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녁 자리가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분인데 제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더군요.
“꽤 이름있는 스님인데, 제가 비밀을 하나 알아요. 알려 드릴까요?”
저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죠. 그러자 그분은 주위를 살피더군요.
그리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몇 년 전에 친구들과 00스님 방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자리가 영 심심하네’ 하시더니 벽장에서 술과 육포를 꺼내는 거에요.
거기서 그걸 같이 먹고 마셨어요.”
그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더군요.
‘스님=채식만 하는 사람’이란 등식이 무너져 버린 거죠.
그리고 한 마디 더 보탰죠.
“스님이 어떻게 고기를 먹어요?
계율을 어긴 거잖아요.”
저는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묻습니다.
“스님은 정말 고기를 먹지 않나요?” 질문의 타깃은 스님뿐만 아닙니다.
“목사님은 진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나요?”
고기를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사람들은 ‘계율의 대명사’로 여기는 거죠.
그런데 미얀마·태국·스리랑카 등의 남방 불교에선 사정이 다릅니다.
그곳 스님들은 고기를 먹습니다. 탁발로 구한 음식이라 가리질 않는 거죠.
또 티베트 불교의 라마승들도 고기를 먹습니다.
고원지대라 단백질 섭취가 안 되면 고산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율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뒤에 생겼다고 합니다.
‘살생을 하지 마라’는 계율이 확대적용된 거죠.
그때는 산중에 있는 사찰에서 고기를 먹으려면 가축이나 짐승을 직접 잡아야 했으니까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죠. ‘술을 먹지 마라’는 계명은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 ‘술에 취하지 마라. 거기서 방탕이 나온다’
‘(교회 지도자는) 술꾼이어선 안된다’ 등의 구절이 있을 뿐이죠.
주위를 둘러보세요.
가톨릭과 성공회의 신부님, 개방적인 개신교단의 일부 목사님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죠.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의 뜻을 어긴 건가요. 천만의 말씀이죠.
‘아이구, 머리 아파!’ 싶으시죠.
그럼 대체 어떡해야 ‘계를 지켰다’가 되고, 어떡해야 ‘계를 어겼다’가 될까.
‘현문우답’은 그 기준이 ‘마음’이라고 봅니다.
계(戒)의 본질은 다름 아닌 ‘마음을 지키는 것’이죠. 너무 추상적이라고요?
신라의 원효대사를 보세요. 세상 사람들은 그를 ‘파계승(破戒僧)’이라고 불렀죠.
고기도 먹고, 술도 마셨거든요.
그런데 원효대사는 신라의 숱한 전쟁고아들을 돌보았죠.
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직접 노래까지 지었죠.
그걸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전했죠. 원효대사는 닭다리도 뜯고, 막걸리도 마셨겠죠.
그러나 ‘마음’을 지켰던 거죠. 바로 ‘부처의 마음’이죠.
그러니 원효대사는 ‘계’를 지킨 건가요, 아니면 어긴 건가요.
어떤 스님은 ‘고기’로 불심을 재고, 어떤 크리스천은 ‘술’로 신앙의 두께를 잽니다.
“나는 고기를 안 먹으니까 진짜 스님이지” “나는 술을 안 마시니까 진짜 크리스천이야.
그런데 저 사람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술을 마시네. ‘나일론 신자’인가 보지.”
크리스천의 ‘계’도 마찬가지죠. 그 계는 무엇을 지키는 걸까요.
‘현문우답’은 그 역시 ‘마음’이라고 봅니다. 나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이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예수의 마음이죠.
그럼 기독교의 계명, 불교의 계율은 언제 지켜지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마음’을 지킬 때 절로 지켜지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술을 마시는 일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일, 예수님 보시기에 어떤 게 진짜 ‘파계’일까요.
백성호 기자 http://pdf.joinsmsn.com 2008년8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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