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이별뒤에 찾아오는 것들

tkaudeotk 2014. 5. 2. 08:08


1. 슬픔을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슬픔의 시간을 더 오래 지속시킬 뿐이다.


 슬픔의 감정은 일반적으로 몇 달 때로는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나아지지만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추모일이나 추억은 극한 슬픔의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슬픔의 감정이나 그 표현들을 회피하고 그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참는 것은 종종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슬픔을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 

슬픔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최고의 방법은 그들이 느끼는 상실의 고통과 그 감정에 대해 말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곁을 떠난 사람의 사진을 보고 그와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그를 추억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슬픔을 유발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치유가 가능해진다.

정상적으로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중에는 처음 며칠 또는 몇 주간은 일상생활이 어려운 경우도 있는데,

이런상태는 몇 주 정도 지나고 어느 정도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서서히 회복되지만 그렇다고 슬픔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가족이나 친구들은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인내심을 잃고 이런 상황을 당장 끝내야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애도의 치유력과 시간의 힘을 과소평가한 데서 오는 것이며 이 단계가 지나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2. 슬픈 상황을 부정하려 할 때라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기다려 주라.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상실에 대한 슬픔이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그녀의 업적이 종종 잘못 이해되기도 하지만 슬픔의 정상적인 특징을 아는 데 있어서 

그녀의 연구는 매우 유용하다. 

 

슬픔의 초기 단계에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부인 또는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사실일 리 없으며 뭔가 중대한 착오가 있는 것이다. 

그는 죽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며 

그런 필요성이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은 부인하기를 계속한다.
 이런 상황에서 빨리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들은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3. 그는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나는 것뿐이다.


 화는 슬픔의 흔한 표현 중 하나이다. 큰 상실(앞으로 겪게 될 상실을 포함하여, 

예를 들어 불치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의 경우)을 겪은 사람들은 

종종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하는데 가족과 친구들은 

그들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가 화난 것이 당신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그냥 화가 나는 것뿐이다. 그들은 세상에 화가 나고, 신에게 화가 나고,

자기와 같은 슬픔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자기는 마지막이 가까워 오는데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슬퍼하고 있는 사람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설명하거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화를 낼 수 있게 해 주고 가능하다면 

“내가 너였어도 화가 났을 거야.”라고 말해 주라. 

정말 그랬을 테니까.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 그가 믿음이 약하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는 아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그러신 걸 거야.”, 

“뭔가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거야.”, 

“이것이 최선의 길이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걸 거야.” 따위의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도록 하라.

이 세상은 망가져 있기때문에 때로 나쁜 일도 일어나며 그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처럼 마음 아파하신다.

나쁜 일들을 모두 하나님 편으로 돌리는 일은 신앙적으로 옳지도 않을뿐더러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다. 

 

4.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는 행동은 지극히 정상이다.


 슬픔의 또 다른 정상적인 징후는 흥정하는 것이다.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은 종종 협상을 하려 한다. 

“하나님, 그 사람을 돌려만 주신다면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오 하나님, 그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하라는 것은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기도의 형식으로 협상을 하는 모습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5. 우울해하지 말라고 윽박질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울이 슬픔의 흔한 증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삶의 기쁨과 활력을 빼앗아 간다. 

우울한 사람은 음식에도 관심이 없고 전에는 좋아했던 사람들이나 활동에도 관심이 없어질 수 있다. 

그들은 일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식사 준비를하는 데도 아주 무기력해질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삶에서 유리되어 있는 이들의 모습에 인내심을 잃을 수도 있고 

그들이 영원히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까 두려워질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언쟁을 벌이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마 당신은 그가 우울해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를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우울해할 것이다. 

명심하기 바란다. 

들어 주고, 인내해 주고, 기다려 줄 때, 슬픔에 빠진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은 서서히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퀴블러 로스는 충분한 정서적 지지를 받은 사람은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삶을 살아간다고 확신했다.

들어 주고, 지지해 주고, 사랑을 표현해 주고, 판단하지 않으며,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어떤 기분인지, 또 어떤 추억이 있는지 등등) 격려해 주는 것, 

이 모든 것은 치유 과정에 큰 도움을 준다. 함께했던 기념일, 휴가, 가족 모임, 함께 갔던 장소, 

이벤트 이런 이야기들은 슬픔을 다시 느끼게 하고 그 감정은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사라질 것이다.

 

 6.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그를 슬픔 속에 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슬픔 속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를 슬픔 가운데 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슬퍼하고 있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며 우리는 그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슬픔은 우리까지도 슬프게 만들며 그들의 아픔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기에 우리는 그들을 내버려 둔다. 

하지만 옆에 있어 주는 것의 위대한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곁에 함께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는 비탄에 빠졌던 욥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의 친구들은 잿더미 위에 앉아 있는 욥의 곁으로 와 앉았다. 

삼 일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욥의 마음은 위로를 얻고 지지를 받을 수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열고 벌어진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위로는 힘을 잃고 욥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으며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곁에 있어 주되 입은 다물어 주는 것이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때로 가장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데이빗 반덴버그
37년간 목사로서 수많은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였으며, 현재 미국 오하이오 주 케틀링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