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스크랩] 아름다운 사람들 5

tkaudeotk 2016. 1. 4. 17:06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47년(진덕여왕 1) 자장(慈藏)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였으며, 

그 때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한다.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에 실화(失火)로 소실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狼川縣)에는 비금사(琵琴寺)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가 매우 더러워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와 같은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전후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그 신이함을 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종연(宗演)·광학(廣學)·각동(覺洞)·영희(靈熙)·법찰(法察)·

설흡(雪洽) 등이 중건을 서둘러 790년에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이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 다시 불탔으므로 승려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深源寺)라고 개명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 법당·극락전·벽운루(碧雲樓)·선승당(禪僧堂)·동상실(東上室)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부속 암자로는 동암(東庵)·원명암(元明庵)·백련암(白蓮庵)·오세암(五歲庵)·

봉정암(鳳頂庵) 등이 있었으며, 동훈·준희 등의 뛰어난 고승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네 번째의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동하(洞下) 30리쯤 되는 곳에 선구사(旋龜寺)라고 개칭하고,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웠다.

그러나 14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447년에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金時習)이 부속 암자인 관음암(觀音庵)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던 

1455년(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愼悅) 등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칭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에 타서 승려들은 흩어졌지만,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 등과 인법당(因法堂)을 짓고 심원사(尋源寺)라 개칭한 뒤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香閣)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최붕과 설담(雪潭)이 절을 중건한 1783년(정조 7)이었고, 

이 때의 백담사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출처 : 오오 산이좋아!
글쓴이 : 사명대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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