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역사기행 강화도 광성보 1

tkaudeotk 2019. 12. 1. 20:51













사적 제225. 1716(숙종 42) 강화 해안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적지이기도 하다.

여지도서(輿地圖書)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으며,

1726(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군관(軍官) 11, 사병 98, 돈군(墩軍) 18, 목자(牧子) 210인을 배치했고, 진선(鎭船) 3척을 두었다.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1871(고종 8) 4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 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875821,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40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2인치 정도의 대완구만 있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다.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조선과의 국교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국서문제로 인하여 결렬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이 보낸 국서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하던 ()’()’이 사용되어 조선을 불쾌하게 했다

조선은 국서를 고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흥선대원군은 실각하고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18754월 운요호를 비롯한 군함 3척을 동원해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측량과 함포시위를 벌였다

이후 8월에는 운요호를 제물포 앞바다에 정박시킨 후 보트를 동원해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하였다

초지진의 수비병들은 예고없이 침입하는 일본 선박을 공격하였다

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마찰을 원했던 일본에게 좋은 기회였다. 운요호는 즉각 초지진과 영종도를 공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일본을 경계하며 냉담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함 8척과 600여 명의 병력을 강화도 갑곶에 상륙시키며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강압이 거세지자 조선은 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가 관철된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조약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했지만

그것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함께 부산·원산·인천의 개항, 조선 연해 측량 허용, 일본인의 통상 활동 허가를 명시하게 한 것도 같은 의도에서였다

그 밖에도 개항장에서의 치외법권을 설정함으로써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불법 행위에 대해 조선의 사법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조선 광해군 10(1618)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되었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4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11:00부터 봉행된다.

이 광성보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이 잘 남아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 오기에 좋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과 돈대의 곡선 모양이 인상적이다.

 

* 좌 홍이포 - 포구장전식 화포로서 사정거리 700m이며 조선영조때 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 중간 소포 - 장전후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 300m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 우 불랑기 - 불랑기는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것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서 

                포1문에 다섯개에서 아홉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 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 광성 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5(1679)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 손돌목 돈대 - 이 돈대는 조선 숙종(1674-1729,재위)때 축조된 돈대이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처가 있었다

 손돌목돈대는 성곽 길이가 108m이고 고종 8(1871)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강화유수(江華留守) 서원리(徐元履)가 처음 축조한 군 사 요새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오두돈대와 화도돈대, 광성돈대를 관할하였다. 

이곳에는 군함 5척과 별장 아래에 군관 29인, 군병 100명, 돈군 18명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하였다.


광성보는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당시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 함대가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광성·초지·덕진·덕포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군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미국 극동 함대는 9인치 포와 8인치 포 등 약 80문(門)의 함포로 사격을 가했지만, 조선군은 정조준 조차 안되는 대포와 소포가 전부였으며, 

그나마 포환도 단순한 철환(鐵 丸)으로 공격력에서 현격한 열세에 있었다. 


때문에 광성보를 지키던 중 군장(中軍將) 어재연(魚在淵)을 위시하여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 군 관 이현학(李玄學), 어영초관(御營硝官) 유풍로(柳豊魯), 천총(千摠) 김현 경(金玄暻), 광성별장(廣城別將) 박치성(朴致誠) 이하 49인의 장사와 200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군은 미군의 무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인 무기를 가지고 분전하였으나, 

중상으로 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 하였다. 

미군은 맥키 중위 등 3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했을 뿐이 었다. 

신미양요 당시에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쌍충비각(雙忠 碑閣)을 보수, 정비하였다. 1971년 12월 28일 사적 227호로 지정되었다.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 5(1679)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대포는 홍이포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소포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 것은 불량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정의

음력 1020일을 전후해서 부는 바람과 추위를 손돌이라는 인물과 관련지어 설명한 설화.

 

줄거리

고려 때 뱃사공 손돌이 몽골군에 쫓겨 강화도로 피신하는 고려 왕을 모시게 되었다.

손돌은 바가지 하나를 물에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갈 것을 간언하나,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으로 오해한 왕에게 참수를 당한다.

죽은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손돌의 묘를 만들고 제사를 드렸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손돌목이라 부른다.

음력 1020일쯤 오는 추위를 죽은 손돌의 원혼이 바람과 추위를 몰고 온다고 하여, ‘손돌바람손돌추위라고 한다.

 

분석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음력 1020일경에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孫乭風]’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손돌이 죽은 장소를 손돌목[孫乭項]’이라고 하였다.

손돌목과 관련한 연구로는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손돌목의 유래를 살펴본 연구와

손돌전설을 풍신신앙(風神信仰)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전승하는 손돌전설의 유형을 분류하고

그 성격을 파악한 연구 그리고 문헌과 구전자료를 토대로 <손돌목> 전설에 내재된 민중 의식을 살펴본 연구들이 있다.

<손돌목>전설에서 풍신의 성격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시기에 전하는 내용과 현지에 남아 있는 묘비 그리고 구전되는 설화를 볼 때,

손돌목은 손돌이라는 인물과 관련해서 유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특징

손돌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인 전란은 고려, 임진왜란, 일본전쟁, 전란들로 그 의미가 퇴색되어 있다.

설화 전승 집단에게 있어 손돌목에 등장하는 전란은 역사의 혼란기인 어느 시기쯤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전승과정에서 많은 변이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전설의 증거물로 제시되었던 손돌추위와 손돌바람도 기상 이변과 주택, 피복 같은 제반 여건이 과거와 비교하여

월등하게 향상된 관계로 증거의 활용도는 약화될 것이다.

이에 비해 손돌목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중심으로, 바가지를 이용해 손돌목을 빠져나가는 형태의 이야기 위주로 전승될 것이다.

김포군에서 김포의 3대 얼로 손돌공의 충성심을 선정하여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앞으로 이 설화는 손돌의 충정을 돋보이게 하는 경향의 설화로 심화될 것이다.

 

집필

이영수(李瑛洙)/인하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손돌목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국립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