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나는 걷는다 돈이 없어서

tkaudeotk 2014. 10. 14. 16:29


"차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그 또한 기미 낀 얼굴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다." 

7년 전 텔레비전에 방영된 한 화장품 광고에 나온 말이다. 

2년 전에는 서울 도심 버스정류장에 이런 광고 문구가 붙었다. 

"날은 더워 죽겠는데 남친은 차가 없네."

 한 음료 회사가 내건 이 옥외 광고물은 "자동차가 아닌 마시는 차를 지칭한 것이다"라는 

업체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누리꾼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혀 금세 철거됐다. 

젊은 층에게 '자동차 소유 여부'는 뜨겁고 민감한 소재였다. 


하지만 이런 세태가 최근 바뀌고 있다. 
'뚜벅이'를 자연스럽고 떳떳하게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경기 불황의 영향이 크지만, 승용차를 '못' 가지기보다 '안' 가지기로 결심한 이들도 상당수다. 
보행, 대중교통, 자전거, 카셰어링 등 다양한 대체 이동 수단에 만족하는 이들에겐 자동차 말고도 
'지름신'을 맞이할 다른 소비재가 널렸다. 

20~30대의 자동차 수요 감소 현상은 여러 통계에서 드러난다. 
지난 9월 한국자동차산업협회가 발표한 '연령별 승용차 신규 등록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상반기 20대, 30대의 승용차 신규 등록량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10.2%, 6.9% 떨어졌다. 

40대는 소폭 감소했고(-0.8%), 50대는 오히려 증가했다(0.9%). 운전면허를 따는 젊은이 수도 줄었다. 
2005년과 2013년 연령별 운전면허 소지자 통계를 비교해보면 8년 사이 다른 연령층은 모두 운전면허 소지자가 증가한 반면 
22~37세는 연령별로 2만~19만명씩 그 수가 감소했다(36쪽 표 참조). 
국내 대표 자동차업체인 현대자동차의 고객 연령층 자료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현대자동차 승용차를 구매한 20대 고객의 비중은 9%로, 2011년 11.8%에 비해 2.8%포인트 감소했다.
 30대의 비중은 27.6%에서 21.4%로 감소 폭이 더 컸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동차를 포기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이다.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박수만씨(가명ㆍ29)는 4년간 몰고 다니던 중고 경차를 재작년 다시 중고 시장에 내다팔았다. 
대학 시절 원거리 통학용으로 차를 마련해 유용하게 잘 사용했지만 직장에 취업한 이후에도 학자금 대출을 갚는 등 
기본 지출이 많다 보니 보험료, 유류비 등 다달이 나가는 차량 유지비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있다가 없어지니 행동반경이 좁아져서 불편함이 크다"라면서도 박씨는 당분간 자동차를 구입할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 

젊은이들이 차에 대한 선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의 2010년 보고서
 '국내 20대 자동차 수요 영향 요인 분석:한ㆍ일 비교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생은 30~40대에 이른 예전 대학생에 비해 
여전히 자동차 구매 의향이 높게 조사됐다. 
이들은 자동차의 '자유로운 이동'과 '프라이버시' '자기표현' 등의 매력을 높이 샀다. 

ⓒ시사IN 신선영 카셰어링 업체 쏘카(SOCAR)의 회원 수는 33만명이다. 90%를 차지하는 주 고객이 20~30대다.


"차는 갖고 나가는 순간 돈이잖아요" 

하지만 이들은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중소기업 직장인 김수인씨(가명ㆍ28)는 

"버스 막차를 타고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다가 '내 차'에서 맞는 바람은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하곤 한다"라면서도 

차를 구입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차는 갖고 나가는 순간 돈이잖아요."

 김씨 말에 따르면 또래들 가운데 차를 끌고 다니는 경우는 집이 굉장히 부자이거나 아버지가 오래 몰던 승용차를 물려주거나, 둘 중 하나다. 

비교적 초봉이 높은 대기업에 입사한다 해도 새 차를 뽑는 경우는 극소수라고 했다. 

김씨는 "우리 또래는 대부분 비싼 주거비를 치르며 좁은 월세방에 산다.

 자동차는커녕 차를 둘 곳조차 변변찮은데 어떻게 감히 보험료, 주차비, 기름값, 자동차세가 들어가는 차를 살 생각을 하겠나?"라고 되물었다. 

뚜벅이 생활을 하다가도 가정을 이루는 과정에서 대개 차를 마련한다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 단계 또한 잘 참고 견딘다. 

올가을 네 살 연상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윤선미씨(가명ㆍ27)는 결혼 준비 과정에서 '자차'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

 도시 근교의 가구거리에서 혼수를 마련할 때나 예단과 함을 들일 때 차가 없으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씨 부부는 향후 최소 2년간은 차를 구입할 생각이 없다. 

신혼집 전세 대출금을 갚기도 빠듯한데 자동차 구입ㆍ유지비까지 감당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윤씨는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는 최대한 참아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 윤씨처럼 자녀가 태어난 후부터는 차량 구입을 고려할 수 있다는 의견이지만 

그 첫 출산 시기 역시 점차 뒤로 미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1993년 27.55세이던 산모 평균 초산 연령이 지난해 31.84세로 4년 이상 늦춰졌다). 

자동차 액셀을 밟던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버스와 지하철, 도보와 자전거 도로로 향하고 있다. 

2000년 59.5%이던 서울시 대중교통 분담률은 2010년 64.3%로 증가했다. 

지하철 분담률이 1996년 29.4%에서 2010년 36.2%로 늘었고 같은 기간 승용차 통행 대수는 465만 대에서 449만 대로 줄었다. 

도보 및 자전거 통행량은 연평균 2.8%로 여러 이동 수단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차를 소유하지 않고 공유하는 카셰어링 서비스도 2012년 처음 국내에 등장한 이후 꾸준히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카셰어링 대표 업체 그린카와 쏘카 회원 수(각각 34만명, 33만명)의 90%를 차지하는 주 고객은 20~30대다. 

1년 전부터 카셰어링 서비스를 이용하는 직장인 손병주씨(31)는 

"교통망이 좋지 않은 지방에 가거나 부모님 댁에서 반찬을 갖고 온다거나 할 때 차가 없으면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한 달에 몇 번 되지 않는 그때를 위해 비싼 차를 사서 유지하느니 필요할 때 잠깐씩 이용할 수 있는 

카셰어링을 이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라고 말했다. 

직장인 문다혜씨(30)도 고3 시절 수능시험을 치르자마자 운전면허를 땄지만 

지난해까지 묵혀두었다가 올해 처음 카셰어링 서비스를 이용하며 '장롱 면허'를 탈출했다. 

자기 차를 갖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문씨가 차 구입을 포기한 주요 이유는 '다른 취미 생활을 위한 비용' 때문이다.

 베이킹, 재봉틀질, 커피 내리기 같은 취미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구와 재료들 값이 만만치 않다.

 IT 기기 신제품에도 관심이 많고, '해외 직구'에도 적극적이며 종종 여행도 가야 한다. 


청년들의 탈(脫)자동차 현상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장기 불황ㆍ인구고령화로 인한 청년층 실업률 증가와 소득 감소를 한국보다 먼저 겪은 일본은 
자동차 내수시장 규모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직전 770만 대에서 2011년 420만 대로 매우 위축됐다. 
일본 자동차공업회가 18~24세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면허 취득자 중 실제로 운전하는 비율이 1999년 74.5%에서 2007년 62.5%로 감소했다. 

자동차업계 자구책이 변화에 맞설 수 있을까 

'자동차의 나라'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4월 미국의 한 자동차 시장조사 기관은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18~34세의 비중이 
2008년 금융위기 이전에 17%였다가 2012년 11%로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미시간 대학 교통조사연구소는 지난해 미국인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운전한 거리를 분석한 결과, 
2009년에서 2011년 사이 16~34세의 누적 운전거리가 23% 감소했다고 밝혔다. 
반면 대중교통 이용률과 자전거 통근율은 각각 40%, 24% 상승했다. 

자동차 업계로서는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쌍용자동차 홍보팀 황수택 사원에 따르면, 자동차 시장에서 20~30대 고객은 정보 수집 채널이 많고 
구매 의사 결정 단계가 위 연령층보다 복잡한, 한마디로 '까다로운 고객층'이다. 
하지만 자동차 같은 고관여 제품(소비자가 다른 제품에 비해 더 많은 생각과 추론을 거친 뒤 구입을 결정하는 상품)은 
한번 사용했던 브랜드의 이미지가 긍정적일 경우 다시 구매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동차 회사로서는 초기 진입 고객인 20~30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황씨는 "근본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하고 가처분 소득도 증가해야 자동차 수요 역시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업계 자체만으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변화에 대응해 졸업ㆍ취업ㆍ창업ㆍ취직ㆍ출산 등 
청년의 생애주기에 따른 차별적 가격 할인 프로모션, 유예 할부ㆍ중고차 보상 할부 등 다양한 금융 상품 등을 개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차 홍보팀 권용준 차장도 
"2030 세대는 지금 소비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더라도 향후 주력 소비층으로 대두될 것이기 때문에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를 보고 이들과 꾸준히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전략을 연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동차족에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견인하기 위해 
그들이 즐기는 문화와 신기술을 자동차에 적극 융합하는 시도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기아차가 고객들에게 스마트키 기능을 탑재한 손목시계를 제공하는 등 자동차에 웨어러블 기기를 접목시키고, 
벤츠 생산업체 다임러가 카셰어링 사업 '카투고(Car2Go)'에 뛰어드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자동차업계의 자구책이 경기 불황과 인구 구조에 기인한 거대한 변화에 맞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 20대 인구의 본격 감소는 2020년쯤부터로,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