교회인 

‘가정교회(처소교회)’의 명칭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통일교 산하의 가정연합교회는 그냥 ‘통일교 교회’라고 지칭할 것이다.


▲ 통일교 교회가 입주한 ‘세계평화센터’의 웅장한 모습. 실제로 평화센터는 종교적 목적으로 건축됐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북 영토 내에 설립된 통일교 제1호 교회인 ‘평양가정연합교회’ 예배당 내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김일성 주석과 문선명 총재와의 첫 만남 장면(1991.11.30.-12.7). [사진제공 - 최재영]


▲ 통일교 문선명 총재 내외와 기념 촬영하는 김일성 주석(1991.11.30.-12.7).[사진제공 - 최재영]


북에 진출한 통일교 포교현장을 가다
      
필자가 방북 중에 관료들을 통해 우연하게 들은 이야기들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북측에서는 통일교라는 종교를 진짜 정통 기독교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정통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북측 인민들이나 관리들은 ‘고난의 행군’ 시기와 

그 이후 북이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을 때 통일교 측에서 보건, 복지, 식량 등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었고 

통일교가 여러 가지 대북사업을 통해 북 경제에 큰 기여를 하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통일교를 ‘참된 기독교’, ‘고마운 기독교’, ‘행동으로 실천하는 기독교’로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에는 문선명 총재의 뜻에 따라 통일교가 운영하는 ‘평화자동차’ 회사마저 북측에 양도하는 바람에 통일교에 대해 더욱 호감도를 가지고 있으며 

차후에는 문 총재의 유지에 따라 ‘보통강호텔’마저 북측에 양도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어 그 일이 성사되면 신뢰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통일교가 북에 뿌리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잘 알려진 대로 지금부터 25년 전인 

지난 1991년 11-12월 문선명 총재와 김일성 주석의 첫 만남 이후 적극적으로 기업과 종교부분의 사업들이 꾸준히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 결과 북측 당국도 통일교에 대해서는 국가차원에서의 각종 배려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필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면 마치 북측과 통일교가 공생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지기까지 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통일교가 북에서 운영하는 기업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는 종교기관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통일교가 직영 혹은 간접경영(합작경영) 등의 형식으로 경영하는 기업들이라고 해도 

그 최종 목적이 결국은 종교적 목적 실현을 염두에 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또한  통일교의 대북기업들도 통일교 전체의 근간이 되는 문선명 총재의 ‘원리강론’을 통해 실현되는 지상천국의 건설에 있는 것이다. 

북에서 운영되는 통일교 기업들은 결국 통일교 교세확장과 포교를 위한 지원세력임을 부인할 수 없으며 

궁극적 최종목적은 북 인민들에게 ‘원리강론’ 교리를 가르쳐 신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교 기업들과 종교를 결코 분리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북에서는 이미 통일교 포교의 전초기지가 굳건히 세워져 있는데 그 첫째가 바로 평양에 세워진 통일교 공식교회당인 ‘평양 가정연합교회’이다. 

그뿐 아니라 그 예배당이 입주해 있는 초현대식 빌딩인 ‘평양세계평화센터(이하 평화센터)’가 있고 

또한 평안북도 정주에 ‘문선명 총재 생가 코스’와 ‘세계평화공원’ 등이 있다. 

이 전초기지들은 이미 북 영토 내에서 포교활동을 위한 중추적인 베이스 역할을 왕성하게 감당하고 있는 중이다. 

알려진 대로 평양 한복판에 세워진 평화센터는 그 규모가 엄청나며 

준공식과 더불어 그 건물 3층에 입주한 통일교의 공식교회당이 현판식을 마치고 운영 중에 있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국내외 통일교 신자들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문 총재 생가와 인근에 조성중인 ‘정주세계평화공원’이 조성되고 있는데 

필자는 이 곳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우선 북에서 활동하는 통일교 종교기관들을 다룬 후에 통일교 관련 단체와 기업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가 직접 방문한 곳들은 통일교가 직영하는 대표적인 특급호텔인 ‘보통강호텔’과 1급호텔인 ‘안산관호텔’과 

호텔부설 고급식당인 ‘안산관’ 그리고 남포의 ‘평화자동차공장’, 평양시내의 ‘평화자동차 전시장’과 ‘주유소’ 등이며 

이 기업들이 현재 어떻게 활동하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비록 통일교가 국내외 기성교회들로부터 이단종교로 비판받는 상황이지만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의 측면에서 볼 때 남북의 평화통일 조성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사실이 객관적으로 확인이 될 경우에는 

종교적인 측면을 떠나 통일지향적 관점에서 올바로 평가할 것이다.     



▲ 통일교 소유의 ‘보통강호텔’ 앞에서 바라본 ‘세계평화센터’ 후문 입구. [사진제공 - 최재영]


▲ 5. ‘보통강호텔’ 진입로에서 바라본 ‘세계평화센터’ 건물의 좌측 모습. 멀리 류경호텔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통일교 소유의 안산관 식당이 자리잡은 호수에서 ‘세계평화센터’와 ‘보통강호텔’을 배경으로 기념촬영한 필자. 

사진에 보이는 모든 지역이 통일교 소유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1. 북 포교의 전초기지, ‘평양세계평화센터’
    
통일교라는 조직은 설립자인 문선명 총재 내외가 어떤 목적을 두고 지시를 내리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일을 성사시키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특히 북 체제는 기본적으로 그 특성상 남한교회나 서방세계 교회들이 주도해서 교회를 지으려고 할 경우 그 동안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교가 요구하는 부분들은 북측이 거의 다 수용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돈과 권력과 유능한 인적자원들을 동원한 통일교의 협상 능력은 결국 뜻을 이루는 것을 결과를 통해 흔하게 볼 수 있다. 

통일교는 특급호텔인 보통강호텔을 확보하고, 인근에 고급 펜션 식의 안산관호텔과 안산관 식당 

그리고 아름다운 호수를 기고 있는 엄청난 인근 부지를 확보해 사용 중에 있을 뿐 아니라 

보통강 바로 코앞에 통일교의 전초기지라고 할 수 있는 ‘평양세계평화센터(이하 평화센터)’를 10년에 걸쳐 건설한 것이다.
    
통일교 산하 ‘평화그룹’은 지금부터 10여년 전인 2007년 8월 5일, 행정구역상으로 ‘평양시 평촌구역 안산동’ 9,075평 부지에 

건평 4659㎡(1,409평), 연건평 9062㎡(2,741평), 지하 1층, 지상 5층의 총 6층 규모의 평화센터를 준공했다. 

1층에는 회의장과 연회장 겸용의 다목적 홀을 갖췄고 3층에는 대규모 통일교 예배당이 입주해 있다. 

그 밖에도 강의실과 회의실, 숙박시설을 골고루 갖춘 복합문화 컨벤션센터의 형식을 띤 건물이지만, 

결국 평화센터라는 이름의 통일교 교회당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이날 준공식 행사를 기해 통일교 본부 측에서는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평양 가정연합교회를 봉헌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까지 했다.
     
평화센터가 설립된 구체적인 과정을 보면 통일교 측이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에 최초로 건축을 제안해 계약을 성사시킨 후 

1997년 7월에 착공을 시작해 10년만인 2007년 8월에 완공했다. 

그러나 착공 이후에는 뜻하지 않게 김일성 주석 조문파동 여파와 남북관계의 경색, 조류 인플루엔자 발생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사가 10년간 지연된 것이다. 

나는 “남측의 건축기술로 이런 건물을 짓는 것인데 길게 걸려봐야 1년 내지 2년이면 완공할 텐데 무슨 이유로 10년이나 걸렸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당시 평화센터 박상권 이사장이 준공식 후 식사 자리에서 “세계평화센터는 10년을 맞이한 오늘을 고비로 

본격적인 남북 간의 사회, 문화, 학술 교류시대를 여는 산실이 될 것입니다”라며 언급했듯이 

공사가 진행되는 10년 동안 말 못할 어려움과 고충이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이 평화센터가 완공되기까지는 당시 대북사업에 전력하고 있던 평화자동차그룹의 집념과 의지의 결실이다. 

평화자동차그룹은 평양 인근 남포에서 자동차 조립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평화자동차가 이 평화센터를 발주한 것으로 되어 있어 평화자동차 대표가 평화센터의 이사장을 맡게 된 것이다. 

이 평화센터를 완공하면 자신들이 운영하는 보통강호텔-안산관호텔-안산관등을 하나로 연계해 운영하려던 계획이었고 실제로 현재까지 그렇게 하고 있다.
      
초현대식 국제 컨벤션센터로 건축된 평화센터의 건물 내부는 800석 규모의 대형 연회장을 두개나 갖추고 있으며 

각종 회의실, 강의실, 연회장, 동시통역실, 숙박시설 등을 구비했다. 

남북의 각 기관과 시민단체가 평양에서 문화. 학술, 종교 교류 행사를 개최할 때 누구든지 이용하도록 지원한다는 취지이며 

아울러 통일교 측에서 남북의 가교 역할을 하거나 남북관계를 주도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또한 평화센터 내부의 각종 시설들은 이산가족 상봉시 북측 화상 상봉 장소로도 제공되며 

세계적인 과학자 등을 초빙해 전문 인력도 양성하거나 평양시민들을 위한 외국어 교육이나 컴퓨터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건물 활용 계획 이면에는 통일교 원리강론을 전파하고 포교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필자가 직접 평화센터를 보니 철골과 고급유리로만 지어진 매우 고급스러운 초현대식 건물이라서 

도대체 이 멋진 건물을 어떤 회사에서 건축했는가를 알아보니 바로 통일교 계열 건설회사인 주식회사 ‘평화토건’이었다. 

평화자동차 회사 계열의 대북 건설회사로서 2000년 1월 설립해서 주택, 토목, 플랜트, 공항, 항만 시설 등의 건설을 담당해왔는데 

자신들의 순수 기술과 인력으로 평화센터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는 남측 기술자들이 평양에 가서 직접 건설한 최초의 복합건물이며 동시에 남측 법인이 북측 영토에서 건물을 완공한 후에도

운영권까지 맡게 된 것으로서 남북 교류 역사상 처음 있는 사례로 기록되었다.

10년 전 평화센터 준공식에 참석한 인원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남측 통일교에서 활약 중인 평신도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준공식 일정에 맞춰 2007년 8월 4-7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방북했는데 참석자들의 분포도를 보면 

경상도에서 원동주(세계평화대사협의회 및 세계일보 조사위원) 거제시협의회장이 참석했고, 

전라도에서는 서성종 무안군 평화통일가정당 중앙위원 등이었다. 

이처럼 전국에서 모범적으로 활동하는 통일교 산하 세계일보의 전국 조사위원들과 세계평화대사협의회 회장단, 

통일교에서 창당한 ‘평화통일가정당’ 당원 등 총 100여명 이상이 함께 방북단을 꾸려 참석한 것이다.
    
한편 방북단이 평양에 도착한 4일은 준공식 전날이었는데 이날 밤 보통강호텔 대연회장에서 통일교 주최 환영만찬이 있었고 

북측에서는 리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오전 10시에 열린 준공식은 남측을 포함해 모두 150여명이 참석했으며 

박상권 평화센터 이사장이 환영연설을 했고 북측에서는 전날 만찬에 참석했던 리종혁이 다시 와서 축하 연설을 했다. 

준공식 행사를 마치고 남측 방문단 전원은 오후 시간을 이용해 왕복 다섯 시간 소요되는 문선명 총재의 생가가 있는 평북 정주를 다녀오기도 했다.
     
특히 이날 준공식을 마치고 지하 1층부터 꼭대기 5층까지 건물 전체를 둘러보는 순서를 가졌는데 

남측 대표단이 3층에 올라가보니 3층 전체가 대규모 예배당으로 꾸며져 있고 교회입구에는 ‘평양 가정연합교회’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제단에는 통일교 심볼 마크가 새겨진 설교 강대상이 놓여있는 등 기존 통일교 교회당 내부와 동일했다고 한다. 

북에 상주하는 통일교 관련 신자들만이 알 수 있도록 제1호 통일교 교회당이 이곳에 은밀하게 세워진 것이다. 
    
또한 건물 5층에 올라가보니 고급 주상복합형 펜트하우스를 연상시키는 숙소들과 부속실 등이 호화롭게 구비되어있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 할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건물의 겉모양은 전체적으로 종합문화센터의 성격이지만 알고 보면 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통일교 교회당이었던 것이다. 

특히 북측 당국은 건물명칭이야 무엇이든 사실상 통일교의 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엄청난 건물을 허락하기까지 꽤나 많은 고심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북 최고 지도자의 승인과 통일교의 전방위 로비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돌아보면 1991년에 성사된 문 총재와 김 주석의 절묘한 외나무다리 만남이, ‘세계평화센터’ 준공을 통해 결실을 맺었고 

결국 그 건물 3층에 통일교회당을 세우면서 본격적인 대북 포교는 본격화된 것이다. 일평생 ‘반공(反共)’과 ‘승공(勝共)’으로 일관하며 

통일교를 이끌던 문선명 총재가 1990년부터 갑자기 ‘친공(親共)’과 ‘연공(連共)’으로 급선회하는 걸 보니 

‘극과 극은 통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실감났다.



▲ 남측 평화토건에서 시공한 ‘세계평화센터’ 공사 당시 모습. 10년간 공사해서 완공했다(1997.7-2007.8). [사진제공 - 최재영]


▲ 남측 통일교 신도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세계평화센터’ 준공식 장면(2007.8.5.). [사진제공 - 최재영]



 ‘세계평화센터’ 준공식에서 환영식 연설을 하는 박상권 이사장. [사진제공 - 최재영]


2. 통일교 신자들의 성지, 문선명 총재 생가와 ‘정주세계평화공원’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 이곳은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총재가 태어난 곳이다. 

그 후 행정개편으로 지금은 ‘평안북도 정주시 덕언면 원봉리’로 주소가 바뀌었는데 

북 당국과 통일교 측은 문 총재가 태어난 생가(生家)를 복원해 방문객을 맞이하는 프로젝트를 세워 이미 성지화(聖地化)했으며 생가 주변은 약 30만평 규모로 

‘세계평화공원(이하 평화공원)’을 조성 중이었다. 

고향 마을에 거액을 투자해 평화공원을 조성한 목적은 문 총재를 홍보하고 국내외 신자들과 방문자들에게 교육장소로 활용하고자 하는데 있으며 

이 생가를 거점으로 직접적으로 북 인민들에게 포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문 총재가 1991년 11월 30일~12월 7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단독회담을 갖고 남북교류 합의서에 서명한 후 

통일교는 본격적으로 북에 진출하게 됐는데 당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의 방북은 김달현 부총리의 중간역할로 

김정일 비서의 승인 하에 은밀하게 이뤄졌으며 문 총재의 방북 일정은 모두 김정일 비서의 특별 배려였다고 한다. 

또한 김 주석은 문 총재의 생가를 잘 보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때부터 생가를 복원해 통일교 성지로 만들고 

인근에 세계평화를 상징하는 종합공원을 개발하는 사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회담을 마친 문 총재는 일행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평북 정주를 방문해 

자신이 태어난 생가를 방문했고 생존해 있던 혈육들과 일가친척들을 무려 48년 만에 상봉할 수 있었다. 

당시 만난 혈육은 73세의 친누나, 64세의 친여동생을 비롯해 69세의 형수와 49세의 조카 등이다. 

문 총재 자신이 이산가족이다 보니 이때부터 남북 이산가족 상봉 문제에도 통일교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정주에 평화공원을 조성키로 북측과 합의한 후 귀국한 문 총재는 평화공원 조성 부지 30만 평을 구입하기 위한 재원 마련 명목으로 

국내외 통일교 신자들 1인당 8만원씩의 헌금을 받아 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정주세계평화공원’은 명실상부 국내외 통일교 신자들의 종교적, 사상적 성향이 깃든 곳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으며 

평안북도 정주시는 생가복원과 평화공원 조성이 결정되면서부터 격동을 맞이하게 됐다. 

시 당국 차원에서 생가를 복원하고 관리하는 일과 평화공원 조성 사업에 앞장서면서 관광수입도 생기게 된 것이다. 

마치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이 전 세계 기독교 신자들의 성지순례처가 되는 것처럼 

문 총재의 고향 정주가 종교적 성지가 되는데 있어서 정주시가 앞장서게 된 것이다. 
    
1998년에는 정주에 있는 생가 인근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한다는 발표되면서 통일교의 대북사업은 더 탄력을 받게 됐다. 

이처럼 평화공원 성역화가 공식 선포되면서 통일교 본부 측에서는 여러 명목의 특별헌금 종류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공지했다. 

통일교 측은 이듬해인 1999년 12월 1일, 국내외 통일교 교역자들에게 “새시대 새천년맞이 특별정성”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헌금납부를 강조했는데 

이 공문에 제시된 헌금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총生祝(생축)헌금’은 한 가정당 1만 6천 달러 ‘천주승리 축하헌금’은 1인당 1개월분 수입 혹은 한 가정당 1만 달러, 

‘구국헌금’은 1인당 160만원, ‘정주평화공원 조성기금’은 1인당 8만원, ‘건국기금’은 한 가정당 매월 17만원...” 등이다. 

생각보다 헌금의 종류가 다양했고 그 액수도 컸다

(이 헌금내용들은 2001년 1월 13일 청평수련원에서 거행된 “하나님 왕권 즉위식”에서 문 총재가 했던 말과 기도를 정리한 책에 수록된 내용들이다).
    
한편 평화공원 조성과는 별도로 이미 문 총재의 생가는 김일성-문선명 회담 직후 북측 당국에 의해 즉시 복원되었다. 

문 총재가 방북한 이듬해인 1992년 8월에는 이미 2백 19명의 외국인으로 구성된 순례단이 생가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당시 순례단에 참가한 일본인 ‘도쿠다 요시노리’ 씨가 세계일보에 기고한 방북기에 따르면 

“생가 본채 마루 앞에는 김일성 주석이 당대 최고의 조각가에게 지시해 만든 대리석으로 제작한 헌금함이 놓여 있었는데 

그 높이가 1m가 되는 헌금용 항아리였다”고 기록했다. 

문 총재 방북 이듬해에 이미 정주시 차원에서 생가는 깨끗이 단장돼 있었고 진입도로도 새로 개설되었다. 

최근까지 3차에 걸쳐 생가 주변이 정리됐는데 농경지 정리 작업과 진입로 확장공사를 하는 한편 

생가 앞에는 관광객들과 방문자들을 위한 임시 매점이 운영되고 있다.
   
또한 2003년 4월에는 통일부에 승인을 받은 ‘평화항공여행사’에 의해 평양과 백두산 관광을 비롯해 기타 여러 관광코스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문 총재의 생가도 포함됐다. 

그 후 9월 들어서 분단 이후 최초로 민간인들의 평양관광이 시작되면서 통일교 신자들이 성지순례 차원에서 대규모 참가했는데 

북측 고려항공이 제공한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한 최초 관광단 114명들은 모두 통일교 산하 세계일보 방계조직인 조사국에서 모집한 인원들이며 

그 직책이 조사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해 통일교에 헌신하는 평신도들임이 확인됐다. 

그 후 2005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4박 5일 일정의 평양관광이 진행됐고 2003년 이후, 

약 5,000여 명의 관광객이 항공사를 통해 방북해 문 총재의 생가를 방문했으며 

그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도 해외 신자들은 꾸준히 생가와 평화공원 조성터를 방문했다.
       
이처럼 북에서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통일교의 전략과 정교한 계획은 하나씩 실현되고 있으며 그들의 자금과 재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잠입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문 총재가 그처럼 자신의 생가를 성지화하고 인근지역을 성역화하기 위해 공을 들인 이유는 ‘재림주 메시야’로서 자신이 ‘만왕의 왕’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전략 차원에서 기업과 공장들을 설립했고 이를 발판으로 재원을 마련해 교세를 확장하려던 것이다. 

그 결과 생가는 이미 성역화 작업을 완료했고 그 인근은 ‘세계평화공원’이라는 명칭이 붙어 국내외 통일교 성지순례단이 찾는 코스가 되었다.
      
통일교 간부들은 성지조성을 문 총재가 재림주로서 지상천국을 건설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문 총재는 1965년 세계 순회강연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통일교 성지들을 지정했고 이 장소들의 매입과 개발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세계 도처의 미개발지역에서 막대한 자금력과 지역개발을 명분으로 부동산 매입을 했는데 

이는 순수한 지역개발이 아닌 문 총재가 ‘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는 통일교왕국의 건설을 위한 과정이다. 

그 동안 문 총재에 의해 직접 선택된 성지는 일본에 8개, 미국에 55개, 한국에 15개 그리고 기타 국가에 42개 등 모두 120여 개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 북측 땅 평북 정주에도 1991년 말부터 성지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정주세계평화공원’ 조성 공사에 대한 진척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박상권 평화센터 이사장과 잠시 만나 확인해 보았으나 

사실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나와 박 이사장은 2013년 평양에서 개최된 전승절 기념행사를 마치고 전승기념관 정문 밖 입구에서 잠시 만날 기회가 생겨, 

결과 30만평의 부지가 조성된 것은 맞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공사는 시작하지 않은 상태이며 

공원 부지에 남녀 화장실만 각각 하나씩 세운 상태라고 답변해주었다.


▲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문선명 총재 생가의 가장 최근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2002년 가을 남측 통일교 신자들이 생가를 방문 후 기념촬영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남측 통일교 여신도가 생가 앞에서 당시 성영일 정주시 부시장과 기념촬영한 모습(재정비 이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생가 방문객들을 위해 칸막이로 만든 간이식당 모습(재정비 이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간이식당에서 남측 통일교 신자들에게 커피를 판매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간이식당에서 남측 통일교 신자들에게 미꾸라지를 넣은 단호박찜을 판매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생가 마루 위에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제작된 헌금항아리가 놓여 있다(재정비 이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생가 뜰 안에서 바라본 평화공원 부지 모습(재정비 이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3. 북에 설립된 최초의 통일교 공식교회당, ‘평양 가정연합교회’
     
통일교는 왜 북 영토 안에 자신들의 교회당을 세웠을까? 

위에서 밝혔듯이 통일교의 첫 교회당은 이미 지금부터 10년 전인 2007년 8월에 보통강호텔 앞 평화센터 3층에 세워져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교회가 평양에 세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문 총재가 김 주석과 단독회담을 하는 날 협상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성사됐다. 

평양에 통일교 목사의 파견을 요청한 문 총재의 요구를 김 주석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그 결과 당시 일본인 출신 통일교 목사가 형식적이나마 평양에 체류하며 통일교 선교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통일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에 선교사를 공식적으로 파송한 종교라는 기록을 보유하게 됐으며 

반면 북측도 분단 이후 최초로 해외 선교사를 공식적으로 수용한 첫 사례가 됐다.
     
평화센터는 매주 일요일이 되면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게 이곳에서 자체적으로 통일교식 예배를 드린다. 

몇 년 전까지도 평화자동차 사장을 지낸 박상권 평화자동차 명예사장은 일요일이 되면 평양 봉수교회나 칠골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세운 통일교 가정연합교회에 출석했으며 박 이사장은 기업을 운영하는 경제인이며 경영자 신분이지만 종교에도 관여한다. 

평화센터 건물을 공사하기 전해인 1996년 2월에는 나흘간 북경에서 개최된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통일교 산하 기관인 ‘한국종교인협의회’는 종파와 종교를 초월한 초종교인들의 협의체 모임인데 

박 이사장은 경영인이 아닌 통일교 종교인의 신분으로 종교 활동을 해왔는데 이처럼 통일교 조직은 기업과 종교의 경계선을 구분하기 힘들다.

     
통일교가 평양에 교회당을 세운 시기는 2007년 8월 5일이다. 

이날은 ‘평양 세계평화센터’가 준공식을 치루며 정식 개관하는 날이었는데 이 건물 3층에 교회 간판을 달고 봉헌식을 거행한 것이다. 

통일교 본부는 이날을 기념해 자체 홈페이지에 “지난 (2007년) 8월, 평양에 가정연합교회를 봉헌했다. 

북한은 마지막 가인국(구약성경의 가인을 지칭)으로서 참부모님(문선명 총재 내외)의 세계 노정의 마지막 깃발을 꽂을 곳입니다”라는 공지사항을 알리며 평양에 교회가 세워진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운 사실을 문선명 총재 내외와 통일교 수뇌부가 직접 언급한 사례가 있었다. 

미국 알라스카에서 거행된 일명 “천일국 7년 9월 1일, 천부주의 선포 18돌 기념식”이라는 통일교 행사에서 이 사실이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이 행사는 2007년 9월 1일 오전 5시부터 미국 알래스카 코디악(Kodiak Island)이라는 섬 지역에서 열렸는데 

이날 행사 진행은 양창식 회장이 맡았고 황선조 회장, 임도순 회장, 유정옥 회장, 송광석 회장, 김형태 회장, 

김명대 회장 등 통일교의 주요 지도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통일교 ‘국제지도자회의 및 피스킹 컵 낚시대회’에 참석한 주요 간부들이었는데 당시 참석인원이 120여명이었다. 

이날 행사가 진행되던 저녁 6시경에 황선조 회장의 보고 순서가 있었는데 전날 문 총재의 특별 지시로 마련된 특별보고였다. 

이 자리에서 황 회장은 평양에 설립한 자신들의 교회에 관해 아래와 같이 자세히 언급했다. 보고내용 원본을 그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평양교회 봉헌, 가정당 창당, 200개국 신문명 개벽선포 등이 8월 달의 중요한 섭리였다. 

참부모님(문선명 총재 내외)의 그 승리적 기반이 3대권에 안착이 되고, 그 후 각 단계로 선포되었고, 그 후 신문명이 창설되었고, 

그들이 유엔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다. 

9월 달 평화왕권 출발의 기준이다. 

또한 마지막 가야 할 곳이 평양이었고, 마지막 분야가 정치 분야인데 8월에 이것을 성취한 것이다. 

과거는 미래 역사를 창조하시는 것인데, 북한 땅은 필연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야 하는 땅이었다.
   
참부모님께서 과거 신령운동이 원산과 철산에서 일어나게 되자, 

북한에 가셔서 1946년 6월부터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역사가 준비하셨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흥남, 평양, 남하노정, 부산. 1950년도 12월 4일, 38선을 넘으실 때,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올 것이다. 

내가 못 오면 내 자식이, 아니면 제자가 올 것이다!' 라는 기도를 드린 후에 남으로 오시게 된다. 

남으로 시작된 섭리가 전 세계로 퍼져갔는데 마지막 가야 할 곳이 북한인 것이다.

북한은 가인형 인생관의 마지막 땅이다. 하나님주의로 통일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결국 김일성을 자연굴복 시킨 기준이 되었다. 

하나님주의의 씨를 심고 많은 교류사업을 이루어왔고, 2007년 8월에 우리 교회를 세운 것이다. 

교회는 부모님의 몸이다. 

북한 정부가 공인을 하고 정식 간판을 걸고 평양교회 헌당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님 의자와 존영을 놓고(문선명 총재 내외가 착석하는 왕좌와 사진을 지칭) 부모님 몸된 삶의 결정체, 

즉 부모님 삶의 전승기록인 말씀의 씨를 심고, 경배를 드리고 가정맹세를 하고 첫 평양교회 예배를 드렸다.

평양에서 40일 동안 머무시는 때에(문선명 총재 내외를 지칭) 모란봉에 올라가셔서 지은 성가가 2개가 있는데 성가 2장과 3장이다. 

3장이 바로 그 때 지었던 가사였다. 천일국 국가가 된 그 성가를 그 땅에 가서 부른 것은 감개무량하였다. 

북한에 교회를 지은 것은 놀라운 것이다. 평양교회를 세운 것은 교류가 아니고, 영적인 기반을 가진 하나님 사상의 정복이라고 볼 수 있다. 

땅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말씀의 씨가 16년 동안 성장을 하여 교회로 안착을 하였다. 말씀, 축복, 심정문화가 있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통일교 측은 세계평화센터가 남북의 평화통일을 선도하는데 활용될 건물이라고 선전을 해왔으나 

결국 그 건물 3층에는 은밀하게 통일교 예배당을 세우고 포교전략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평화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결국 그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통일교 교회당이다. 

북측 당국도 타 기독교와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그런지 통일교 교회당 존재여부를 공개적으로 알리기를 꺼려하는 눈치였으며 

북측에서 활동하는 통일교의 가장 핵심 인물인 박상권 이사장 역시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다.


▲ 통일교 교회가 입주한 평화센터를 담장 너머에서 본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준공식 당시 ‘세계평화센터’ 1층 로비에 마련된 사진전. 김일성 주석이 문선명 총재를 반갑게 영접하는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세계평화센터’ 각층 내부 휴게실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세계평화센터’ 3층에 입주한 통일교 ‘평양가정연합교회’의 예배당 내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현재 ‘세계평화센터’ 박상권 이사장이 20년 전 남북 종교인협의회에 참석한 모습. 우측은 당시 장재언 북측 종교인협의회 회장. [사진제공 - 최재영]


통일교 교세확장과 남북통일의 상관관계
     
북 당국은 지금도 남측이나 해외의 기업이나 교회 혹은 선교단체에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북측 영토에 교회당을 짓는 것을 거부한다. 

북측은 교회당 건립 비용으로 차라리 문화센터나 사회복지센터 쪽으로 건축해 줄 것을 요청한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외국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중국영토에서 교회를 건축할 수 없다. 

중국이나 북한에서 건축을 하기 위해 협상할 때는 사전에 계약조항을 통해 건물 용도를 분명히 명시해야한다. 

일반건물이나 사회복지센터로 짓는다고 계약했으면서도 완공 후에는 계약내용과 달리 예배를 드리거나 종교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애초부터 예배를 드리려는 목적이었다면 계약할 때부터 종교 시설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통일교 측은 중국에서의 포교를 위해 일반 건물로 건축 승인을 받은 후에 완공을 마치고 

실제로 종교 활동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고초를 겪은 사례가 있었다. 

편법을 사용한 결과 중국 당국으로부터 거액을 압수당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통일교는 중국에서의 실패를 발판삼아 북에서는 치밀하게 전략을 짠 결과 실제로 교회당이 세워진 것이다.
    
우리가 다시 한 번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통일교의 모든 사회활동과 기업운영 등은 철저하게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겠지만 정치, 경제, 문화, 언론, 학술, 스포츠 등 통일교의 다양한 활동 목적은 단 한 가지, 

바로 문선명 총재가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는 통일교 왕국의 건설에 있다. 

그 동안 한반도에서 통일교 왕국을 건설하려는 문 총재의 꿈은 단 한 차례도 포기된 적이 없다. 

그가 통일교 왕국을 한반도에 건설해야 하는 이유는 통일교의 핵심 교리서인 ‘원리강론’에 잘 기록돼 있다.
   
통일교는 셀 수 없이 수많은 외곽 조직들을 운영해 오고 있는데 이런 다양한 조직 활동에도 불구하고, 

문 총재의 핵심적인 교리가 담긴 원리강론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여러 조직들을 통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통일교 간부들의 대북사업은 아래와 같이 초지일관하며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는 참부모님(문선명 총재 내외를 지칭)의 섭리적 측면에서 본 통일논리 때문에 대북사업을 펼친다. 

공산주의는 역사를 지배와 피지배 계급 간의 갈등으로 보지만 우리는 선과 악의 갈등으로 본다. 

북한을 변증법적 철학에 기초한 유물사관과 주체사관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선한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것이 

역사 속에 구원을 실현하는 한 방법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대북사업을 통한 통일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다뤘던 통일교의 기관들은 대북 포교 차원에서 설립된 종교적인 기관들이며 

문 총재의 원리강론을 충실히 수행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특히 세계평화운동과 남북통일운동, 가정회복운동 등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수십억의 자금을 투자해 건축한 평화센터는 

매 층이 1000평 남짓 되는 매우 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준공 이후로 지금까지 공익을 위해 크게 활용되지 못한 채 

통일교만의 행사 전용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또한 현재 평양에 상주하는 통일교 직원들과 신자들 위주의 모임과 행사 집회를 치르는 건물 용도 위주로만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평양은 물론 북측 지역에 사는 인민들이 처음 접하는 기독교에 대한 첫 인상이 

통일교에 의해 다분히 왜곡될 수 있다는데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북측 관리들과 인민들은 마치 통일교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종교처럼 오인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통일교가 다른 기존 기독교를 거짓 종교라로 매도할 때 북측 주민들은 그 사실을 그대로 믿게 될 수 있다.  

통일교는 25년 전 김일성 주석과 문 총재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자신들의 노선을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리강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아직도 신자들은 “남북 분단은 가인의 세력과 아벨의 세력의 만남이고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과의 만남”으로 굳게 믿고 있으며 아직도 이 교리를 신봉하고 있다.
    
통일교의 막강한 북 진출 사업들은 통일교의 종교적 목적 실현을 염두에 둔 하나의 과정이며, 

교리내용의 변화가 아닌 포교형식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나 해외 한인교회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북에 대한 잘못되고 왜곡된 인식과 

오류투성이의 대북자료와 정보를 바탕으로 선교정책을 세우고 있다. 

고도로 압축된 통일교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대북사역 전략과 비교해 볼 때,

기존 한국교회의 대북사역 전략과 노력은 매우 낭만적이고 고비용 저효율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아직도 허상을 잡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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