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한 건 아버지의 직업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오랜 시간 부모에 대해 침묵해온 임희정 아나운서가
평생 막노동과 가사노동을 하며 자신을 키운 부모의 삶을 말과 글로 옮긴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라는 제목의 글로
2019년 2월, 포털사이트 실시간검색어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저자는 부모를 물어오는 질문 앞에서 거짓과 참,
그 어느 것도 아닌 대답을 했던 시간들을 부끄러워하고 참회하며, 위대했던 부모의 삶을 이야기한다.
50년 넘게 그저 일당을 받고 공사현장으로 나가 일을 하는 노동자로 살아온 아버지에겐 오를 직급도 호봉도 없었다.
목숨을 걸고 저자를 위해 노동한 아버지는 50년 경력이지만 일흔이라는 나이만 남았다.
자신의 이름은 지워진 채 ‘희정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자기를 희생해 저자를 위해 밥을 지었다.
어머니가 평생 해낸 집안일과 평생 만든 음식들은 한 끼의 식사가 끝나거나 하루가 끝나고 나면 다 잊혀졌다.
그것은 자식인 저자가 한 가장 큰 망각이자 잘못이었다.
이처럼 저자가 마음에 맺힌 이야기들을 풀어내고자 시작한 글쓰기는 노동자의 삶과 부모의 생을 잘 기록해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고,
독자들의 응원을 통해 사명감과 의무감을 더하게 되었다.
부모의 삶을 쓰며 비로소 부모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저자는 자신의 결여가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졌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이 완성됐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누구에게도 좀처럼 쉽게 꺼낼 수 없었던 부모님과 그런 부모님을 헤아리지 못했던 마음을 고백한 후에야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 모든 아들과 딸의 이야기를 만나보게 된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잘 자란 노동자의 딸, 이제 부모의 삶을 말하고 쓰며 살아갈 것입니다
임희정 아나운서의 진실한 고백!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라는 제목의 글로 큰 울림을 준 임희정 아나운서.
그녀는 오랜 시간 부모에 대해 침묵해왔다.
가정통신문 학부모 의견란에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부모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줄 수 없는 부모를,
드라이브를 하거나 여행을 하는 일상의 여유를 함께 누릴 수 없는 부모를 부러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냐는 질문에 “건설 쪽 일을 하시는데요” 하고 운을 떼자마자 아버지는 건설사 대표나 중책을 맡은 사람이 됐고,
어느 대학을 나오셨냐 물어오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아도 부모님은 대졸자가 됐다.
부모를 물어오는 질문 앞에서 그는 거짓과 참 그 어느 것도 아닌 대답을 했다.
그는 그 시간들을 부끄러워하고 참회한다.
자신의 부모가 부족하지 않았음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들의 선명한 증거가 되고 싶었다.
이제 글로써 그 마음을 닦는다.
죄스러움도 슬픔도 원망도. 그는 말한다. “창피한 건 아빠의 직업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고.
이 책은 한 자식의 고백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에는 세상 모든 아들과 딸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 자식의 마음, 결국 모두의 이야기다.
임희정 아나운서가 탈고한 후 가장 첫 번째로 한 일은 자신이 쓴 책의 전문을 읽고 녹음한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부모에게 보내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따뜻한 음성 편지가 될 것이다.
“제 지난 생에 결핍과 가난이 많은 줄 알았는데 마음과 사랑이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부모님 덕분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쓰며 매번 감탄했습니다.
노동자의 삶도, 부모의 일생도, 자식의 마음도, 잘 한번 기억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다짐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_임희정
“부모의 일생도, 노동자의 삶도, 자식의 마음도 잘 기억해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위대했던 부모의 삶을 말합니다. 임희정 아나운서의 진실한 고백
2019년 2월, 겨울이 아직 머물던 시기,
며칠 동안 ‘임희정’, ‘임희정 아나운서’라는 검색어가 포털사이트 실시간검색어에 오르내렸다.
연애설도 사건사고도 아닌, 한 편의 글 때문이었다.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라는 제목의 글.
임희정 아나운서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글을 써 시민기자 자격으로 온라인상에 게재한 건 2017년부터였다.
그 이전의 그녀는 오랜 시간 부모에 대해 침묵해왔다.
글을 몰라 가정통신문 학부모 의견란에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부모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줄 수 없는 부모를,
드라이브를 하거나 여행을 하는 일상의 여유를 함께 누릴 수 없는 부모를 부러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냐는 질문에 “건설 쪽 일을 하시는데요” 하고 운을 떼자마자 아버지는 건설사 대표나 중책을 맡은 사람이 됐고,
어느 대학을 나오셨냐 물어오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아도 부모님은 대졸자가 됐다.
부모를 물어오는 질문 앞에서 그는 거짓과 참 그 어느 것도 아닌 대답을 했다.
그는 그 시간들을 부끄러워하고 참회한다. 자신의 부모가 부족하지 않았음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들의 선명한 증거가 되고 싶었다.
이제 글로써 그 마음을 닦는다. 죄스러움도 슬픔도 원망도.
그는 말한다.
“창피한 건 아빠의 직업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고.
길거리를 걷다 공사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분들을 보면 나는 속으로 생각이 든다.
‘저분들에게도 번듯한 아들이, 잘 자란 딸들이 있겠지?
그 자식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처럼 말하지 못했을까?
내가 했던 것처럼 부모를 감추었을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내가 증명하고 싶다.
평생 막노동과 가사노동을 하며 키운 딸이 아나운서가 되어 그들의 삶을 말과 글로 옮긴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생도 인정받고 위로받길 바란다. 무엇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모두의 부모가 존중받길 바란다.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나를 키워낸 부모의 생,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_본문 중에서
내 생의 이야기가 되어준 아비와 어미
자식의 인생을 자신의 희생으로 채워준 아빠와 엄마
무엇보다 나를 사랑해준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삶을 쓰며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갑니다
임희정 작가는 “나는 쓸 때마다 아팠고 쓸 때마다 건강해졌다”고 말한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시절을 돌아봐야 했고 그때의 부모 마음을 헤아려야만 했다.
원망하고 부끄러워했고, 부정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많이 울었고 오래 앓았다.
그래도 쓰고 나면 조금씩 나아졌다.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었지만 쓰고 읽고 퇴고하는 과정 안에서
‘나의 어머니 아버지는 정말 위대한 일상을 살아왔다’는 깨달음을 얻곤 했다.
그녀의 글을 온라인상에서 먼저 접한 독자들은 댓글로, 메일로 반성과 감사, 희망과 다짐을 보내곤 했다.
“저는 일곱 살 아들을 둔 마흔 살 가장입니다.
그리고 물류센터에서 노동을 하는 노동자입니다.
당신의 글을 읽고 눈물이 났습니다. 정직한 땀방울을 흘리는 당당한 노동자가 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 나이 서른다섯인데 아직까지 철없이 겉으론 아버지께 감사하지만 속으론 노동하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었어요.
별것 아닌 글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가치관이 흔들릴 정도로 파장이 큰 글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막노동을, 어머니는 20년 넘게 김치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계세요.
대학교 입학부터 주변에서 부모님을 물어보면 ‘건설업 하세요’ 하고 대답하던 게 아나운서님과 비슷해 많이 공감이 가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데 부끄러워한 제 자신이 미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도 어릴 적부터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열심히 살았어요.
아나운서님 글 읽고 마음의 짐이 좀 덜어진 거 같아요. 감사해요.”
“어려운 상황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유학생입니다.
제 부모의 꿈과 미래를 빼앗아 대신 살아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는데,
‘내 부모가 틀리지 않았음을 내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글쓴이의 마음이 너무 큰 위로가 됐습니다.”
마음에 맺힌 이야기들을 풀어내고자 시작한 글쓰기는 노동자의 삶과 부모의 생을 잘 기록해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고,
독자들의 응원을 통해 사명감과 의무감을 더하게 되었다.
글이 가진 힘을, 연대를, 희망을 보았다. 50년 경력인데 일흔이라는 나이만 남은 아버지,
자신의 이름은 지워진 채 ‘희정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어머니.
그리고 ‘부모의 노동으로 자라난 자식은, 부모도 노동도 아닌 자신만을 생각한다’고 고백하는 딸.
책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부모의 삶을 쓰며 비로소 부모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임희정 아나운서.
이 책은 한 자식의 고백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에는 세상 모든 아들과 딸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누구에게도 좀처럼 쉽게 꺼낼 수 없었던 부모님과 그런 부모님을 헤아리지 못했던 마음을 고백한 후에야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감’을 말하는 그녀를 통해 자식을 키우기 위해 견뎌내야 했던 부모의 삶도,
그 삶을 자신의 생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는 자식의 마음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임희정 아나운서가 탈고를 한 후 가장 첫 번째로 한 일은 자신이 쓴 책의 전문을 읽고 녹음한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부모에게 보내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따뜻한 음성 편지가 될 것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사춘기도, 방황도 투정도 나에겐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사달라고 조르는 것. 해달라고 칭얼대는 것.
아이의 언어. 청원의 말들. 사실 그것은 내가 부모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많이 생략했다.
아이가 말보다 침묵을, 요구보다 인내를 먼저 배웠다.
어린 나이에 어리광조차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힘겨운 부모의 삶을 일찍이 이해해버린 일은 참 슬프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 활기찼고 때때로 우울했다. 자라는 동안 아빠를 부정했고 다 자라고 나서야 인정했다.
서러운 만큼 부정하고 나니 어른이 됐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 p.37
아빠는 손에 종이와 펜을 쥔 날보다 못과 망치를 쥔 날이 훨씬 많았다.
무거운 벽돌과 시멘트, 철근과 나무판들은 매일 만졌어도 그 얇디얇은 종이 한 장 만질 날은 많지 않았다.
아빠의 직업은 그랬다.
하지만 그런 아빠에게도 수첩과 펜은 항상 필요했다.
그 수첩에는 하루하루 일한 날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일용직 근로자였던 아빠에게는 일한 날 수를 잘 적어두고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삶은 글자보다 숫자가 많았다. 그 숫자들이 차오를 때면 아빤 항상 나에게 불쑥 물었다.
“팔만 원씩 26일이면 얼마냐.”
“이백팔만 원이요.”
곱셈을 해드리고 나면 아빠는 기쁨도 슬픔도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고개 한 번을 끄덕이고 나가셨다.
아빠의 월급에는 감정이 없다.
--- p.30
가끔 아빠에게도 문자가 온다.
‘연락 바랍니다.’
‘연락 바랍니다.’
뭉툭한 손가락으로 이상하게만 자꾸 저 문구를 반복해 누르는 아빠.
나는 ‘연락 바랍니다’ 여섯 글자를 ‘딸아 보고싶다’로 읽는다.
부모님은 딸의 생각을 잊는 법이 없어서 잠이 안 올 때, 삶이 무료할 때, 일이 없을 때 정체 모를 문자들을 나에게 보낸다.
휴대폰을 보고 손가락으로 아무거나 눌러보며 딸의 마음을 콕콕 터치한다.
그 문자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쿡쿡 저려온다.
나는 가끔 엄마 아빠에게 답장을 보낸다.
‘엄마 사랑해요.’
‘아빠 건강하세요.’
온 줄도 모르고 확인도 못하는 그 문자를 부모님께 가끔 보내곤 한다.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고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내가 단념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잘못 누르는 문자로 딸에게 마음을 보낸다.
시간이 걸리고, 읽을 수 없기도 하고, 반복해 보내기도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나에게 보내는 문자
그리고 그 문자에 내가 답하는 마음.
그것이 내가 일흔의 부모와 문자를 주고받는 유일한 방법이다.
--- p.45
충분히 사랑받으면 결핍이 없어진다 했던가. 나는 나의 결여가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졌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래서 내가 완성됐음을 너무나 잘 알겠다. 나는 많이 사랑받았다.
아버지는 자기 목숨을 걸고 나를 위해 노동했고, 어머니는 자기를 희생해 나를 위해 밥을 지었다.
그 노동과 밥은 가난과 무지를 넘기 위한 부모의 피나는 노력이었다.
그런데 지나온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부모가 아니라 나’라고 이기적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혼자 크고 혼자 이뤘다 느꼈다.
부모는 걸림돌이 아니다. 걸림돌은 내가 주워 오는 것이다.
돌멩이는 훠이 훠이 던져버려야지 주머니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다.
무겁고 힘들고, 무엇보다 나를 축 처지게 한다.
--- p.132
엄마가 엄마로 애써온 대부분의 것들은 기억되지 않았다. 어김없이 반복되었고 티 나지 않았으니까.
계속한다고 줄어들거나 나아지는 게 아니라, 그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대로였으니까.
집 안의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있게 하기 위해 엄마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먼지는 쌓이지 않았고, 옷은 항상 깨끗해졌고, 냉장고는 언제나 채워져 있었다.
어떤 것이 보호되거나 지탱될 때, 어떤 이는 축이 나고 지쳐간다.
엄마가 평생 해낸 집안일과 엄마가 평생 만든 음식들은 한 끼의 식사가 끝나거나 하루가 끝나고 나면 다 잊혀졌다.
그것은 자식이 한 가장 큰 망각이자 잘못이었다.
--- p.189
어찌 됐건 내가 나의 부모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써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글이 가진 힘을, 연대를, 희망을 보았다.
가장 큰 공감과 위로는 그저 뻔한 대답이 아닌 자전적 담론임을,
‘나는 그랬다’고 꺼낸 한마디가 ‘나도 그랬는데’로 돌아오는 선순환임을 잘 안다.
너무 깊어 꺼내기 힘들었지만 팔을 뻗어 어딘가에 내놓았을 때,
박수 쳐주고 독려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부모님의 이야기를 쓴다.
--- p.246
그 현장은 하루일 때도 일주일일 때도 몇 달일 때도 있었기에 50년을 넘게 일했지만
아빠는 회사 주소도, 내선 전화도, 명함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직장으로 출근했다면 나는 그 회사로 가 숙제도 하고, 아빠 내선번호로 전화를 걸어 통화도 하고,
아빠의 네모반듯한 명함도 만져볼 수 있었을까.
내가 아빠를 부끄러워했던 건 아빠가 회사원이, 건설사 대표가, 사장님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긴 경력을 유일한 직업을 그 노동을 감추었던 지난 시간들 때문이다.
참회와 반성이 참 많이도 늦었다. 행여 누군가 아빠의 직업을 물어올까,
묻는다면 뭐라 대답해야 할까 망설였던 낯없던 시간들. 창피한 건 아빠의 직업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 p.261
[예스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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