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2016서울 순성놀이 1

tkaudeotk 2016. 10. 18. 12:51


서울 신문로변 경희궁터 98,466㎡ 가운데 경희궁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22,809㎡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서울역사박물관이 2002년 5월 21일 개관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이로써 한반도 역사의 중심무대였던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투영하여 서울시민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또한,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적인 대도시로 도약하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 

문화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하는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여, 

서울시민 개개인에게는 자긍심과 소속감을, 

외국인에게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의 아늑한 정취를 따라 걸어 들어오면 만나는 정동극장은 

시민들의 이웃과 같은 생활 속의 열린 문화공간이다.
정동극장은 1908년,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던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圓覺社)의 복원 이념을 담고 있는 유서 깊은 극장이다. 

1995년 개관 이래 상설공연 <전통예술무대>를 비롯해 <명인전>, <아트 프론티어>등의 예술성 높은 기획공연과 

<정오의 예술무대>등 일반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 등을 선보여 왔다.

2010년 전통뮤지컬 <춘향연가>를 창작·초연하며 상설공연브랜드'미소(MISO)'를 성공적으로 런칭하여,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세계 곳곳의 무대에 한국의 문화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려왔다. 

현재는 한국 전통문화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내외국인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품격있는 공연 '미소(MISO)'의 두번째 이야기 <배비장전>(서울)으로 사랑받고 있다.

* 개관일 : 1995년 6월 17일

한양의 서남쪽에 있었던 소문()인 소덕문

소덕문은 도성의 서남쪽인 숭례문과 돈의문의 중간지점에 있었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이 원래의 위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의 4개의 소문() 중 하나로서 태조 5년에 다른 성문들과 함께 건설되었다. 

영조 14년에 소덕문의 문루를 다시 건축하였는데, 

석문을 개축할 때 왕이 문의 이름을 고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소덕문의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쳤다. 

소덕문은 광희문()과 함께 시신을 성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당시 도성의 시신은 광희문과 소덕문을 통해서만 운구하도록 했는데, 

불편하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자 1909년 이 제도는 폐지됐다.

소덕문은 성보다 약간 높게 돌을 쌓은 뒤 가운데에 홍예문() 하나를 만들어 통로를 만들었다. 

그 위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구조의 문루를 세웠다.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경복궁 중건을 위해 비용을 마련하고자 

서울의 4대문을 통과하는 사람들로부터 통과세를 거두었다. 

이 때 소덕문은 훈련도감이 관할했다. 

소덕문은 일제 때인 1914년 도시 계획이라는 구실로 철거되었고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덕문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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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1],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붙인 명칭이 아니라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

 서울 4대문 및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출처 필요] 축성하였다.[4]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있었다.


특징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홍예문에는 철이 덧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출처 필요]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로 평가된다

숭례문 현판


숭례문의 현판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라고 전하듯이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썼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남겨져 있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일반적인 문들의 현판들은 대부분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 세로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로 인해 편액의 손실을 우려해 숭례문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에서 현판이 추락하여 

그 충격으로 일부 목재편에 탈락, 결실 및 부분 균열이 발생되었다. 

또한 현판의 테두리목도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고 일부 결실된 상태이다. 

그러나 해당 결실편을 현장에서 95% 정도 확보함에 따라 원형 보존처리에는 이상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리한 편액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되어 보존처리되었다. 

이송 후 관련 문헌과 자료를 검토함과 동시에, 그간 국립고궁박물관의 사전응급조사 및 자문결과를 기초로 

과학적 상태조사(X선적외선 촬영 등)를 거쳐 손상부분의 접착복원 등 숭례문 현판의 정밀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며 

처리기간은 6개월 이상 소요예정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은 총 38조각이 났으며, 2009년5월 말에 복원완료 예정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2009년 7월 3일에는 현판이 완전히 복원되었다.

기존의 '숭'(崇)자 부분에 갈라진 부분도 메웠으며, 고증을 통해 정확하다고 밝혀진 

지덕사 소장 탁본을 토대로 기존의 변형된 글씨('崇'자와 '禮'자의 일부 등)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 

테두리목은 연결부위가 심하게 파손된 관계로 다시 걸었을 때의 위험에 대비하여 완전히 교체했으며, 

최고라 일컬어지는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인 오옥진과 단청장(丹靑匠)인 홍창원이 참여했고

원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복원의 의미를 높였다.

숭례문 방화 사건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 방화범 채종기(70, 경북칠곡)의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현장에 수십여대 소방차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펼쳤으나, 2월 11일 0시 40분 경에 건물 천장에서부터 화염이 일었고, 

오전 1시쯤부터는 2층 누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경, 불에 타지 않는 석축을 제외한 1, 2층 목조 누각이 대부분 전소하여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붕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초기에는 왜 불을 일찍 끄지 못하였나가 주 초점이였다. 

하지만 이는 숭례문의 구조상의 문제로 판명되었다. 

지붕 밑에 있는 칸에 있던 불은 물이 닿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진압이 어려웠고, 결국 무참히 타버렸다.)


초기 수사당국에서는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인지 의견이 엇갈리다가 

화재 발생 후에도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수사한 결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미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방화범인 채종기를 검거하였다.

하지만 6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이미 소실된 후였고,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밝히고 복구작업을 벌여 현재 복구되어 개방되었다. 

2008년 8월 15일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숭례문 복구현장을 공개했다.[37][42]

복구

복구현장에서 숭례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울타리(일제강점기에 설치됨) 안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하벙커 (깊이 2m, 너비 2m, 길이 3m 가량)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를 철거하기로 했다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 자리를 그림으로도 복원하겠다고 밝히며 도로 위에 옛 성곽 자리를 표시했다.

문화재청에서는 국민적 정서를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불타 소실된 자리에 숭례문의 잔해를 기초로 하여 

숭례문과 최대한 유사하도록 형태를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2013년 5월 복구 준공식을 목표로 하여 2013년 4월 29일 공사 완료하였다.


화재로 무너진 숭례문 복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 이후 없어진 동쪽 성곽 53m와 서쪽 성곽 16m 구간이 각각 복원됐다. 

동쪽 계단은 폭이 5m(종전 2.9m)로 늘어난다. 발굴 조사와 옛 자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반은 이전보다 30 ~ 50㎝ 낮아졌으며, 1층 마루는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뀐다. 

화재 직전 공장 제품이었던 지붕 기와는 전통 기와로 대체됐으며, 용마루 길이도 16.6m(종전 15.7m)로 늘어났다. 

잡상은 1층이 7개로 하나 줄었으며, 2층은 9개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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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서울타워
N Seoul Tower

정보
위치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산공원길 105좌표북위 37° 33′ 5.13″ 동경 126° 59′ 16.80″
상태완공
기공식1969년
건축1969년 ~ 1975년
완공1975년 7월 30일
용도전파 송출, 전망대
높이
안테나/첨탑236.7m (해발 480m)
지붕230m
최상층190m
기술적 상세 내용
층수지상 8층 (P0, P1, P2, EZ, T1, T2, T3, T5)
회사
건축가/건축회사대한민국 장종률
소유주대한민국 YTN
N서울타워

N서울타워(영어: N Seoul Tower)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2가 

남산 공원 정상 부근에 위치한 전파 송출 및 관광용 타워이다. .. 

1969년에 착공하여 1975년 7월 30일 완공되었다. 

높이는 236.7 미터, 해발 479.7 미터이다. 

수도권의 지상파방송사들이 이 타워를 이용하여 전파를 송출한다. 

전망대에서 서울 시내 전역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 찾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남산에 있어서 보통 남산타워라고 널리 부르지만, 

안전행정부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이다.[1] 

1980년 개방 이후 현재까지 서울에서 해발 높이로 가장 높은 위치에서 

높은 전망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오는 2016년 잠실에 롯데월드타워가 개관할 때까지 

지위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탑이 세워진 곳은 원래 조선신궁이 있었던 자리로, 철거하면서 공터로 있다가 

안전기획부 청사 등이 세워지면서 같이 세워진 것이다.


조선시대, 남산 팔각정 옆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1961년 12월, 남산에 전파송신을 위한 75m 탑이 세워졌고

이어서 세워진 송신탑들이 봉수대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1969년 12월,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남산의 현재 위치에 종합송신소를 위한 220m의 송신탑을 세울 계획을 민방협에서 발표하였다. 

당시 3개 민간방송의 합작 투자로 설립된 남산타워는 총 233m, 해발 고도 490m로 동양에서 가장 높다고 선전되었다


남산타워는 건축가 장종률이 설계한 작품으로 내부 시설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로 1971년 12월 3일에 완공되었고,

1975년 8월까지 3층의 전망대와 방송국 송신실, 박물관, 공개홀, 기념품점 등이 들어섰다.

 완공 후 체신부에서 인수하여 전망대 사용을 금지하다가 1980년 10월 15일, 처음으로 일반에 개방하였고,[5] 

이후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뉴스 전문 방송국 YTN이 1999년 12월, 체신공제조합으로부터 인수하였다. 

2005년 4월 YTN이 CJ그룹 계열사 CJ푸드빌에 개·보수 계약을 맺었고, 

같은 해 12월 공사가 완료되어“서울타워”에서 “N서울타워”(정식 이름은 “YTN서울타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른다. 

남산 YTN서울타워는 전 세계 여행 전문가 평가와 독자 선호도 조사로 뽑은 

세계 500대 관광지에 올랐으며 500위중에 342위에 올랐다. 













1950년 4월 29일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설립되었다. 설립과 동시에 국립극단을 창단하고, 

1950년 4월 30일 창단공연으로 연극 《원술랑》과 《뇌우》를 무대에 올렸다. 

6·25전쟁 당시 대구로 이전하였다가 1957년 6월 1일 다시 서울로 이관하고, 

1962년 1월 15일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오페라단 등의 전속단체를 창단하였다.

1969년 3월 8일 KBS로부터 교향악단을 인수하여 국립교향악단으로 개칭하고, 

1973년 5월 국립발레단과 국립합창단을 창단하였다. 

1973년 10월 17일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국립극장을 개관하고 1981년 8월 1일 국립교향악단을 KBS로 이관하였다. 

1982년 5월 15일 야외놀이마당을 개장하고 1991년 국립중앙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5년 1월 1일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으며 2000년 2월 1일 국립발레단·국립오페라단·국립합창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하였다.


대극장인 해오름극장과 소극장인 달오름극장, 공연 성격에 따라 무대가 바뀌는 별오름극장, 원형 야외무대인 하늘극장 등으로 이루어졌다. 

해오름극장은 1,563석, 달오름극장은 427석, 별오름극장 80~100석, 하늘극장 600석 규모이다. 

해오름극장에서는 스페인의 〈마리아 로사 발레단〉, 미국의 〈워싱턴 발레단〉, 일본의 〈가부키극단〉과 

뮤지컬 극단 〈사계〉 등의 유명 예술단체가 내한하여 공연하였고, 달오름극장에서는 완창판소리

일요상설무대등 전통 상설무대와 해설이 있는 발레, 소극장 오페라축제, 대학연극축제 등 다양한 장르의 고정 기획물이 무대에 오른다. 

2005년 현재 행정지원과·공연운영과·무대예술과 등 3개 과로 구성되었고, 

국립극단·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 등 4개 전속단체를 거느리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 59(장충동2가 산14-67번지)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립중앙극장 [The National Theater of Korea, 國立中央劇場]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