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예전에는 손님이 찾아오면 꼭 밤참을 냈어. 막국수만 한 것이 없었지. 밀가루는 귀해서 생각도 못했고, 메밀로 국수를 뽑았어.
그런데 메밀은 찰기가 없잖아. 무릎 꿇고 엎드려서 녹진하게 치대야 해.
덩어리 덩어리 동그랗게 떼어 나무국수틀에 눌러 면을 빼내지.
반죽보다 중요한 것은 물 온도야. 팔팔 끓이지 않으면 퍼져서 죽이 되어 버리거든.
뜨거운 물에 들어간 면이 두 번째 올라올 때 건져 씻어야 해.
잽싸게 손을 움직여도 순메밀로 뽑은 면은 뚝뚝 끊어져서 올챙이국수처럼 수저로 먹어야 했어."
팔순을 앞둔 강원도 춘천의 최명희(79) 할머니는 잠시 창가를 내다보았다.
메밀에 얽힌 배고프고 기막힌 과거의 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에효, 모든 것이 다 귀했지. 밤에 뽑은 메밀국수를 남겨놨다가 아침에 손님 떠날 때 다시 대접했어.
화롯불에 맑은 장국 끓여서 면 넣고 뜨끈하게 상에 올리면 속 훈훈하게 먹고 길을 떠났지.
전날 술이라도 마셨으면 면수(메밀국수 삶은 물)를 드렸어.
간장 타서 훌훌 마시면 속이 뚫려. 지금 식당에서 내는 면수의 전통은 그렇게 이어진 거야."
할머니는 대를 잇고 있는 불혹의 아들을 든든하게 쳐다보면서도 고달팠던 시간들이 자꾸만 떠오르는 눈치였다.
어쩌겠는가, 그땐 그랬는걸. 시집오니 시어머니는 젊은데 입은 아홉이요, 땟거리가 없더란다.
식구들 굶기지 않으려고, 내 식구들 밥상 차려내듯 밤낮 모르고 밥장사를 했는데
그게 어느덧 44년. 세월은 가혹하여 새색시가 백발이 되었다.
어쩌면 강원도의 메밀음식은 할머니의 독백처럼 '한'이다.
의병활동하다 산으로 숨어들어 화전을 일궜던 산사람들이 장터로 들고 온 곡식이 메밀이었고,
서민들이 다랑이밭 천수답 농사에서 가뭄 들어도 두 달 지나 고맙게도 수확이 가능했던 작물이 메밀이었다.
기실 냉면과 막국수는 겨울에 먹어야 별미라고들 한다.
동치미가 제 온도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계절이 겨울이고 보면 겨울음식이 맞다.
하지만 김치냉장고의 등장으로 발효음식의 계절성은 모호해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난 여전히 여름 막국수가 좋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차가운 면은 냉면, 막국수, 밀면 세 가지다.
그 중 현대의 냉면과 막국수는 전분과 밀가루 등을 섞기도 하지만 메밀을 주로 쓰고,
부산 쪽에서 유명한 밀면은 진주식 해물육수에 밀가루 면을 쓴다고 보면 큰 테두리는 그어진다.
강원도권 막국수는 숙성 양념을 쓴 붉은 비빔면이다. 변수는 국물이다.
비빔을 기본으로 하는 막국수는 냉면보다 육수에 대한 관심이 덜하지만
여전히 동치미와 고기육수의 힘겨루기가 팽팽하다.
육수는 집안에 따라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꿩고기가 두루 쓰이고
동치미와 육수를 섞는 집, 오직 묵은 무만 고집해서 동치미를 담가 쓰는 집이 있다.
면은 메밀과 전분을 섞는데 메밀 함량이 많을수록 끈기가 덜하다.
간혹 순수 국산 메밀을 즉석에서 말아 주는 집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메밀 70~80%를 쓴다.
강원도를 돌던 이날도 주춤주춤 하루 두 끼를 막국수로 먹게 되었다.
춘천토박이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외갓집처럼 한옥을 그대로 살려 오목한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마루 기둥에는 거울이 걸려 있고 방마다 빈 상이 잔칫집처럼 많다.
으레 그렇듯이 막국수와 속 든든한 돼지고기 편육, 감자와 녹두전까지 시켜 놓고 탁주를 고민한다.
술을 부르는 편육 한 점의 애수는 커서 고기를 잘 삶느니, 삼겹살을 쓰다가 뒷다리 살로 부위가 바뀌었느니,
질겨졌다느니 말도 많고 집집마다 쉬쉬 하는 편육 삶기 비법경쟁이 치열하다.
심심하고 별 맛 없는 메밀면에 담백한 편육 한 점 싸 먹는 맛은 유별나기 때문이다.
국수에 풍미를 돋워줄 뿐 아니라 속도 든든히 채워 주니까.
미리 나온 면수를 홀짝홀짝 마신다. 붉은 빛이 돈다. 밍밍하지만 향이 짙다.
음식의 간이 세고 자극적인 것 투성이인 시대에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면수의 맛이 어떻게 사람들의 향수를 파고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마시면서 익숙해질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부침과 편육이 먼저 나왔다. 막국수가 나오기 전 고소한 전을 찢으며 세상 얘기 찧고 까부는 것이 국수집 재미이기도 하다.
시골어머니의 밥상이 생각나는 열무김치는 깊은 맛이 배어 있고,
배추김치는 고춧가루를 많이 넣지 않아 시원하며 아삭아삭 씹힌다.
막국수가 나왔다. 왜 대한민국의 막국수에는 모조리 김가루가 얹어지는지, 묵은 불만이 목젖까지 터져 나온다.
외양은 여느 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체로 양념은 양파와 배를 갈아 바탕을 잡고
여기에 물엿과 고추장, 간장, 설탕, 다진 마늘 등을 섞어 저온 숙성한 것을 쓴다.
갓 뽑은 면발 위에 양념을 두르고는 삶은 달걀이나 채소로 고명을 얹는다.
이곳 사람들은 막국수에 처음부터 육수를 흥건하게 부어 먹지 않는다.
퍽퍽한 면이 비벼질 만큼 육수를 넣고 기호에 따라 식초와 겨자를 곁들인다.
식초는 살균 효과가 있고, 메밀의 차가운 성질을 겨자가 잡아 주니 '찬 면' 집에는 꼭 따라다니는 강력한 기호다.
여기에 거개 동치미를 곁들이는 이유는 무가 메밀의 독성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음식이니 지금처럼 고명과 채소가 올라가는 호사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면만으로는 별 맛 없으니 양념에 비벼 먹거나 동치미에 말아먹는 속 편한 음식이었고,
고추장이 들어가도 속이 화르르 자극적이지 않다.
입으로 물면 툭툭 끊어져 냉면이나 쫄면처럼 강하지 않고 담백하며 고소하다.
수육 한 점을 면에 감아 씹으니 삼겹살의 감칠맛이 배어 막국수 맛이 더 담백하다.
비벼진 국수가 거의 바닥을 드러낼 즈음 육수를 부어 양념까지 싹싹 비워 마시고 나니 세상일 아무런 욕심도 생기지 않는다.
"막국수나 한 그릇 하세" 하는 이 욕심 없는 여름인사가 진정한 막국수의 마음일 것이다.
느리게 해찰할 새도 없이 국수가 나오자마자 붇기 전에 허위허위 젓가락질을 해야 하는 여름 밥.
문득 누군가에게 기별을 넣어 안부를 물어야 하지 않겠나. "덥지? 막국수 한 그릇 하세."
글 사진 음식평론가 손현주 marrian@naver.com
여행수첩
막국수만큼 개인의 기호가 크게 작용하는 음식도 드물 것이다.
강원 5대 막국수니, 7대 막국수니 손꼽는 맛집은 그래서 조심스럽다.
육수와 메밀의 함량, 편육 삶기에 따라 막국수로드는 '미식가 열전'이다.
동해안은 고기육수를, 춘천과 강원 남부는 동치미와 고기육수를 섞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지역은 다르나 고기육수를 쓰는 경기도 여주 천서리를 빼놓으면 섭섭하다.
계절맛집(지역번호 033)
춘천 '평양막국수'(257-9886) '샘밭막국수'(242-1712) '유포리막국수'(242-5168) '실비막국수'(254-2472)
'남부막국수'(256-7859) '부안막국수'(254-0654) '명가막국수'(242-8443),
그 외 지역 양양 '영광정메밀국수'(673-5254) '범부막국수'(671-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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