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人 평화를 말하다-비폭력 평화주의자 간디[1] 참 종교인의 신앙생활 실천한 정치인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인도의 영적인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그는 사회평화, 종교평화를 외치며 종교인보다 더 종교인다운 생활을 했던 정치인이자 영적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0.2~1948.1.30)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이다.
‘마하트마’는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부른 이름으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국민들이 간디를 영적인 스승으로 인정하며 이름을 ‘마하트마 간디’로 부르게 됐다.
간디는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 채식을 하고, 진실을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을 했지만 비폭력을 주장했다.
아울러 해탈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이러한 간디의 사상과 투쟁, 삶의 방식은 크게 ‘아힘사(불살생)’와 ‘사티아그라하(진실관철투쟁)’ ‘브라흐마차리아(금욕)’로 정리된다.
이러한 간디의 사상에는 종교의 경전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간디의 종교관에는 부모의 종교력이 바탕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간디의 부모는 불교 자이나교 승려들과 교류를 하고, 음식을 나누기도 하는 트인 시각을 가진 힌두교인이었다.
이에 간디는 “라지코트(고향) 나는 힌두교의 모든 종파와 여러 자매 종교에 대해서 관대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됐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는 힌두교가 편협한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 간 평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디는 “배타적인 신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성경‧코란 등 경전들은 모두 신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믿는다”며
“세계의 모든 예언자들이 존중받아야 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각자의 종교를 존중해주고 그 경전을 통해 해당 종교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는 ‘바가바드 기타’라는 힌두교 경전을 늘 지니고 묵상했으며,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고 본받을만한 가르침을 배워 실천에 옮겼다.
그는 특히 불교의 살생금지에 대한 내용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불경을 보고 “고타마의 자비를 보십시오. 그것은 인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어깨 위에서 즐거워하며 앉아있는 어린 양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사랑으로 넘치고 있습니까”라고 감탄했다.
불경의 영향으로 그의 아힘사 사상이 나타나게 됐다는 견해가 많다.
반면 초창기 간디는 기독교인들의 행태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다.
간디는 자서전을 통해 선교사들의 배타적인 선교를 예로 들었다.
“그때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학교 가까이의 거리 모퉁이에 서서 힌두교도와 그들의 신에 대해 욕설을 퍼붓곤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꼭 한 번 서서 들은 일이 있었는데, 그 한 번만으로 다시 들을 생각이 없어졌다.
같은 무렵에 어떤 유명한 힌두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말을 들었다.
읍내에 돌아다니는 말로는, 그는 세례를 받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그 복장을 고쳐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이 모든 것이 내 속에 기독교를 싫어하는 생각을 불어넣었다.”
종교人 평화를 말하다-비폭력 평화주의자 간디[2] “비폭력 ‘평화’의 목적은 ‘인류의 구원’”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그러나 간디는 성경을 접하면서 선교사들의 행태가 성경의 메시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평화의 사상을 성경에서 찾게 된다.
“(구약성서와는 달리) 신약성서는 매우 다른 인상을 주었고 특히 산상설교는 사뭇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그것을 ‘바가바드 기타(힌두교 경전)’에 견주어 보았다. …중략…
나의 어린 마음은 ‘기타’의 가르침과, 샤말바트의 ‘아시아의 빛’과 산상설교를 하나로 통일해 보려 했다.
내버림이야말로 종교의 최고의 경지란 생각이 내 마음 속에 강하게 울려왔다.”
그는 이후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에 ‘신약성서’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대로 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사상을 곧잘 인용했다.
간디의 자서전에는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내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나온다.
“복수는 달콤하지만, 용서는 거룩하다. 다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것은 비폭력이 아니다.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을 사랑할 때만이 그것이 비폭력이다”라고 강조했다.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는 카우라바와 판다 바 가문과의 갈등과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기타’에서는 세상 혹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 정의(dharma)와 불의(adharma)의 대립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아르주나는 전쟁을 포기하고 출가 수행자의 길을 택하고자 하지만
조언자 크리슈나는 구원과 해탈의 길이 세속과 사회적 의무를 등지는 데만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세속 가운데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행동으로 ‘신’을 실현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이에 간디는 사상만을 연구하기보다 실천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간디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집중했던 것은 비폭력을 의미하는 ‘아힘사’이다
. 아심사는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에서 강조한 아힘사는 살생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himsa’와 금한다는 뜻의 부정접두사 ‘a’의 합성어이다.
아힘사는 불살생(不殺生), 불상해(不傷害) 그리고 비폭력을 뜻한다.
간디는 진리인 ‘신’에 다다르는 종교적 덕목으로 ‘아힘사’를 생각했던 것이다.
아힘사를 통해 간디가 이루고자 소망했던 목적은 인류의 구원이었다.
아힘사를 통해 결국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면 인류가 구원을 얻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가장 견고한 철이 충분한 열을 요하듯이 가장 굳은 마음도 비폭력의 충분한 열 앞에는 녹는다.
비폭력의 열용량은 가장 위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것은 최상의 법이다. 이것 하나만으로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다.”
종교人 평화를 말하다-비폭력 평화주의자 간디[3] “하나님 마주하려면 ‘자기정화’ 이뤄야”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인도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돌변해 인도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했고, 영국은 맨손으로 독립을 외친 인도인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1930년대에는 대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영국이 ‘소금법’을 만들어 인도에 소금을 비싼 가격에 팔아치웠다.
간디는 하루 60㎞씩 걸어가 직접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소금행진을 벌였다.
많은 인도인들은 간디의 운동에 동참했고, 영국은 간디를 감옥에 가뒀다.
간디는 단식을 시작했고, 간디의 건강상태를 다룬 언론보도 때문에 영국은 마지못해 석방했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과 인도인의 사람다운 삶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는 행동하는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진리를 향한 갈급함으로 가득했고, 실천에 옮김으로 힘이 실렸다.
“내가 절대의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는 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 상대적 진리를 굳게 잡는 수밖에 없다.
이 상대적 진리가 그때까지는 나의 등대요, 나의 작은 방패요, 나의 큰 방패다.”
간디는 참 진리를 궁극적인 ‘신’ 즉 하나님이라 여겼다.
또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신’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봤다.
이 과정에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울러 실천에 필요한 요건을 ‘자기정화’로 봤다.
“마음이 정결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신(진리)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정화’라는 ‘삶의 모든 행동의’ 정화를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정화는 매우 감화력이 높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정화는 필연적으로 이웃들의 정화를 선도한다.
완전한 정결에 이르려면 생각과 말과 그리고 행동에서 정욕을 완전히 초월해야 하고,
사랑과 미움, 애착과 염증의 상반된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
이 때문에 그는 금식을 중요시했다. 음식을 절제하며 이뤄지는 기도에 초점을 맞췄다.
몸을 절제함으로 하나님과 더욱 긴밀한 교제를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또 간디는 구원을 위해서 갖춰야 할 덕목으로 ‘무소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관리인과 같이 행해야 한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소유나 평등관은 심정의 변화, 태도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청천백일같이 내 마음에 명확해졌다.”
자아정화를 통해 주변을 정화하려 했던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운동은 1947년 8월 15일 광복으로 결실을 맺었다.
200년 동안 지속된 영국 통치에서 벗어난 것.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반쪽짜리 광복이었다.
영국은 인도인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로 나눠 별도로 협상을 진행했고, 이 때문에 결국 인도는 둘로 분리된 독립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힌두교인 인도와 이슬람교인 파키스탄이다.
간디는 계속되는 종교분쟁을 없애고자 종교 간 화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간디는 종교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간디의 행동이 이슬람교를 두둔한다고 오해한 열성적인 힌두교도의 총에 맞아 1948년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http://www.newscj.com 강수경 기자 | ksk@newscj.com <저작권자 © 뉴스천지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환경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정부, 수산물 수입금지 해제 요구 (0) | 2013.09.17 |
---|---|
북한산에 방사되는 멧돼지 (0) | 2013.09.17 |
돌아온 '녹조 라떼', 낙동강 식수원 위협 (0) | 2013.07.25 |
"반갑다 소똥구리"..23년만에 존재 확인 (0) | 2013.06.17 |
경기도, 범도민 폐휴대폰 모으기 추진 (0) | 201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