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2016서울 순성놀이2

tkaudeotk 2016. 10. 18. 12:57




광희문(光熙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소문이다. 

오간수문·이간수문이 가까워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였고,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남소문(南小門)이라는 속칭도 있는데, 이는 근대부터 불린 이름이다.[주 1]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711년(숙종 37년)에는 민진후가 광희문을 고쳐 쌓으며[改設] 문루를 건설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이때 마련한 목재는 돈의문에 사용되었다. 

1719년(숙종 45년) 1월 25일에 민진후가 "국초(國初)에 도성을 쌓은 뒤 문루를 모두 세웠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8년에 자금 부족으로 관리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혜화문과 함께 총독부에서 문루를 철거하였다 

1975년 11월 김응현이 쓴 현판을 달고 복원되었는데, 이는퇴계로 확장을 위하여 15m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 2014년 2월 17일에는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구청에서 관광객이 2층 문루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광희문성곽코스'를 선보였다


다른 한양도성의 문과 달리 광희문의 원래 문루는 약간 특이했다. 

보통의 문은 홍예와 붙어 있는 반면, 광희문의 문루는 나무 기둥으로 연결되는 형식이었다.


시체문

광희문에는 도성의 시체 행렬이 종종 통과하곤 했다. 

그 이유는 도성의 장례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사소문(四小門)중에서도 소의문과 광희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창의문은 산에 있는데다 출입이 불편했고, 혜화문은 닫혀있는 숙정문을 대신해 북문으로 쓰였다.

당시엔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문에는 꼼짝도 못 할 것'이라 하여, 

광희문의 돌을 갈아 만든 돌가루가 '수구문 돌가루'라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었다.



을지로6가 18번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한다.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간수문 [二間水門]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연합뉴스) 김동규 기자 =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청계천으로 흘러들게 하는 입구에 마련한 수문 중 하나인 이간수문(二間水門).

조선 태조 때 서울성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이간수문은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조성을 위해 옛 동대문운동장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DDP는 거대한 우주선이 도심에 불시착한 듯한 3차원 설계로 2014년 개관 전부터 화제가 됐다. 

여성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이라크 출신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지만,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도시의 역사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에서 중구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으로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에서중구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이다. 

오간수문은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수문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다. 

이 때문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복원하였다.


그후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이유로 수문을 헐고, 

이듬해 3월에는 동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었다. 

대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것이다.



오간수교는 1926년 다시 확장·건설되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간수문 [五間水門] (두산백과)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서울 도성 정동()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른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으로 홍예문()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을 달았다. 

중층()의 우진각 지붕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아래층이 내삼출목() 외이출목()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인데 

쇠서[]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인지문 [Heunginjimun Gate, 興仁之門] (두산백과)














서울 종로구의 동숭동에 남북으로 달리는 산이 있다. 

볼록하게 솟은 모습이 ‘낙타()를 닮았다’하여, 낙타산으로 부르고 있다. 

최근에는 이름을 단순화하여 낙산으로 압축한다. 

이 산은 북악()을 진산으로 삼을 때 좌청룡이 되므로, 우백호인 인왕산과 대비된다. 

성저십리로 통용하는 도성의 성곽은 이들 네 개의 지점을 사지()로 삼아 능선 위로 쌓았다. 

그러므로 낙산도 성곽이 지나가는 주요 연결 지점이며,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동숭동은 서울대학교 본부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므로 배후의 낙산을 학교의 상징물로 이용하여 학회지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이곳은 문예진흥원을 비롯하여 문화 · 예술 활동의 센터로 탈바꿈하고 있다. 

또 과거에 자리했던 대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됨으로써 새로운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과거 서울대학교 본부가 자리했던 동숭동에는 

문리대 · 법대 · 의대 · 수의대 · 음대 · 미대 등의 단과대학이 집중되어 있었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며 미래의 주역으로 자부하는 이들은, 

자유당 시절 3선 개헌의 반대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체제에 대한 저항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을 박건은 노래로 표현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어있겠지, 눈물속의 봄비가 흘러내리면 

임자 없는 술잔에 떠 어리는 그 모습,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이라고. 

이것은 바로 마로니에(오늘날은 공원 명으로 전승됨)가 서울대학교의 상징이며, 

과거에 자리했던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산 [駱山] - 낙타를 닮은 뫼 (땅 이름 점의 미학, 2008. 5. 15., 부연사)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翼工式) 우진각지붕건물.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웠다. 

이 때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하였으므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졌다. 

당시 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에 혜화로 고쳤다.


건물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 뒤 한말까지 동북 방면의 성문으로 보존되어오다가 1928년에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헐렸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문의 모습은 아래쪽에 하나의 아치형의 출입구를 둔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의 형태를 취하였다.


육축에는 하부를 큰 장대석으로 받치고 

그 위에 무사석(武砂石 : 돌로 층을 지어 높이 쌓아 올린 축석)을 불규칙하게 쌓아올렸으며 

위쪽 좌우에 2개의 누조(漏槽 : 홈통)를 돌출시켰다. 

그 상부에는 낮은 담을 쌓아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가퀴[城堞]를 두었다.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이 일대를 새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는 말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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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사적 제10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제작시기조선 초기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북쪽의 대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三淸洞)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다.

한양도성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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