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푸름을 더해 가는 싱그럽고 청량한 5월은 서성이는 여름입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햇빛에 반짝이는 연둣빛 이파리는 앙증맞은 새순과 함께 고운 빛을 발하지요.
산과 들을 지나 봄기운을 머금고 불어오는 남실바람은 온 천지에 향긋한 꽃 내음을 실어 나르느라 분주합니다.
*신록(新綠)에서 *취음(翠陰)으로 이어지는 이 계절은 일 년 중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때입니다.
수필가 이양하(李敭河, 1904~1963)도 ‘신록예찬(新綠禮讚)’에서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綠陰)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라며 아름다운 이 계절을 노래한 바 있습니다.
내가 김을 매지 않는 이유
예전에 필자는 조그마한텃밭을 일구던 적이 있었는데 좀처럼 밭에 김을 매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생전 처음 시골로 내려왔을 당시에는 산과 들 그리고 논과 밭이 온통 초록인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수필가 이양하가 ‘신록예찬’에서 표현한 대로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는 말이 꼭 제가 하고 싶은 얘기였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와 제 처는 5월초가 되어 고추 모종을 얻어다가 어설픈 실력(?)으로 나름 정성을 다해 밭에 내다 심었습니다.
한두 달쯤 지나자, 고추밭 고랑에 풀들이 무성해졌습니다.
비가 온 다음 날이면 고랑의 풀들은 더욱 청청하게 초록빛을 뽐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어른 한 분이 제게 “거, 밭고랑에 김을 매 주지 그래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밭고랑의 풀을 뽑으라’는 얘기인 줄은 알았지만, ‘풀을 뽑으라고 하면 되지 왜 김을 매라고 할까?’
궁금해졌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김’은 ‘논밭에 난 잡풀’이란 뜻이 있고,
‘매’라는 단어는 ‘매만지다’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잘가다듬어 손질함’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김을 매다.’라는 말은 ‘논밭에 난 잡풀을 잘 가다듬어 손질하다.’라는 뜻이 있는 것이었지요.
그것도 모르고 철없던 우리부부는 비 오는 날이면, 차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서서 거실 현관의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농작물과 잡초가 한데어우러져 경쟁하듯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풀 뽑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 텃밭을 바라보며좋아라’ 했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은 농부의 눈으로 볼때, ‘ ‘초록 사랑’에 흠뻑 빠진 우리 부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보였을까?’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도 여전히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나무 그늘과 버팀목
초록으로 가득한 들판과 텃밭을 바라보다 문득 가만히 앉아 텃밭을 둘러싼 크고 작은 나무들을 보니 부모님 생각이 났습니다.
부모님은 나무 그늘입니다.
어떤 나무는 내리쬐는 강한 햇빛을 가릴수 있게 무성한 잎으로 커다란 그늘을 드리웁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삶에 지쳐 피곤해할 때 시원한 나무 그늘을드리웁니다.
지난해 초여름이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을걷다가 남원의 한 작은 마을인 인월마을 어귀에 있는 당산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었습니다.
어느 작가는 제가걸었던 인월마을에서 금계마을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평생 딱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이 길을걷겠네!”라고 읊조릴 만큼 멋진 풍광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초여름이라고는 하지만 길손이 되어 뙤약볕을 걷다가 쉴 만한 나무 그늘 아래 앉았더니,
솔솔바람이 불어와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등줄기를 따라 흐르던 땀을 금세 식혀 주었습니다.
이처럼 큰 나무는 시원한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해 줍니다.
또한,어떤 나무는 심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살랑이는 간들바람에도 부러질 듯이 서 있어 버팀목이 없으면 쓰러질 것같은 연약한 나무도 있습니다.
이 나무는 버팀목에 의지해 마침내는 홀로 설 준비를 합니다.
부모님은 버팀목입니다.
우리가 고단한 삶에 지쳐 쓰러지려 할 때 버팀목이됩니다.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심긴 작은 나무들은 버팀목에 의지한 채 언젠가는 성목이 될 꿈을 꾸며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듬성듬성 심긴 연약한 나무들은 *탱주(撑柱)에 기대어 거센 바람을 이겨 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생길에서 부모님의 존재는 마치 나무 그늘과도 같아서
자식에게 그 그늘 아래서 달콤한휴식을 맛보게 해 주시고,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또한, 부모님은 버팀목과도 같아서 피곤하고 지친 우리인생에 언제나 커다란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풍수지탄(風樹之嘆)
가정의 달! 5월입니다. 5월이면아이들 중심의 행사가 많이 열립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과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는기회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나옵니다.
한번은 공자(孔子)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울음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가 보니 고어(皐魚)라는 한젊은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우는까닭을 물었더니,
“저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나무는 고요히 서 있고싶어 하나 바람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 싶어 하나 그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흘러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월이고, 돌아가시면 다시 뵐 수 없는 것이 부모님입니다.”라며 탄식했습니다.
<한시외전>에 전하는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往而不可追者年也 去而不見者親也
수 욕 정 이 풍 부 지 자 욕 양 이 친 부 대
왕 이 불 가 추 자 년 야 거 이 불 견 자 친 야
풍수지탄은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가리키는 말로서
우리에게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효도를 다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십계명에서는“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애굽기 20장 12절)며 부모를 공경하도록 명하고 있으며,
지혜자 솔로몬도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언 23장 25절)고 훈계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녀들아 너희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장 1~3절)며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은 한결같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강조합니다.
현세대는 부모님에 대한 존경이나 권위가 예전 같지 않아 매우 가슴이 아픕니다.
늙고 병든부모, 외로운 부모를 돌보고 경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자녀들에게 있음을 기억하고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는5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록(新綠)이 취음(翠陰)을 향해 치닫는 이 계절에 부모님을 공경하는 우리의 마음도미성숙의 ‘연록’에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진록’으로 더욱 짙어 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신록(新綠): 늦봄이나 초여름에 새로 나온 잎의 연한 초록빛
* 취음(翠陰):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
* 탱주(撑柱): 물건이 쓰러지지 않게 받치어 세우는 나무
박재만 편집국장
2015 May 5 월간 가정과 건강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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