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어: Reinhold Messner 레인홀드 메스네르[*],
히말라야의 8,000미터 이상 고봉을 의미하는 14좌를 최초로 모두 정복하였다.
특히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을 홀로 무산소 등정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1970년 낭가파르밧을 시작으로 1986년로체에 오르면서 8000미터 이상 고봉을 모두 등정했고
그 뒤에는 등반 경험을 바탕으로 20권이나 되는 저술을 남겨
세계 최고의 산악인인 그가 마라톤을 했다면?
산을 웬만큼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한창 산에 빠져 있을 때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내게 있어서 이 지구상에 현존하는 사람 중에서 수십 년 동안
나의 의식을 강렬하게 붙잡고 있는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지금까지 세계 해발 8천 미터 이상 14좌를 오른 사람은 20명도 넘지만,
그만큼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산악인은 없다.
세계 최초로 14좌를 모두 등정한 것은 물론 그만큼 산에 관한 책을 많이 저술한 산악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자유로운 영혼’ ‘검은 고독 흰 고독’ ‘제 7급’ ‘도전’ ‘죽음의 지대’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 등,
그가 저술한 책 중 꽤 여러 권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
에게는 高山과 巨壁 등반에 도전하는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뿐만 아니라 그
목숨을 건 등반행위에 대한 깊은 철학과 통찰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8천 미터 이상 14좌를 모두 오른 산악인이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오은선, 김재수 등
5 명이나 있을 정도로 산악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상당한 결핍감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명성이나 업적에 값할만한 고산 등정에 관한 뛰어난 저술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산악인들의 매스너와 다른 등반스타일 때문인 것 같다.
메스너는 이탈리아 동북부의 알프스 산맥 자락인 반데스에서 태어났다.
수직에 가까운 표고 차 천 미터 전후의 거대 암벽이 즐비하고
빼어난 절경을 거느린 도로미테 山群에서 어릴 때부터 산을 즐겼다.
이미 20대에 알프스 산맥의 3대 거벽은 물론 웬만큼 악명 높은 암벽은 거의 다 등정했다.
그의 거벽 등정 기록은 엄청나다.
초등한 루트도 수 없이 많고 등정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그렇게 20대에 알프스 산맥에서는 더 이상 도전할 벽이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산악인이 되어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히말라야 8천 미터 이상 고봉에 도전한 산은 해발 8,125m 낭가파르밧이었다.
그것도 다른 산악인이 오른 기존 루트가 아니라 히말라야 8천 미터 이상 고봉 중에서
가장 난이도와 악명이 높은 루팔벽을 통해 올랐다.
루팔벽은 표고 차 4천5백 미터에다가 평균 경사도가 60도나 되는 거벽이다.
그 당시 그는 세계 최초로 그의 동생 퀸터와 함께 그 루팔벽을 거쳐 정상에 등정했다.
베이스캠프까지만 포터의 지원을 받고 그 다음부터는 단 한 명 셀파의 지원도 없이 정상을 등정했다.
철저히 알파인 스타일인 것이다.
이 알파인 스타일은 고난도의 등반 기술, 고도로 단련된 체력을 바탕으로 등정하는,
산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가장 자연친화적인 등반 방식이다.
8천 미터 이상 고봉도 거의 무산소로 등정한다.
이러한 등반 스타일은 정상 등정을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는 등정주의가 아니라
등정하는 코스의 난이도를 중시한다고 해서 등로주의라고도 한다.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데 등반의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때문에 이런 등반 스타일에는 자연과 등반에 대한 상당한 철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반면 우리나라 세계적인 산악인들이 추구한 등반 방식은 거의 하나같이 등정주의였다.
오로지 정상 등정에 최고의 목표를 둔 것이다.
이 등반방식은 엄청난 물량공세를 기본으로 한다.
8천 미터 이상 히말라야 고봉 하나를 등정하는데 한 달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다.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공격 루트를 개설하고 고소 적응 훈련을 한 다음에야 최종적으로 정상 등정에 나선다.
또한 오르는 코스도 대부분 많은 산악인들이 등반한 normal 루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격루트를 개설하고 정상 등정을 하는 데 있어서 셀파의 도움은 거의 절대적이다.
때문에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이 등반에 동원되고,
그러다보니 베이스캠프는 물론 정상으로 오르는 등반 루트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오염이 가속화된다는 보도가 언론에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일례로 에베레스트 등정의 성수기 때는 그 곳 베이스캠프에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의 시장바닥이라 하지 않는가.
그만큼 인적 물적 지원을 많이 받기 때문에 알파인 스타일에 비해
같은 8천 미터 이상 고봉을 등정한다 하더라도 등반의 난이도나 질은 훨씬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메스너의 등반방식과 너무 비교가 되는 것이다.
메스너는 무 산소, 무 셰르파, 무 스폰서를 그의 히말라야 고산 등정의 원칙으로 삼았다.
게다가 이 같은 방식으로 세계 최초로 세계 8천 미터 이상 14좌를 완등 했다.
물론 이러한 상이한 등반 방식은
매스너와 한국 산악인들이 태어나 자란 환경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은 산이 전체 땅의 70%가 넘는 산악국가라 하지만,
3천 미터 이상의 고봉이나 1000미터 전후의 수직 거벽이 즐비한 알프스 산맥 주변국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껏 해야 해발 2천 미터도 안 되는 한라산이 최고봉이고,
암벽이라고 해 봐야 북한산 인수봉 정도가 최고다.
거기에 설악산 토왕성 3단 폭포가 그나마 히말라야 고산 등정을 위한 최상의 적응훈련 빙벽 코스다.
이런 산악환경조건에서 쌓은 등반 테크닉이나 체력을 가지고
메스너처럼 8천 미터 이상 고봉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한 무리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후반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악인들이 추구했던 등반스타일인
등정주의가 전적으로 우리나라 산악이 지니고 있는 환경적인 요인에 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메스너가 히말라야 8천 미터 이상 고봉에 도전할 때
몇 개월 동안 얼마나 치열하고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가를 그의 저서를 통해 확인해보면,
매스너와 우리나라 산악인들의 등반 역량이나 질이
이미 훈련과정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해발 8천 미터 이상 고봉 등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인생이라 말할 만큼,
그는 온 몸과 마음을 준비과정부터 집중시켰다.
거의 날마다 한 시간 이상 달리를 하고, 집에 있을 때는 아침마다 냉수 샤워를 했다.
그 달리기도 가볍게 하는 조깅 수준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현지에 가보지 않아 정확하게 얼마의 거리가 되는지 모르지만,
해발 표고차가 1000미터나 되는 보젠에서 제네지엔까지의 산길을 쉬지 않고 달려
한 시간 이내에 주파할 정도였다 한다.
표고차가 1000미터라면 경북 구미 금오산 등반고도보다도 훨씬 높다.
그 정도면 우리나라 초고수 산악마라토너도 결코 쉽지 않은 굉장한 스피드다.
그는 그렇게 수개월에 걸쳐 격렬한 트레이닝을 했다.
평상시 알프스 1000미터 전후의 거대 암벽에 도전할 때보다도 훨씬 고난도의 특수 트레이닝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루에 4시간에 걸쳐 컨디션 트레이닝을 하면서 영양 섭취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고기는 먹지 않고 주로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과일과 우유와 마늘을 많이 먹었다 한다.
얼마나 격렬하게 장기간에 걸쳐 훈련하며 음식조절을 했으면
낭가파르밧 루팔벽을 오를 때 그의 체중이 64kg밖에 되지 않았겠는가.
맥박도 1분에 42회였다고 한다.
그의 신장이 180cm 정도인 것을 감안할 때
그 체중은 거의 세계적인 마라터너들의 몸매에 가까웠을 것 같다.
맥박도 그 정도면 우리나라 엘리트 마라토너나 마스터스 초고수들의 수준에 가깝다.
그 가벼운 몸과 강인한 체력, 게다가 알프스 거대 암벽에서 갈고 닦은 기량을 바탕으로
그는 표고 차 4,500미터, 평균 경사 60도의 낭가파르밧 루팔벽을
최대한 스피드로 치고 올라가 기어이 정상을 등정하였다.
물론 정상 등정 후 기상 악화로, 같이 등정했던 동생 퀸터를 하산과정에서 잃고
그도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는 못하는 악전고투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기도 했지만, 그의 등반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산악인들이
거의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초인적인 경지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 메스너가
세계 8천 미터 이상 14좌에 한창 도전하던 당시의 가장 왕성한 체력을 갖고 있을 때 마라톤에 도전했다면
얼마만큼의 기록을 낼 수 있었을까, 몹시 궁금하다
. 왜 5년 전인 2007년 11월에 거행된 뉴욕 마라톤대회에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이 도전하지 않았던가
. 그는 서브-3 기록인 2시간 59분36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마라톤이 끝난 후 그는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런 말을 했겠는가.
사이클로 다져진 강인한 하체에다가 몇 달에 걸쳐 마라톤 훈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겨우 서브-3 기록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의 신장은 공교롭게도 매스너와 비슷한 180cm였고 체중은 75kg이었다 한다.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거의 군살이 없는 날렵한 몸매인데도 의외로 체중이 많이 나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히말라야 낭가파르밧에 도전할 당시 메스너의 체중은 64kg에 불과하였다.
랜스 암스트롱에 비하여 무려 11kg이나 가벼운 것이다.
매일 한 시간 이상의 달리기와 크로스컨트리 훈련으로 표고차가 1000미터나 되는 산길을
1시간 내에 주파할 정도로 단련된 주력에다가 그 정도의 날렵한 몸매라면,
몇 달에 걸쳐 장거리 훈련을 해 줄 경우 모르긴 몰라도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 40분대는 아주 가볍게 뛸 수 있었으리라 예상한다.
한 걸음 더 나가 아예 마라톤으로 전향했다 해도
그는 몇 년 내에 세계적인 마라토너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도 해 본다.
아무튼 그는 그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었다.
오은선이 여성 최초로 세계 8천 미터 이상 고봉 14좌 완등의 마지막 산인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여 귀국길에 올랐을 때,
메스너는 오은선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네팔 카투만두까지 급히 비행기를 타고 달려오기도 하였다.
오은선과 함께 찍은 사진이 중앙 일간지에 크게 실리기도 하였다.
이미 70에 가까운 나이에다가 긴 수염과 봉두난발의 그는 흡사 인자한 산신령 할아버지 모습 같기도 하였다.
신이 그에게 부여한 능력이 얼마 만큼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의 몸과 정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위대한 사람.
그는 산에 그의 육체적 에너지를 다 쏟아 부었고
, 책에 그의 정신적 에너지를 다 쏟아 부었다.
그처럼 열정적으로 한 세상을 산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만 생각하면 저절로 겸손해진다.
그는 몸이나 정신이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만큼 우뚝 솟아있는 큰 산이기 때문이다.
가져온 곳:http://blog.daum.net/lsryong60/865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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