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청계천 걷기 및 재래시장 투어(2)

tkaudeotk 2011. 7. 11. 12:32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서울 성곽은 조선< 朝鮮 > 태조< 太祖 >가 1394년 한양< 漢陽 >으로 천도하여 한양 방위를 위해 태조< 太祖 > 4년(1395) 도성축조도감< 都城築造都監 >을 설치하고 팔도< 八道 > 인원< 人員 > 20만을 동원하여 쌓은 성곽이다. 석성< 石城 >과 토성< 土城 >으로 축조된 성곽은 짧은 기간에 갑자기 쌓아 부실한 곳이 많았으므로, 세종< 世宗 > 4년(1422)에 약 32만의 인원을 동원하여 장방형< 長方形 > 마름돌로 전면 개축하였다. 그후 숙종< 肅宗 > 30년(1704)에 다시 정방형< 正方形 >의 돌로 보수하였다. 그러나 서울 성곽은 일제< 日帝 >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도시 계획의 명목 아래 허물어지기 시작하였고, 해방과 6·25 혼란기에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성곽은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유비무환< 有備無患 >의 호국정신< 護國精神 >이 깃들인 귀중한 문화유산< 文化遺産 >으로 길이 보존해야 할 호국유적< 護國遺蹟 >이다.

 

 

 

 

살구가 아주 탐스럽네요

 

 

성동왕십리 광장에 종로구 이화마을의 ‘날개 벽화’가 새 둥지를 틀었다. 16일 성동구에 따르면 날개 벽화는 지난 8~12일 왕십리광장 벽면그림 작업을 마치고 15일부터 주민들에게 개방됐다.

 

사실 날개벽화는 2년 전 벽화마을인 종로구 이화마을에 그려져 사진촬영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또 KBS프로그램 1박 2일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화마을 주민들은 너무 몰리는 시민들 때문에 여러가지 불편함을 호소했다.

지난달 4일 작가인 김규희(30)씨가 주민들 요구로 벽화를 지우게 됐다.

이런 딱한 사연을 접한 고재득 성동구청장이 왕십리광장에 다시 그리자는 제안을 하면서 사라졌던 날개벽화가 다시 생명을 얻게 됐다.

김 작가는 “왕십리광장에 그려진 벽화는 당초 벽화와 달리 ‘빛과 어둠’이란 주제로

 3가지 다른 모습의 날개가 드넓은 광장을 힘찬 비상하는 모습을 이미지화했다.”면서

 “아직 이화마을처럼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운치가 없어서 좀 아쉽지만 왕십리광장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008년 완공된 왕십리 광장은 왕십리 민자역사와 함께 동북부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구는 분수대,

사랑의 시계, 소월시비 등과 함께 날개벽화 합류로 더 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승수 기획공보과장은 “날개벽화 덕분에 왕십리광장이 쇼핑과 문화, 휴식이 어우러진 서울의 대표적인 광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면서 “앞으로 광장을 시민들이 직접 꾸미고 즐기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주민참여 프로그램 을 늘리겠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서울신문2010-11-17 11면

 

 

 

 

이화장(梨花莊)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뒤쪽 낙산 기슭에 있다. 동쪽으로 창신동, 남쪽으로 충신동, 서쪽으로 연건동, 북쪽으로는 동숭동에 둘러싸인 마름모꼴의 지형을 이룬 언덕진 곳에 위치 하였다.

이 가옥은 본채, 별채인 조각당, 그리고 여러 부속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내외가 살던 곳이고, 조각당은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이 이곳에 조각 본부를 두고 초대 내각을 구상한 곳이다.

이 건물이 자리잡은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文臣)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駱山)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승만이 이곳에서 조각(組閣)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기거할 집이 없어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당시의 실업가 권영일(權寧一) 등을 비롯한 30여명의 도움으로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돈암장에서 이곳 이화장으로 옮겨서 1947년 11월부터 기거하게 되었다.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8년 7월 경무대로 이사하였다.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끔 이곳에 들러 정원과 뒷산을 산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이곳 이화장으로 이사했고, 5월 29일에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7월 23일에 이화장으로 안치되었다가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화장은 대지 약 5,500㎡, 건평 230㎡인데, 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왼편 앞으로 '우남리승만박사상' 동상이 서있다. 그 뒤 작은 계곡 넘어 'ㄷ'자형의 본채가 있으며, 오른편 언덕 위로 'ㄱ'자형의 조각당이 서있다.

한양 도성의 좌청룡인 낙산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어 서향〔卯坐酉向〕을 한 본채는 192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본채는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응접실(접견실)과 서재가 있다. 대청마루 왼쪽에는 침실과 부엌이 있다. 본채는 그 자체로는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건물로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통 한옥이 그 시대상을 수용하며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벌대 장대석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7칸, 측면 6칸, 굴도리,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1988년 '대한민국건국대통령우남 이승만박사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역사자료 및 평소에 사용한 기구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본채 서쪽 언덕 아래에는 생활관이 있다.

이화장 본채에서 조금 떨어져 동남쪽 언덕에 막돌 화강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위치한 조각당은 역(逆)'ㄱ'자형의 평면을 한 아주 작은 건물인데, 약간 북쪽으로 튼 서향〔乙坐申向〕을 하였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위치한 1칸 반 온돌방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장마루를 깐 작은 대청 한 칸이 서향하여 있고, 서쪽으로 부엌 한 칸이 딸렸다. 굴뚝은 온돌방 동쪽 밖에 독립하여 서 있으며, 온돌방 앞에는 아주 작은 쪽마루가 놓였다. 기단 없이 네모 화강석 초석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납도리,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내각을 조직하던 당시에 쓰던 돗자리와 나무의자가 있고, 대청마루 처마 아래에는 '組閣堂' 현판이 걸려 있다. 본채와 조각당 주변에는 지형을 따라 가꾼 정원과 산책로가 있다

 

 

 

 

 

 

 

 

 

 

 

 

 

낙산은 역사적으로 서울의 형국을 구성하던 내사산(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중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주산인 북악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되어 서편의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과 대치되면서 조선왕조의 수도로서의 한양 입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양의 경계로서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성되었다. 고려시대에 수도를 남경(南京)으로 정하여 새 궁을 앉히면서 지형의 형세에 따라 구역의 한계를 동쪽은 대봉(大峰), 서쪽은 기봉(崎峰), 남쪽은 사리, 북쪽은 면악으로 하였다.

인터넷에 예쁜집으로 소개 된다는데 저는 몰랐습니다.

 

 

 

 

낙산의 동쪽 비탈에 비우당이라는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다. 비우당(庇雨堂)은 조선의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살던 집으로, 이수광은 이 집에서 '지봉유설'을 지었다고 한다. 비우당은 아주 작은 초가집으로, 조선 사대부의 청빈함을 느낄 수 있다. 본래 비우당은 이수광의 외가 쪽 5대조인 유관이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 한다. 유관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냈던 사람으로 당시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선초 삼청(鮮初 三淸:조선 초 세 명의 청백리)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가 죽자 세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흥인지문으로 나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청백리 유관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집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자 유관은 방에서 우산을 펴고 지내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산이 없는 집은 비가 오면 어찌 견디겠소?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욕심없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 일화로 당시 이 터에 있던 집을 우산각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이수광의 아버지가 집을 물려받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이수광이 다시 짓고 비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비우당(庇雨堂)이란 근근이 비를 가리는 집이란 뜻이다. 이수광 역시 청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 한다. 이수광이 죽은 후 조선의 선비들은 이수광과 비우당의 청빈함을 배우기 위해 이 집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과거 때가 되면 지방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선비들이 이 비우당을 찾았다고 한다. 비우당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비우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청계천의 다리 이름이 비우당교라 불리기까지 했다.

 

비우당 뒤에는 자주동샘이라 불리는 작은 샘이 있다. 지금은 물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는데 이 자주동샘이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정순왕후는 15세에 단종과 혼례를 치루고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삼촌이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사육신의 난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는데 이때 정순왕후의 나이 18세였다.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청룡사 부근에 정업원이라는 초가를 짓고 천에 염색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그때 정순왕후가 이 샘에서 빨래를 했는데, 빨래를 하기만 해도 신기하게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샘을 자주동샘이라 부르고, 이 일대를 자줏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주동샘 옆의 바위에는 한자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세조는 정순왕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정업원 부근에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는 집을 지어 주었지만 정순왕후는 끝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정업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은 뒤 60년을 넘게 정업원에서 머물다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922년(고려 태조 5)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하고 비구니 혜원()을 주석하게 하였다. 도선()이 왕건의 아버지 왕륭()에게 고려 건국의 예언과 함께 이()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를 억누르기 위해 개성 주변에 10개의 절과 전국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절도 그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1036년(정종 2) 만선()이, 1158년(의종 12) 회정()이, 1299년(충렬왕 25) 지환()이 각각 중건 또는 중수하였다.

1456년(조선 세조 2) 단종이 죽은 후,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 절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귀양가서 죽은 영월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1771년(영조 47)에 영조가 절 내에 정업원구기()라는 비석을 세우고, 동망봉이라는 친필 표석을 세워 단종을 애도하였는데, 이때부터 절 이름을 정업원이라 불렀다. 1813년(순조 13)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묘담()이 중수하였다. 1823년(순조 23)에는 순원왕후()의 병세가 깊어지자 부원군인 김조순()이 이 절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왕후의 병이 나은 뒤 김조순이 절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었다. 1853년(철종 4)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중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꾸준히 불사를 진행하였으며, 1954년 비구니 윤호()가 대부분의 건물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알려졌다. 건물로 대웅전과 심검당·우화루·명부전·산신각·요사 등이 있다. 대웅전 내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불은, 철원의 심원사() 천불전에서 옮겨온 것이다. 정업원구기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2층으로 구성된 건물로 총 21칸의 강당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우화루는 청룡사가 창건 당시 부터 있었으며, 현존 건물은 1960년 9월에 윤호스님과 현 주지스님인 진우스님에 의해서 중창된 건물이다.

 우화루의 우화의 뜻은 원래 부처님이 인도 영치산에서 법화경을 설법을 하실때에 하늘에서 꽃비가 냐렸다는 경전의 이야기에서 연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현재도 각 사찰마다 우화루나 설법전은 법회나 강의를 하는 곳이다.

또한 청룡사의 우화루는 단종왕이 영월로 귀양갈 때에 왕비 송씨와 하룻밤을 청룡사에 지내시고 애끊는 이별을 나누었는데 , 이때에 하늘도 슬퍼하여 꽃비가 흩날렸다는 의미도 있다. 

청룡사에는 귀양길에 나선 단종과 왕비가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우화루(雨花樓)가 있다. ‘꽃이 비처럼 흩날리듯 쏟아졌다’는 뜻의 우화루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한 장소라는 의미로 ‘영리정(永離亭)’으로 불렸다. 이후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는 뜻의 ‘영미정(永美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업원터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가 아침 저녁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죽은 단종을 추모했다고 합니다.  동망봉 아래에는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며 일생을 거처한  정업원이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었으며  후에 영조임금이 이 자리에  송씨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도 건립했다고 합니다. 비각 현판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1972년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6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80평생을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살던 곳이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으로 무익공계 양식이며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비각 안에는 '정업원구기'라고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정순왕후는 서울 동대문숭인동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가 아침 저녁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죽은 단종을 추모했다고 하는데, 동망봉 아래에는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며 일생을 거처한 정업원이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원래 정업원은 창덕궁에서 멀지 않은 성 안에 있었으나, 1771년(영조 47)에 성 밖인 동대문 밖에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송씨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도 건립했다. 비각 현판 글씨는 영조의 친필로 '전봉후암어천만년()'과 '정업원구기세신묘 9월 6일 음체서( )'라고 씌어 있다

이 낙산 부근에는 정순왕후의 흔적이 더 남아 있다. 정순왕후가 영월로 유배된 단종을 그리며 매일 올라가 동쪽을 바라보았다는 동망봉이 있고, 정순왕후가 불가에 귀의했던 절 청룡사도 있다. 청룡사에는 지금도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석이 있다. 이는 영조가 친히 글을 썼다는 영조의 친필 비석으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는 정업원 옛터라는 뜻이다. 영조는 단종을 위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켰는데, 이 청룡사에 와서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친히 비문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 자리가 이곳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정업원구기비는 청룡사 화장실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 작은 문을 열고 나가면 볼 수 있다. 비각 안에 있어 비석을 볼 수는 없다.
또 동대문 밖 청계천에 영도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에도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정순왕후도 궁을 떠나 이 영도교까지 같이 온 뒤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다시는 단종을 만나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다리 또는 영도교(永渡橋)라 불렀다고 한다. ‘영도(永渡)’라는 다리 이름은 영원히 건너갔다는 뜻이라 한다.
또 예전에는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다녔던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장도 정순왕후와 관련이 있다. 정순왕후가 청룡사 부근에서 곤궁하게 살자 부녀자들이 채소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정순왕후를 찾는 부녀자들이 늘어나자 조정에서 이를 금지시키자 부녀자들이 영도교 부근에서 아예 채소를 팔다가 몰래 정순왕후를 찾아가 채소를 바쳤다고 한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생긴 시장이 바로 금남의 채소시장이라 한다.

재밌는 중국집 간판,허나 진작 주인은 과일 가게를 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집 간판 떼어 낼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거죠.

성북구 보문동6가와 종로구 숭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청룡사 동쪽에 솟은 산봉우리이다. 단종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거처하며, 단종을 위하여 매일 조석으로 이곳에 올라 와서 동쪽으로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영조 47년(1771)에 정업원구기비를 세우고, 이 봉우리 바위에 ‘동망봉(東望峰)’ 석자를 친필로 새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낙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한 지맥이 뻗어 숭인동 58번지 일대에서 95m 높이의 산봉을 이루고 있다. 즉 성북구 보문동6가와 종로구 숭인동 사이 청룡사앞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이를‘동망봉’이라 부른다. 이는 조선시대 어린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멀리 강원도 영월로 귀양가 있을 때, 단종왕비 송씨가 청룡사에 살면서 매일 이 산봉우리에 올라가 동쪽의 단종이 있던 영월을 바라보았다 하여 봉우리 이름을 동망봉이라 하였다고 한다.영조 47년(1771) 6월 왕이 이곳에 거둥하여 친필로 쓴.정업원구기비.를세우고, 동망봉 바위에도‘東望峯’이란 3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이 글씨는 일제 때 이곳이 채석장이 되면서 깎여져 없어졌다. 지금은 주위가 주택가로 변하여 바위산 봉우리의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도시근린공원인 숭인공원으로꾸며져 많은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단지 보문동6가 주민들이 매년 음력10월 초하룻날에 동망산신각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어 그 애절함을 이어오고있다.

 


 

 

 

東望亭은 조선 6대왕 단종이 그의 숙부 수양에 의해 영월로 귀양을 가서 죽음을 당하자,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현재 청룡사 자리인 정업원에서 시녀와 함께

지내면서 매일 동쪽인 영월 쪽을 바라보며 망왕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여 동망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 종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음.

 

 

강경대군을 추모하는 글입니다.

웬지 가슴이 짠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