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고백과 편지 글쓰기의 치유력

tkaudeotk 2019. 10. 9. 15:02

나에게만 털어놓는 감정 고백

내면에 감춰둔 언어 조절하는
고백으로 얻게 된 감사의 마음
수취인인 자신만 읽을 수 있어
직접 내면을 맑게 들여다본다



고백문 쓰기


누구에겐가 고백해본 적 있는가. 고백은 억눌러놓은 비밀의 범람이거나 의도적 호출이다. 

‘고백문 쓰기’는 내면의 언어 범람을 조절하는 ‘호수 만들기’와 같다. 

내면의 어둠에 감금해뒀던 어떤 기억이 빛을 보게 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기억이나 경험을 감금해놓은 이유는 뭘까. 

그것이 공개되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고 믿기 때문 아닐까. 

내적인 위기도 위기지만 사회적, 인간적 탈락이 더 큰 위협일 것이다. 

하지만 반전도 있다. 자신의 고백이 아닌, 타인의 고백을 듣는 것은 쾌감과 전율을 들깨운다.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말야’라고 듣는 순간, 

육중한 고기떼를 끌어올리는 안강망처럼 모든 신경줄이 그의 입 쪽으로 징발되는 느낌, 기억하는가.

비밀 없는 사람 있을까. 누구나 다 신체 깊은 곳, 췌장이나 비장처럼 자기만의 비밀 한두 개쯤 간직하고 산다. 

‘비밀’은 응축된 에너지여서 자신조차 알아보기 어렵게 숨어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자신에게 비밀 따위는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많다. 비밀은 어떤 면에서 자기모순적이다. 

숨어 있으면서 가장 숨어있기 싫어하는 이율배반적 에너지다. 

비밀은 폭발물처럼 늘 ‘터지는 순간’을 꿈꾼다. 

‘터지는 순간’의 폭발력은 수류탄의 성품을 닮았지만, 불발의 확률은 수류탄보다 훨씬 높다.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말야’라고 속살대는 당사자의 신경선은 또 어떨까. 

그 또한 아득한 유폐의 어둠을 탈출하는 언어 에너지에 두려움과 후련함 같은 감정이 뒤섞여 있기 일쑤다. 

그렇게 발설되는 비밀은 때로 실정법 위반이기도 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그 농부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발설은 그런 것이다. 타인의 것이건 자신의 것이건, 비밀을 토하는 사람은 대체로 뭔가를 ‘각오’해야 한다. 

자신의 입말이 세상을 떠돌고, 그 발설자가 자신임이 드러났을 때 감당해야 할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왜? 

몸속의 배설물처럼 마냥 고이고 썩히다가는 본인의 목숨 보장도 어려울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또 있다.

은밀한 비밀이라고, 그렇게나 입단속 시키며 쉬쉬해대는 그의 비밀이 헛웃음 터질 만큼 함량미달일 때, 이를 어쩌나.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말야’라고 해서 온 신경줄에 비상을 걸었는데 ‘에게게~’소리가 절로 터지는 경우가 잦다. 

본인에게만 비밀이고 주변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이거나 김빠진 뉴스인 것이다.

고백하는 순간 그의 눈빛을 보라. 굶주린 승냥이의 그것이라기보다 깊은 밤 우물 속 달빛과 유사하다. 

스스로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품지 않은 것 같기도 한, 모호함으로 찰랑이는 우물 속 보름달 같은 눈빛으로 말한다. 

‘사실은, 음, 그때 그 일은 시환이가 한 일이었어.’ 

고백하는 사람의 눈빛은 우물이 달빛의 주체가 아니듯, 언어의 주체이기를 포기한 상태 같기도 하다. 

굳이 그에게 죄목을 붙인다면, 발설욕구에 끌려 다닌 죄, 이쯤 되지 않을까.

인간 3대 욕구인 성욕, 식욕, 색욕에 못지않은 발설욕구는 고백(告白)이라는 시적(詩的) 이름으로 가면을 쓴다. 

고백은 늘 그렇듯 위험하다. 타인에게 살포하는 고백은 사실상 자백에 가깝다. 

손발 묶인 삼손처럼 내면이 철창에서 몸부림치다 탈출에 성공한 숨찬 에너지이기 일쑤다. 

믿을 만한 상담사나 정신과에 가지 않는 한, 친구나 지인에게 발설한 고백은 언젠가 비수가 되어 뒤통수로 돌아올 확률도 적지 않다. 

글쓰기명상에서 ‘고백문 쓰기’는 그런 위험성을 흡수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내면의 언어 범람을 조절하는 호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 쓰고 난 후 반드시, 즉시 폐기한다는 전제로 쓴다.
- 살면서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쓴다.
- 자신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삶의 켯속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 열 줄짜리 고백문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 문장의 6하 원칙을 최대한 활용한 글을 쓴다.
- 비행기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옆 좌석 승객에게 털어놓듯이 쓴다.
- “그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나 “이제 생각이 난다”로 서두를 열어보라.

‘고백문 쓰기’는 당신의 내면에 유폐된 유령 같은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당신의 정신이 어슴푸레해지면 이내 마음의 창문에 어른거리는 긴 머리 유령. 

그런 에너지의 다른 표현이 몸의 염증이기도 하고, 불안이거나 우울, 조울, 불면, 자폐증 같은 현상일 수도 있다. 

내 몸의 작은 증세 하나에도 어떤 스토리가 있음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고백문 쓰기의 필요성을 이해한 사람이기도 하다.

내 친구는 구체적인 기억과 몸의 불량상태가 동시에 올라왔을 때, 병상에 누워 하릴없이 고백문 쓰기를 시행했다. 

그는 아날로그 도구를 활용하여 또박또박 썼고, 접속사 따위를 쓰지 않았다. 

“그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로 시작했다. 기억이 끊긴 지점에서는 건너뛰고, 생각이 뒤섞인 지점에서는 손글씨 가는 대로 썼다. 

글은 어릴 적 그가 저지른 한 순간의 과오와 한 소녀의 상처, 그것을 마음에 품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해온 이야기였다. 

그의 고백문 원칙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 객관적’으로 적기로 했다. 

잘 되지 않았지만 계속 썼다. 쓰고 찢고, 쓰고 찢고를 5회 정도 반복했다. 

쓸 때마다 신기하게도 새 기억이 올라왔다. 그가 말했다. “살아온 날 중에서 몇 날 안 되는, 나한테 감사한 날이었어.”

보내지 않을 손편지 쓰기


‘보내지 않을 손편지’는 왜 써야 할까. 보내지도 않을 건데 뭘! 하지만 이 글쓰기야말로 글쓰기명상의 원래 정신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첫째, 마음의 대상이 분명하지만,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는다는 점, 

둘째, 자신의 내면을 맑은 물속처럼 보여줄 수 있다는 점, 

셋째, 생각이나 기억이나 감정을 ‘나’ 중심으로 마음껏 전개할 수 있다는 점. 

넷째, 수취인이 자신이므로,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글쓰기는 ‘수취인이 없다’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수취인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쓰고 난 후 발송을 포기한다는 게 핵심이다. 

가끔 이 핵심 조건이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언젠가 40~50대 여성 집단에서 이 글쓰기명상을 시행했다. 

주인공은 40대 후반 여성이었다. 

그녀는 보내지 않을 손편지 작업을 하고 나니 불현듯 애써 적은 내용을 물에 손 씻듯이 치워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 인간’에게 본인의 분노 섞인 언어와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체했던 일들, 

자신도 그에 못지않게 즐겼던 사실 등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복수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보내지 않을 손편지’를 쓴 후, 흰 봉투에 넣어 우표를 붙여 보내고 말았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복수심과 자기 연민과 쓰레기가 된 사랑과 결별에 대한 결단을 스스로 끌어안고 싶었다는 대답이었다.

카틀린 아담스는 그의 저서 <저널치료>에서 ‘보내지 않을 손편지 쓰기’에 대해 세 가지 이득을 정리한다. 

첫째는 감정해소, 

둘째는 문제의 완결, 

셋째는 명확성이다. 

그 중에서 ‘감정해소’는 당신을 격앙시키는 외부대상에 대한 격한 항의나 성토를 재료로 한다. 

타깃이 명확하고 선명해서 시시콜콜 정밀하게 질러댐으로써 해묵은 감정 찌꺼기를 잘 씻어내는 심리작업이다. 

‘문제의 완결’은 미완의 감정이나 사건을 글로써 마무리함을 의미한다. 

이 사이의 음식물처럼 걸리적거리거나 덜 소화된 문제를 완결 스토리로 정리하는 데 제격이다. 

당신의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이 결합하면 완결도가 더 상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내지 않을 손편지’가 그 일에 대한 ‘명확성’을 보장하는 이유는 ‘글쓰기’ 자체의 힘 때문이다. 

문자는 정신처럼 흐리멍덩한 상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손글씨는 타이핑에 비해서 한결 더 명확하다. 

입말에 비하면 글쓰기는 또박또박 꽂아주듯이 말하는 격이다. 

문자의 시작이 흙이나 바위, 나무줄기, 거북등 따위에 칼로 새기면서 발달하고, 진화했음을 기억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 언젠가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겨냥하여 감정 여과 없이 편지 쓰기.
- 서로 미완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마무리 말’ 적고 버리기.
- 과거의 나, 미래의 나에게 지금 이 시점에서 편지 쓰기.
- 아직 심정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나 인물에게 ‘마무리 말’ 남기기.
- 몸속의 장기나 기관 중 하나에게 편지글 쓰기.
- 동물이나 사물을 수취인으로 편지 쓰기.

편지는 대상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의 글쓰기와는 결이 다르다. 

렌즈에 햇빛을 모으는 작업에 비유할만한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은 말한다. 

좋은 글은 대체로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 글이라고. 

당신이 좋아하는 글이 사실은 심정적으로 단 한 사람을 겨냥한 ‘보내지 않은 편지글’일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당신을 둘러싼 조건이 이렇게 조성된 순간, 당신의 글쓰기는 커다란 시공간과 자유로움을 확보한다.

‘보내지 않을 손편지 쓰기’는 몸속의 특정 기관을 수취인으로 지명할 수도 있고, 언젠가 치렀던 병(病)에게도 써 보낼 수 있다. 

대상의 자유로움과 시차의 자유로움, 상상의 자유로움, 관점의 자유로움이 허공처럼 열리는 구조다. 

당신은 작가이자 유일한 독자의 지위를 누린다. 

이를테면, 과거의 나에게 현재의 내가 부치는 ‘보내지 않는 손편지’가 있을 수 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김성수 마음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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