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인동에서 보물찾기
지갑이 얇아도 환영받는 곳이 있다면 바로 벼룩시장일 것이다. 누가 어떤 연유로 다시 세상에 내놓는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기능에 대한 믿음으로 그 과거를 눈감아준다면 누구라도 알뜰족에 합류할 수 있다.
서울에서 벼룩시장이라 하면 탱크 빼고는 다 있다던 황학동이 먼저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청계천 공사와 함께 황학동 벼룩시장은 서울풍물시장 등으로 많은 부분 흩어진 상태다. 이제는 종로구 숭인동 동묘 앞 숭인동 벼룩시장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청계천에서 노점을 하던 상인들과 황학동에서 벼룩시장을 하던 이들이 요즘은 동묘 앞으로 모여든다.
숭인동 벼룩시장은 1980년대 말 생겨났으며 명성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많이 위축됐지만 지금도 온갖 희귀한 물건들이 모여드는 명소이다. 돌담길을 따라 매일같이 좌판이 벌어지는데 마치 박람회를 보는 듯 하다. 의류, 신발, 지갑부터 시계나 전자제품, 심지어 고서, 영화포스터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품들을 망라하고 있다.
천원의 행복, 알뜰한 쇼핑
이곳의 물건은 대부분 1,000원이다. 만 원 한 장이 무력하게 헐려 나가는 마트나 슈퍼마켓을 생각하면 거의 공짜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개중엔 꽤 값나가는 몇 만 원대 물건도 있지만 시중가에 비하면 헐값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거기에 30만 원짜리를 단돈 만 원에 판다고 말하는 주인의 구수한 입담까지 더해지면 마치 횡재하는 기분이다. 쇼핑을 하다가 출출하면 한 개에 1,000원 하는 삶은 오리알이나, 빈대떡 등으로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숭인동 벼룩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의외로 중고의류다. 주로 아파트단지 재활용품 수거함에 모인 옷가지를 상인들이 1년 단위로 계약해 1㎏에 250~300원에 사온다. 압구정동이나 동부이촌동 등 부유층 아파트에서 나온 옷들은 고가의 브랜드이거나 입은 흔적이 거의 없는 옷들이 많아 매대만 펼지면 금세 팔려나간다.
새로운 옷이 들어오는 날에는 좋은 옷을 남보다 먼저 건지려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옷의 가격은 대부분 1,000원이지만 모피나, 가죽 등은 1만 원대, 명품은 10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잘만 고르면 쓸 만한 고가품을 싼값에 얻을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지방에서도 알뜰족들이 찾아오고, 인터넷 쇼핑몰 운영자들이 대량 구매를 해가기도 한다. 250여 명의 노점상들이 매대를 펼치는 휴일 오후가 쇼핑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줄임말로서, 중국의 장수인 관우(關羽)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 서울 동대문 밖(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있으며,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음. 관왕묘는 선조 31년(1598)에 서울 남대문 밖에 처음으로 건립되었는데, 남쪽에 있다 하여 남관왕묘라고 했음. ≪증보문헌비고≫ 예고(禮考)에 따르면, 임진•정유왜란 때 관우의 혼이 나타나 때때로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 하므로,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관왕묘를 건립한 것으로 보임. 동관왕묘는 선조 33년(1600)에 명나라의 칙령으로 건립하여, 선조 35년(1602)에 준공하였음. ꃫ관왕묘(關王廟). 남관왕묘(南關王廟).
다시 청계천으로
동대문구 풍물시장 주변 지역이 재개발을 통해 활성화된다. 동대문구(구청장 유덕열)는 지난달 30일 서울시에서 최종한 ‘신설 제1종지구단위계획 재정비(안)’에 대해 결정·고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청계천 복원, 경전철 건설, 신설고가차로 철거 등 주변 여건변화에 따른 체계적인 도시관리와 서울풍물시장의 지역특화 및 서울시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아질 전망이다.
‘신설 제1종지구단위계획’은 신설동 117-23, 109-5번지 일대 서울풍물시장을 중심으로 14만5615㎡의 구역으로 지난 1997년 상세계획구역으로 시작된 이후 2004년 지구단위계획 재정비에 착수, 수차례에 걸친 의견수렴과 서울시 심의 등 많은 시일이 소요됐던 곳이다.
이에 구는 제3차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 수정요구사항을 반영한 재정비안을 재수립해 지난 5월 서울시로 결정요청하고 서울시에선 재정비안에 대해 최종결정 고시를 내려 이번에 서울풍물시장 활성화와 주변지역 주거환경 개선에 대해 결실을 맺게 됐다.
신설 제1종지구는 하정로를 중심으로 신설동교차로와 왕산로변, 청계천변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청계천 복원 및 서울풍물시장 조성에 따라 방문객이 증가하고 있지만 주변 편의시설과 기반시설이 부족하고 청계천변 이면부로 금속제작업, 공장, 창고 등의 주거를 위해 용도시설이 산재해 있어 도시환경이 열악한 실정이다.
구 관계자는 “대상지의 지구단위계획 재정비는 주변 개발여건과 변화에 대응해 구역확장과 일부 용도지역을 상향하고 서울풍물시장 주변 도로여건을 개선하고자 공공시설 부담계획과 함께 건축선후퇴, 전면공지 추가확보 등 인센티브 계획으로 체계적인 도시관리 계획이 수립됐다”며 “청계천변, 서울풍물시장 진입로변 보행위주의 가로조성을 위해 건물의 1층부에 공연, 전시장, 휴게음식점 등의 가로활성화용도를 도입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또 유덕열 구청장은 “진입로변 보행위주의 가로조성과 편익시설과 기반시설이 확충되면 용도지역 상향조정에 따른 적정 개발규모로 지역내 체계적인 정비가 이뤄져 풍물시장의 활성화는 물론 주변 지역의 주거 환경 개선에 크게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늦은점심을 이곳에서 해결합니다.
청국장양푼비빔밥5,000원,열무국수4,000원 사진이 없네요.
짝잃은 원앙인가요?
상징적으로 남겨 놓은 것 같습니다,
특이해서 담았습니다,무슨 건물인지는 모릅니다.
성동구 마장동 527번지와 동대문구 용두제2동 129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바로 아래쪽에서 청계천과 정릉천 두 물줄기가 합해지므로 두물다리라고 하였다. 폭 3~8m, 길이 43.8m로 도보교로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주)현대건설에 의해 준공되었다.
상설전시장은 ‘청계천이 복개되기까지’, ‘청계천복원공사’, ‘근대화 속의 청계천’, ‘인공위성사진으로 보는 청계천’, ‘조선시대의 청계천’ 등 8개의 주제로 나누어 청계천의 역사에 대해 전시하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영조대의 준천모습과 광통교·장통교·수표교·오간수교·살곶이다리 등 청계천의 옛 다리, 청계천을 복개하기 전 청계천변 주민들의 생활모습, 청계천 복원공사 과정 등을 모형으로 연출하고, 조선시대 이래 청계천 주변의 모습과 복개공사 현장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청계천 관련 각종 지도와 서적·공사도면을 비롯한 다양한 사진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바닥에 강화유리를 깔고 유리 아래에 청계천일대의 대형 항공사진을 매입해 관람객들이 그 위로 걸어 다니며 청계천의 곳곳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모니터를 통해 청계천의 현재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코너도 있다. 기획전시실은 청계천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전시를 여는 공간이다.
청계천복원사업의 벤치마킹을 하려는 단체를 대상으로 청계천아카데미를 열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청계천의 역사·생태 관련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공연·영화상영 등의 문화행사도 종종 열린다. 평일은 오전 9시∼오후 8시, 토·일요일과 공휴일은 오전 10시∼오후 6시에 개관하며 월요일과 1월 1일에는 휴관한다. 관람료는 무료이다.
추억의 도시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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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육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 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 (실천 문학사 발행) 에서
억새풀,가을에 다시 와야겠씁니다.
살곶이 남매동상.
【서울=뉴시스】서상준 기자
남매상은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는 지점인 '살갖이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남매상의 정식 명칭은 '동심의 여행'이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천변 산책로를 걷던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남매상을 보며 미소를 머금는다.
남매상은 3년 전부터 누군가 한복을 입혀줘 화제가 됐었다. 남매상은 현재 시민 공모를 통해 누나 '여울이'와 남동생 '가람이'로 불리고 있다.
3년 전 최초로 남매상에 한복을 입혀준 주민은 인근에 거주하는 40대 주부 김 모씨로 밝혀졌다. 비록 조각상이지만 벌거벗은 형상의 어린 남매 모습이 안쓰러운 마음에 옷을 입혀줬다는 후문이다.
남매상은 그 후 계절마다 한두 번씩 새 옷을 갈아 입고 있다. 현재는 한양여자대학 의상디자인과 동아리인 '패크레'(Facre) 학생들이 예쁜 의상을 갈아 입혀 주고 있다.
고재득 성동구청장은 3일 "여울이와 가람이는 이제 성동의 명물이 됐다. 남매상을 보면 어릴적 모습도 떠오르고 또 이웃을 생각하는 우리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다"며 "철마다 다른 모습으로 계절을 느끼게 해주고 주민들에게 행복한 미소를 선사하는 남매상의 선물이 성동구 전체로 전파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ssjun@newsis.com
남매상은 오원영 작가가 만든 '동심의 여행' 조각품이다.
오 작가는 본인 아이들을 모델로 남매상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다. 한천(漢川:현재의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 한강을 약 2km 앞둔 곳에 놓여졌으며, 현재의 서울 성동구 행당동과 성수동의 경계에 있다. 조선시대의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하며 원래 이름은 제반교(濟盤橋)였고 일명 살곶이다리라고 한다.
1420년(세종 3) 세종의 명령으로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감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강의 너비가 너무 넓고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 교기(橋基)만 세우고 중지하였다가 63년 후인 1483년(성종 14)에 완성하였다. 길이 78m(258尺) 너비 6m(20尺)였다.
높이 1.2m인 기둥을 네 줄로 세운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대청마루를 깔듯 세 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낮게 하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으며, 돌 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놓아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도성에서 동남쪽으로 경상도 봉화(奉化)에 이르는 간선로(幹線路) 위에 놓여 있었다. 즉 동대문이나 광희문(光熙門)을 통해 도성을 벗어난 후 만나는 큰다리로서 그 후 송파진(松坡津)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충주 방면으로 연결되었다. 국왕이 군사훈련 참관 등을 위해 뚝섬[纛島]으로 행차할 때도 이용하였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다리 절반의 석재를 가져다 쓴 후 버려져 있었는데 1972년 서울시에서 복원하였으나 원형 그대로 복구되지는 못하였다.
요약설명
조선시대의 다리이다.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었다. 세종 2년(1420)에 다리를 짓기 시작, 성종 14년(1483)에 완공했다.
교각은 4개씩 열을 지어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했고 다리에는 일체의 난간이나 장식을 하지 않았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다듬어졌다. 1920년 홍수로 다리의 일부가 유실되어 보수하였고 과거보다 하천폭이 넓어져 다리의 중앙부터 콘크리트 다리로 이어서 길이를 늘렸다.
지역 이름을 따서 ‘살곶이다리’ 라고도 하고 판석을 깔아 마룻바닥과 같이 평평한 바닥을 만들었기 때문에 ‘제반교’로 불리기도 한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긴 다리이다.
상세설명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살곶이 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의 모양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1920년대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 가서 70년대에 다시 고쳐 지었으나, 다리의 오른쪽 부분에 콘크리트를 잇대어 복원함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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