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2016서울 순성놀이 3

tkaudeotk 2016. 10. 18. 13:02





1968년1월21일 북한124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이무장 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하여 우리 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여졌다. 

1.21사태소나무에는 그 때의 일촉즉발한 상황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으며 

총알을 맞고도 살아있어 총알소나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2010년 9월말 KBS ‘1박2일’에 방영되면서 탐방로 구간에서  인기 있는 명소





백악산

출처:간송미술문화재단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 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2]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예로 1422년(세종 4년)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

.[4]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년) 4월에 닫혔다.

1469년(예종 1년)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

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 

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남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 하여, 

홍예문 천장에는 지네의 천적인 을 닮은 봉황이 그려져 있다.

평시에는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한다. 

다만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같은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1506년(중종 1년)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물자운송에 편리를 돕기 위하여 다시 개방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해 9월 3일 혜화문과 창의문을 그대로 닫아 두기로 한다는 것만이 나올 뿐이다.

또한 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산(현 남산)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온 느낌에 잠시 쉬었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하문이라는 별칭은 인왕산 자락의 계곡 이름에서 유래하였다.(출처필요)

이 이름을 본따서 상명대학교에는 '자하관'이라는 강의동 건물이 있으며, 대학은 자하(紫霞)라는 이름의 교지를 발행한다.

한양도성은 분지 지형이다. 성곽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등 4개 산의 능선을 연결했다. 

이런 산에서 한양도성 안으로 흘러내린 물은 한곳으로 모이는데 그것이 바로 청계천이다. 

청계천은 동대문 인근에서 한양도성을 빠져나간다. 이 때문에 청계천의 시작을 찾는 것은 모호한 작업이다. 

사진은 북악산 자락의 창의문 바로 아래에 있는 ‘청계천 발원지’ 표석이다. 

일부러 표석까지 세운 것은 청계천 전체에서 가장 긴 지점이기 때문이다. 

도시팽창으로 새로운 땅이 필요해지면서 지난 19세기 상류부터 복개되기 시작됐고 1977년 완료됐다. 

거꾸로 2005년 원래 하천으로 복원이 이뤄졌지만 전체의 절반에 머물렀다. 

광화문광장에서 북악산까지의 청계천은 여전히 땅속에 잠들어 있다는 얘기다. 


/글·=최수문기자 chsm@sedaily.com

2012년 7월 25일에 개관하였으며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문학관이다. 

대지는 90㎡ 이며 3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사진자료와 친필원고, 

시집, 당시에 발간된 문학잡지 등을 전시하며, 그리고 윤동주 문학관의 가장 독특한 특징인 시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영상실이 있는데 

이 영상실은 물탱크를 재활용하여 만들었다. 

문학관에서 주최하는 시낭송회와 음악회, 백일장 등이 열리며, 

문학관 뒷편 인왕산 자락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시절 이곳에서 가까운 누상동 9번지(서울 종로구 옥인길 57)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1922~1982, 시인)과 함께 하숙생으로 살았으며 


당시 그의 대표작인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의 작품을 남겼다. 

윤동주문학관 건물의 특징은 

청운동에 버려진 물탱크와 수도가압장 시설을 재건축하여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는데 뛰어난 공간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물탱크 내부를 영상실로 만들었는데 외부에서 한줄기의 빛이 스며들게 설계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탱크의 윗부분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뒤쪽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계단으로 연결된다. 

2013년 1월 한국문화공간건축학회에서 주관하는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건축문화잡지인 월간 스페이스(Space)가 선정한 한국의 현대건축 'Best 20' 중에서 18위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에 선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동주문학관 [尹東柱文學館] (두산백과)





바위투성이의 인왕산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다. 치마바위·선바위·기차바위 등 이름들도 정겹다. 

한양도성 순성(巡城·성곽 따라 돌기)은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강북삼성병원 뒤쪽의 서대문 터에서 윤동주문학관·창의문까지 4㎞ 정도 거리로 일반적으로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전경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왕산이 여전히 낯선 이유는 아픈 현대사 때문이다. 

1968년 1·21 사태로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에야 개방됐다. 

수도 서울(주로 청와대)을 지킨다며 문화재를 깔고 앉은 군부대 막사와 초소들도 불편함을 준다. 


/글·사진=최수문기자 chsm@sedaily.com




















                           홍난파 가옥

홍파동 언덕배기에 2층의 아담한 적벽돌 건물이다. 

1930년대에 지어졌다. 홍난파가 생의 마지막 6년을 보낸 집이다. 

공연장과 전시실을 겸한다. 독립운동과 친일로 이어진 한 예술가의 궤적이다. 

그러므로 사실 그대로의 지난 역사를 기억한다. 


홍파동 가옥은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조 서양식 건물로 

곡가 홍난파 선생이 인수하여 살던 곳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이 주택은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의 대표곡들이 작곡된 산실이므로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될 가치가 있다. 

홍난파 선생은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으로 인해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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