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탐구 통해 발견한 하나님은 ‘한과 구속의 하나님’…
‘통일원리’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타락, 복귀에 이르는 섭리 과정을 명쾌하게 해석한 것
일제강점기인 1935년은 한국 교회사에서 유난히 큰 변화를 겪었던 해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국권 탈취, 신사참배 강요로 신음했다.
현실에 타협하느냐, 탄압을 이겨내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여기에 러시아 혁명의 자극을 받은 좌익세력이 급속도로 세를 확산하면서 사상적으로도 큰 혼란에 휩싸였다.
당시 세계는 대공황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1933년 정권을 잡은 독일의 히틀러는 일본·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며 본격적인 군비확장에 나서는 등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어둠이 더 짙어진다고 했던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암흑기에 문선명 총재는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는 계기를 맞게 됐다.
문 총재는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1월 6일(음력)에 태어나 열여섯 살인 1935년 부활절에 하늘로부터 소명을 받았다.
‘인류 구원’과 ‘세계평화 실현’이라는 모토를 걸머지고 치열한 삶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12년 8월(음력) ‘제2의 혁명’을 위해 하늘나라로 떠난 문 총재는 짧은 기간에 세계 194개국 선교를 이루어내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수많은 단체 설립과 각종 대형 집회를 통해 인류의 갈 길을 제시하는 등 담대하게 역사를 일구어냈다.
일본은 1860년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해 급격히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열강의 영토 확장에 편승하는 한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승하면서 호시탐탐 한반도 침탈을 노리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내정간섭의 발판을 만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10년 끝내 합병조약체결을 강행함으로써 한반도를 식민화했다.
제국주의의 흉포한 창궐이란 세계정세에 적극 대처하지 못한 한민족은 장구한 역사와 정통성이 단절되는 치욕을 맛보았다.
그러나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한국 교회에는 변화의 바람을 맞고 있었다.
장로교의 길선주·김익두 목사,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가 주도한 기독교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활력소가 됐다.
그리고 몇몇 해외 유학파 신학도가 귀국하면서 새로운 신학 사조가 전파되는 등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특히 3·1운동 당시 33인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길선주 목사는 교인들에게 종말론과 재림사상을 가르침으로써 희망을 갖게 했다.
예수처럼 33세의 짧은 생을 살다간 이용도 목사는 새로운 영성운동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주장했다.
그는 교파를 초월, 가는 곳마다 은혜의 도가를 만들면서 부흥의 불길을 지폈다.
학문적 포부, 그리고 영적인 소명의식
선각자 이용도·길선주 목사가 1934년과 1935년 두 해에 걸쳐 세상을 떠나고 문 총재가 등장한 것은 섭리로 볼 때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이러한 급격한 전환기에 왜 문 총재에게 소명의 길을 제시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문 총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왔는가와 직결된다. |
문 총재는 10세 안팎의 어린 나이임에도 큰 꿈을 품고 있었다. 장차 위대한 박사가 되리라는 학문적 포부다.
1934년 봄, 그는 15세에 평북 정주의 오산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 비로소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물을 보는 눈이 크게 달라지고 가치를 판단하는 사고력도 성장했다.
자신의 포부와 희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위대한 박사가 되고 유명해지며, 소원대로 부족함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이 내게 있어 무엇인가? 더구나 저 숱한 불행한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나 하나의 성공이 다른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같은 회의는 결국 “우리 인간이 고통과 불행, 비극 속에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오랫동안의 고뇌 끝에 마침내 자신의 소명에 대한 자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통과 불행, 비극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후손에겐 영원한 이상향의 비전을 제시해야겠다는 결심에 이른 것이다.
그는 인생과 우주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고, 바로 그 시점에서 예수와 영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16세가 되던 해에 부활절 기도를 하는 가운데 홀연히 예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 무렵 내심 품고 있던 인류 구원사업의 소명에 대한 계시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학자 총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약관 16세가 되던 해에 선생님은 북한 땅에 있었고, 그때 심히 뜻 깊은 일련의 영적인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렸을 때 체험한 이 경험을 말로써 여러분께 다 표현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적인 세계가 돌연히 본인 앞에 펼쳐졌고, 선생님은 자유로이 그 영적인 세계에 속한 성현들과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땅 고요한 산중에서 선생님은 여러 번 예수그리스도와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1985년 10월 5일)
문 총재가 기도와 탐구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과 구속의 하나님’이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슬픔과 한을 품고,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한 눈물의 길을 걸어온 불쌍한 하나님임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문 총재는 한 평생 ‘하나님 해방’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치열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문 총재가 세계인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통일원리’라는 새로운 진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 ‘통일원리’를 토대로 세상을 지도하고 하나님의 성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이후 ‘통일원리’를 구명(究明)하고 ‘통일사상’을 정립하는 작업은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일본 유학시절, 그의 하숙방 책상 위에는 줄이 빼곡히 쳐진 한국어·일어·영어판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근본진리의 방대한 체계를 잡는 과정은 곡진한 기도와 정성을 통해 이뤄졌다.
그리하여 찾아낸 진리를 성경이나 종교·철학·역사·과학 등 관련 서적을 통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연한 논리로 체계를 세웠다.
하나님 섭리의 전말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고자 기독교의 뿌리를 파헤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은 무정하고 무자비 했다는 것이 문 총재의 회상이다.
하나님이 동정해주면 사탄의 참소가 뒤따르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것을 개척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창조원리’의 핵심은 ‘참가정’의 실현
문선명 총재가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인간과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수년간 몸부림의 기도 끝에 얻은 답은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父子)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 후부터 ‘하나님은 부모요, 인간은 자녀다!’라는 말이 언제나 사상의 중심어로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한평생 주창해온 ‘참사랑의 철학’이 정립된 것이다.
문 총재가 ‘통일원리’의 근간이 되는 <원리원본> 집필을 시작한 것은 피란수도인 부산에서였다. ‘
하나에서 전 존재로’라는 서두로 시작되는 <원리원본> 집필작업은 1950년 5월부터 대략 1년이 걸렸다.
‘통일원리’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연필로 기록해놓은 <원리원본>을 토대로 7년 후인 1957년 <원리해설>이 나왔고,
다시 10년 만인 1966년에 마침내 <원리강론>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원리강론> 서문(18쪽)에는 진리를 찾아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시다.
이분은 수십 성상을 두고 역사 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넓고 넓은 그 무형세계를 헤매시면서
하늘만이 기억하시는 진리 탐구의 피어린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인간으로 걸어야 할 최대의 시련의 길을 다 걷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종적인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원리를 아셨기에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영계와 육계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의 수많은 성현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원리강론>은 창조원리와 타락론, 복귀원리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고,
이 세 부분 이외에도 인류역사종말론,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부활론, 예정론, 기독론, 재림론을 다루고 있다.
‘통일원리’의 가장 핵심이 되는 창조원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 창조 목적, 무형실체세계(사후세계)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창조원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 목적은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여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참가정’을 실현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드리는 데 있다는 원리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성성상의 본체인 하나님이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실체적으로 전개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또 인간은 지상에서의 천국을 누리다가 육신을 벗고 무형세계인 천상천국에 가서 영생하게 된다고 본다.
타락론에서는 우리 인간의 모순과 불행의 원인인 죄의 뿌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혔다.
죄악세계를 청산, 선의 세계를 실현하는 방안의 제시다.
즉 인간의 시조는 미완성기에 사탄의 유혹에 빠져 불륜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사랑의 질서를 올바로 세워 참가정을 실현할 때 비로소 이 땅의 이상세계가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종말론에서 언급된 ‘말세’는 문자 그대로의 세상의 끝이 아니다.
죄악의 권세가 무너지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선의 세계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대전환기요, 소망의 시대로 본다.
따라서 인류역사는 구원섭리이자 복귀섭리이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완성한 지상천국으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귀원리는 타락세계를 창조본연의 세계로 회복함으로써
사탄에 빼앗겼던 인간을 다시 찾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오랜 기간에 걸쳐 중심인물을 세워
단계적으로 구원섭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과 복귀섭리의 원칙을 자세히 풀어놓았다.
‘통일원리’, 종교연합운동 대안사상으로 자리매김
이렇게 ‘통일원리’는 기독교인들이 난해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타락,
그리고 복귀에 이르는 모든 섭리적 과정을 명쾌하게 기술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특히 무신론과 유물론에 무력했던 기존 종교와 교리의 한계를 극복했다.
과학적, 논리적 근거를 통해 가치관 부재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체계적이고 명확한 신관과 인생관,
역사관과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문선명 총재의 ‘통일원리’는 당시 종교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신학자인 고 서남동 전 연세대 교수는 1969년 10월 13일부터 3일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신학공개강좌에서
‘통일교회 원리강론의 비판적 연구’라는 논문을 중심으로 <원리강론>을 언급했다.
민경배 현 백석대 석좌교수는 당시 분위기를 <한국기독교회사>(대한기독교출판사, 491쪽)에 기술해놓았다.
“서남동 교수의 통일교 연구는 현대 한국 교회에서 보기 드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서 교수는 기왕의 한국교회에 세계의 첨단적인 문제 신학을 재빠르게 소개해서 신학의 현대적 이해에 기선을 잡았던, 총명하고 부드러운 신학자였다.
그는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가리켜 ‘지금까지의 한국 신학계가 산출한 신학서 중에서 그 양에 있어서나,
그 조직력에 있어서나, 그 상상력과 독창성에 있어서 최고의 것’이라 평가했다.
나아가 ‘방금 세계 교회의 갱신 기풍과 새로움에 대한 요망을 앞지르고 있다’고 하는 헌사를 바쳤다.”
1968년 9월 9∼10일, 서울 우이동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신흥종교연구모임에서도 ‘통일원리’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다.
이 자리는 크리스천아카데미 원장인 강원룡 목사와 김재준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 홍현설 감리교신학대 학장,
안병무 중앙신학대 학장 등 40여 명의 기독교계 지도자에게 처음으로 ‘통일원리’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문 총재는 “언젠가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면서
“이번 기회를 계기로 신흥교회와 기성교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높은 장벽을 헤치고 서로 이해하면서
하늘이 요구하는 크나큰 섭리의 길에 한마음이 되어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일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이날 ‘통일원리’ 전·후편 4강좌를 들은 강원룡 목사는
“통일교는 기성교회와 성경 해석상의 어프로치가 다를 뿐 기독교로 본다.
기성교회는 성경을 연역적으로 해석하는 데 반하여 통일교회는 귀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같은 자리에서 홍현설 학장은 “통일교회의 원리 가운데 최후의 심판이 말씀(진리) 심판이라고 한 점은 타당한 논리다.
이 말세론적 신앙이 위기의식에 싸인 현대인에게 호소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 후로 개신교 2천여 명의 목회자가 ‘통일원리 공청회’에 참석하는 등 교계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관심은 해외 성직자들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1985년 4월부터 1988년 7월까지 14차에 걸쳐 미국 성직자 7800명이 한국을 방문해 ‘통일원리’세미나에 참석했다.
지금도 한학자 총재는 ‘통일원리’를 중심으로 우리 시대 최대 현안인 종파 간 갈등을 해소하고 종교연합의 대안사상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 활동은 세계적으로도 큰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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