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10.84km, 유역면적 59.83㎢이다.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제3대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후 영조 때에는 준설·양안석축(兩岸石築)·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로서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하였다.
순조·고종 때에도 준설공사는 계속되었는데 이 개천에 놓인 다리는 수표교(水標橋)·오간수교(五間水橋)·광교(廣橋)·영미교(永尾橋)·관수교(觀水橋) 등 모두 24개가 있었다. 국권피탈 후 일제강점기 초(이때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이루어졌다.
8·15광복 후에도 청계천의 유지관리에 힘써 왔고, 1958년 6월부터 복개공사에 착수, 1960년 4월에 1단계로 광교∼주교(舟橋) 1∼4가 간을 완공하여 너비 50m의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1967년~1976년 청계고가도로를 건설, 상류에서 성동구 사근동까지 5.4km 구간은 복개되었으나 중랑천 합류 지점까지의 2.4km 구간은 복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청계천 주변의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의 안전문제가 제기되자, 1994년~1999년의 5년에 걸쳐 남산 1호 터널에서부터 청계천4가에 이르는 길이 2,030m의 상판과 다리기둥, 들보를 보수하였다. 2002년 청계천4가에서 성동구 마장동 사이에 이르는 길이 3,834m의 상판을 교체하는 보수를 마쳤다.
2003년 7월부터 시작된 서울시의 청계천복원사업 구간은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신답철교로 구간으로 5.8km에 이른다. 2005년 10월 1일 2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청계천 위에 놓여진 총 2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정조반차도를 비롯한 역사적 자료를 복원한 도심 속 하천으로 개통하였다. 주요 다리로는 모전교·광통교·장통교·버들다리·두물다리 등이 있다.
청계천(淸溪川)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남산, 북악산 등에서 발원하여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을 거치며 중랑천과 합류한 뒤 한강으로 흘러드는 마른 하천이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본래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청계천"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다.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 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1]
1930년대부터 시작된 복개 사업과 1970년대에 완공된 청계고가도로의 환경 오염 및 노후에 따른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 환경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일례로 경제학자 우석훈은 자신의 저서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복원된 청계천을 "인공호수"라며 호되게 비판한 바 있다.
1395년에 세워진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왕의 큰 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당초 1395년(태조 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그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2010년 8월에 완료되었으며 제65주년 광복절에 맞춰 8월 15일에 일반인에 공개되었다.
종로네거리에서 을지로네거리 방향으로 나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 위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광통교 혹은 광교라고 불렀고, 소광통교와 구분하여 대광통교로도 불렀으며, 일명 큰광교・큰광통교로도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로, ≪승정원일기≫에는 광충교(廣沖橋)로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다.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흙으로 다리를 놓았으며, 태종 10년(1410) 큰 비로 다리가 유실되어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로 만들었다. 이후 1760년 경진준천(庚辰濬川)을 한 지 2년 후인 영조 38년(1762) 다리의 기초 부분 개축과 난간을 보수하였다. 이후 1899년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의 전차가 가설되면서 광통교 동쪽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어 일부 훼손되었고, 1910년 8월에는 광통교 동쪽에 놓여 있던 전차선로를 복선화하면서 광통교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되어 철근콘크리트교로 확장됨에 따라 다리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다. 1923년 청계천 암거공사 때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하수관을 박아 하수를 배출하였다. 1958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광통교의 난간만 창경궁・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다리 본체는 그대로 다시 묻히게 되었다. 이후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광통교에 놓여진 석물인 신장석과 우석(隅石) 등에 새겨진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은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까마귀 우는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뉴스에 나왔던 놈이 이놈인가봐요.
수표교(水標橋)는 청계천의 다리이다. 조선세종(世宗) 2년에 처음 놓였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동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원래 자리에 다시 놓으려고 했으나,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겨지지는 못했고, 대신 그 자리에는 임시 다리가 놓여 있다.
수표교는 만들어질 당시는 그 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리었다. 세종 23년(1441년) 다리 앞에 개천(開川,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세웠다.
다리 아래에 ‘在長通橋東橋西中央立石標刻尺寸之數 凡雨水以知深淺(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영조 36년(1760년)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庚(경)·辰(진)·地(지)·平(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측정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수표교는 6모로 된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를 얹고 그 사이에 판석(板石)을 깔아 만들었다.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 2단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 윗 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난간에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이 다리는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영조 36년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마치고 다리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漢城判尹)에게 알려 홍수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수표교에 ‘丁亥改造(정해개조)’,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라 새겨져 있어 준설공사가 끝난 후 영조 43·44년(1767·1768년)에 다리를 다시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간장만 남았네요.그릇까지 먹어치울 기세였는데....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는 도성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이곳에는 도성 내에 흘러내리는 물을 도성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 성벽 밑으로 물을 통과시킬 수 있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다.
이 중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도성 바깥쪽으로 보내기 위해 조성한 두 칸 구조의 수문으로 윗부분은 홍예(虹霓 - 문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것)로 되어 있다. 수문 내ㆍ외측에는 하천을 따라 흐르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날개 형태의 석축시설이 있으며, 남문과 북문 사이에는 물가름을 용이하게 하도록 배 머리 모양의 석축시설을 하였다. 정비복원공사에서는 없어진 이맛돌과 부형무사석 등을 보충하였으며,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설치된 시설인 목책(木柵)을 복원하였다.
목책의 좌우로는 돌은 파내서 만든 홈이 있는데, 이는 목책이 분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구조물로 보인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중구 을지로(乙支路)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오간수문은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수문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다. 이 때문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복원하였다.
그후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이유로 수문을 헐고, 이듬해 3월에는 동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었다. 대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것이다.
오간수교는 1926년 다시 확장·건설되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낙산방향으로의 성곽길입니다.
아카시나무아래에서 물한모금 마시고 잠시 충전을합니다
문화재 지정도 아닌데 수리도 못하고 그냥 살아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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