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길라잡이

김치 유산균은 최고의 셰프

tkaudeotk 2015. 5. 10. 21:25


담근 후 30~50일 ‘젖산’ 내놓으며 새콤하고 톡 쏘는 김치 만들어



새콤한 김칫국물에 멸치 육수를 섞고 설탕과 식초, 참기름을 적당히 넣은 뒤 

국수를 말아 먹는 김치말이국수는 한겨울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별미다. 

살얼음이 동동 떠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저 국수만 맛있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은 김치와 김치로 만든 모든 음식이 가장 맛있을 때다.


‘가장 맛있다’는 말은 매우 주관적이다. 

사람에 따라 갓 무친 겉절이나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시큼한 묵은 김치를 좋아할 수도 있다. 

여러 해 장독에서 묵힌 뒤 조리해 먹는 ‘묵은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김치에 아무런 조리도 하지 않고 먹을 때 많은 사람이 가장 맛있다고 말하는 시기가 분명 있다. 


경험적으로는 11~12월 김장을 담근 뒤 30~50일이 지난 바로 요즘이 그때다.

그런 ‘공감’이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김치는 익어가면서 초기, 적숙기, 과숙기, 산패기 등 4단계를 거친다. 

각 단계는 유산균 양과 분포, 산도, 젖산 농도 등에 따라 구분된다. 

김치를 처음 담근 때를 초기, 유산균 활동이 가장 활발할 때를 적숙기라고 부른다. 

그 뒤엔 유산균 분포가 바뀌고, 산도(pH 농도)가 낮아지며, 젖산 농도가 올라가는 정도에 따라 과숙기와 산패기로 구분한다. 

각 단계 가운데 김치가 가장 맛있을 때는 적숙기다. 

이때 김치는 달고 시원하며, 적당히 새콤할 뿐 아니라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톡 쏘는 뒷맛까지 감돈다.


이처럼 김치는 처음 담갔을 때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맛이 더해진다.

특히 김치 특유의 ‘신맛’이 중요하다. 서로 겉돌던 양념이 배추 속에 배어들고, 

유산균이 개체 수를 늘리며 활동하면 발효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아는 맛있는 김치가 만들어진다. 

이때 유산균이 내놓는 ‘젖산’은 김치 맛을 더해주는 물질이다.



지금이 가장 맛 좋을 때


김치 과학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처음 김치가 만들어진 뒤 가장 먼저 활동하는 유산균은 이형발효유산균이다. 

이형발효유산균은 발효 과정에서 서로 다른 두 물질을 내놓는다. 

웨이셀라 균과 루코노스톡 균으로, 이들은 김치에 들어 있는 영양분을 흡수해 젖산뿐 아니라 탄산도 만든다. 

적숙기 김치가 새콤하면서도 ‘톡’ 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적숙기 김치는 맛뿐 아니라 영양 측면에서도 매우 우수하다. 

이 시기 김치에는 유산균이 g당 1억 마리가 넘게 있는데, 이 수치는 고농축 요구르트 속 유산균 마릿수와 비슷하다. 

게다가 김칫국물에는 더 많은 유산균이 들어 있다.


적숙기가 지나면 웨이셀라 균과 루코노스톡 균의 활동이 줄어들고 동형발효유산균인 락토바실러스 균이 많아진다. 

동형발효유산균은 오로지 젖산만 만드는 유산균이다. 

이때부터는 탄산이 주는 톡 쏘는 맛이 사라지고 신맛만 남는다. 

젖산이 과하게 분비돼 산패기에 이르면 김치에서 오래 묵은 젓갈마냥 ‘쿰쿰한’ 냄새가 난다. 

산패기 김치는 날로 먹기 어렵고 보통 끓여서 찌개나 찜을 한다. 

신맛을 내는 주범인 젖산은 122도 이상으로 가열하면 젖산염으로 변해 신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비타민C는 가열하면 파괴되는 반면, 김치 유산균은 가열 후에도 살아 있는 유산균과 비슷한 효능을 보인다. 

과숙기와 산패기에 많은 유산균인 락토바실러스 균은 열에 의해 죽어도 생균과 마찬가지로 설사 방지 효과를 낸다. 

어떤 시기에 어떤 방법으로 먹어도 좋은 ‘슈퍼 푸드’라 할 만하다.

유산균은 장내 미생물 중 유익균으로, 체내에 번식하는 미생물이지만 

30대 이후 장내 미생물 분포가 변할 때부터 음식 등으로 섭취하면 좋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유산균을 섭취하려고 하면 난관에 빠진다. 요구르트와 김치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미생물은 기본적으로 열에 약하다. 미생물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단백질이 열에 의해 쉽게 변형돼 미생물은 주로 날것에 많다. 

각종 채소나 익히기 전 육류, 생선 등에 많이 분포한다. 

이 미생물 중에는 유산균 같은 ‘좋은’ 미생물도 있지만 비브리오, 살모넬라 같은 식중독균도 있기 때문에 

‘고기는 푹 익혀서’와 같은 조리 주의사항이 반드시 곁들여진다.


김치는 이와 다르다. 

‘김치가 식중독을 유발할 수 있으니 반드시 끓여 먹어야 한다’거나 ‘깨끗한 물에 잘 씻어야 한다’ 같은 주의사항이 없다. 

오히려 김치는 물에 씻으면 유산균 또한 씻겨나간다. 

김치가 유산균 ‘밭’이 된 비밀은 조리 과정에 있다.

김치를 담그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배추를 소금에 절인 뒤 배추 조직이 연해지면 고춧가루와 무, 마늘, 생강, 파, 젓갈 및 소금을 넣어 만든 양념과 버무린다. 

그 뒤 0도에 가까운 온도에서 보관한다. 

김치를 맛있게 담그기 위한 이 조리법은 사실 모든 과정이 유산균을 번식하게 하는 밑거름이다.



환상적 재료 조합 흥미로운 음식



김치를 담그기 전 배추에는 이미 온갖 미생물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로 아무리 씻어내도 열을 가하지 않는 이상 미생물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우리 선조는 배추를 소금에 절임으로써 가열하지 않고도 배추 속 미생물이 죽도록 했다.


물론 김치를 담글 때 채소를 소금에 절이는 이유는 뻣뻣하고 단단한 조직을 연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삼투압 현상을 이용해 배추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에서 수분을 빼내 조직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 

눈여겨볼 것은 이때 무너지는 것이 배추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배추에 살던 미생물 또한 세포막 안쪽에 있는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죽게 된다.


그러나 유산균은 다르다. 

염분에 약한 다른 미생물과 달리 유산균은 호염성균으로 염분을 만나도 잘 죽지 않는다. 

이 때문에 소금에 절인 배추에서 다른 미생물은 대부분 죽고 유산균만 남는다. 

남은 유산균은 배추와 양념에 들어 있는 각종 영양분을 이용해 개체를 늘려간다. 

특히 배추나 고추에 포함된 당은 미생물에게 탄소원으로, 

젓갈에 들어 있는 동물성 단백질은 질소원으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수족관에 갇혀 있다 바다를 만난 물고기마냥 유산균은 다른 미생물이 차지하던 빈 공간을 메우면서 

김치를 유산균이 잔뜩 들어 있는 건강식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치에는 식물성 영양분(채소)과 동물성 영양분(젓갈)이 동시에 들어 있다. 배추에는 칼륨이 많고, 고추와 파에는 비타민A가 많으며, 

그 외에도 생리작용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칼슘, 인, 각종 비타민도 많이 들어 있다. 

이 영양분의 일부는 유산균이 활동하는 데 쓰이지만 대부분은 유산균과 함께 섭취되면서 인체에 유용한 영양분이 된다. 

게다가 유난히 각 재료 간 궁합이 좋다.

우리나라 사람이 김치를 먹을 때 가장 걱정하는 점은 ‘나트륨 과다 섭취’다.

짠맛을 내는 나트륨은 고혈압 같은 성인병의 원인으로 꼽힌다. 

2011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하루 평균 나트륨 섭취량은 4791mg으로 

세계보건기구(WHO) 하루 권고량인 2000mg의 2.4배에 달한다.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다시 소금을 이용해 양념 밑간을 하는 김치는 한때 우리 국민 나트륨 섭취의 주범으로 지목받았다.



2013년 12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13대한민국 김치문화축제’ 참석자들이 

조선시대 팔도 김치를 왕에게 진상하던 모습(왼쪽)과 김장김치 담그는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다른 의견도 나온다. 영양의학적으로 볼 때 나트륨은 칼륨과 연관해 바라봐야 한다. 

칼륨은 나트륨이 소변으로 배출되도록 돕는 물질로, 

나트륨을 많이 섭취해도 칼륨을 많이 먹으면 소변을 통해 나트륨을 배출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칼륨이 채소, 과일에 많이 들어 있는 영양소라는 점. 당

연히 김치 주재료인 배추, 무, 고추, 마늘에도 많이 들어 있다. 

세계김치연구소와 송영옥 부산대 교수팀이 2011년 발표한 임상실험 결과에 따르면 

김치를 많이 먹는 사람(70g/일)과 적게 먹는 사람(15g/일)의 혈압은 두 집단 다 큰 차이가 없었다. 

김치를 많이 먹는 사람의 경우 나트륨 섭취량이 많은 만큼 배출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김치에 고추를 넣으면 소금 섭취량을 줄이는 구실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일본 도쿄대 기무라 슈이치 교수는 고추에 들어 있는 매운맛을 내는 성분인 캅사이신을 준 쥐와 

주지 않은 쥐가 소금이 든 음식을 먹는 정도를 비교한 연구를 발표했다. 

그 결과 캅사이신을 많이 투여한 쥐일수록 소금이 든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선조가 김치에 고추를 넣은 것은 소금을 구하기 어려웠던 과거 우리나라 상황에 기인한 면이 있다. 

그 덕에 소금을 적게 쓰고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게 됐다.


여기에 김치, 특히 김장 김치가 맛있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김치의 중심이 되는 배추는 본래 저온 작물로, 22도보다 높은 온도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 

여름이 끝나고 서늘한 가을 날씨가 돼야 제대로 자라는 채소인 것이다. 

실제로 여름에 자란 배추는 가을 김장 배추보다 잎 수가 적고, 무게도 덜 나가며, 당도도 떨어진다. 

“가장 맛있는 배추를 1년 동안 먹으려고 김장을 한다”는 어르신들 말씀이 빈말이 아닌 셈이다.


김치는 흥미로운 음식이다. 

생재료를 환상적인 궁합으로 조합해 경험적으로, 게다가 과학적으로 한 번 조리한 음식인데, 

이를 이용해 또 수많은 음식을 만든다. 

갓 버무린 날김치는 수육과 함께 먹고, 새콤하게 신 김치는 잘게 썬 뒤 밀가루와 함께 버무려 눈이나 비 오는 날 김치부침개로 만든다. 

시시때때 식탁에 오르는 김치찌개는 일상 식량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김장 김치가 겨울철 차가운 공기 속에서 가장 적절히 익은 지금은 시원한 김칫국물을 한 국자 떠 쫄깃한 국수를 말아야 하지 않을까. 

김치가 유일한 비타민 공급원이던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오이를 곁들여서 말이다


오가희 과학동아 기자 sol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