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허난설헌의생애

tkaudeotk 2018. 5. 27. 14:54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경기기념물 제90호.

 

광주 태전동에 있는 성종 태실의 태봉을 찾아가는 길에 먼저 난설헌 허씨의 묘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광주에 계시는 한국어문회 박광민 위원님 댁에 들러 이런 저런 고서화를 친견하던 차에 친구분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

친구분들이 손수 마련해주신 특식 매운탕을 땀을 흘려가며 먹고는 염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월리 난설헌 허씨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몇 해 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지만 또 자신이 없다.

 



박위원께서 친구분에게 전화를 하시고, 대충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삼육재활원 쪽으로 차를 몰아가니 어렴풋 기억이 되살아 난다.

"이 글을 읽고 누가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죠?"

하니, 박위원께서는 너털 웃음을 지으신다.

"아마도 방법이 없을 것 같으니,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모시고 오는 것이 편할 듯 하겠죠?"

했더니, 또 너털 웃음이시다.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어 지금도 삼육재활원과 중부고속도로만 기억에 남는다.

삼육재활원을 뒤로하고 완만한 고개를 넘어서 좌로 좌로 계속 가니 고속도로가 나오고 

그 아래로 통하는 굴다리 앞에 허난설헌의 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석이 보인다.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음에는 그냥 쉽게 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묘역.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맨 먼저 허난설헌의 묘소와 함께 시비가 눈에 들어오고 

그 옆으로 최근에 지은 듯 깔끔한 재실이 보인다.

제막식을 위해 설치한 천이 아직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가 보다. 



본래는 오른쪽으로 500m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조성한 묘역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맨 앞에 자리한 묘소가 난설헌 허씨의 묘소이다.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진 조선조에서 뛰어난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

형제자매들이 모두 시재가 뛰어난 집안에 태어나 동생 교산 허균과 함께 

조선조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 이달의 문하에서 시를 익힌 우리 역사상 걸출한 여류시인 난설헌 허씨! 

본명이 전해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 조선시대 여인으로 초희()라는 이름에 경번()이라는 별호까지 전해지는 여인이지만 

그의 삶은 여느 여인들과 다른 한과 애통의 연속이었다.

15세에 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성립에 대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는 많지만 안동 김씨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가워 할 내용이 아니니 싣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아무튼 난설헌의 묘비에는 정부인양천허씨지묘(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고 외줄로 써져 있으니 

혼자 외롭게 누워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뒤쪽 계단으로 한 번 더 올라가면 남편이었던 김성립의 묘소가 있으니, 

난설헌 사후에 새로 맞이한 남양홍씨와 합장으로 모셔저 있다.

물론 원래의 묘소에서부터 이렇게 따로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살아서 남편과 살가운 정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듯 한데, 

죽어서도 남편 옆에 눕지 못하고 외로이 홀로 누워 있으니 그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 없다. 


그 외로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난설헌의 묘 앞에는 작은 봉분 둘이 나란히 있으니, 

어린나이에 세상을 등진 어린 두 자매의 무덤이다.

딸아이를 먼저 앞세우고, 다음 해에 또 아들을 앞세웠으니 가슴을 도려낼 그 애통함은 어느 누가 짐작할 수 있으랴. 

자식 잃은 어미의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조카들을 잃은 외삼촌도 그 슬픔의 무게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다.

이에 손아래 누이인 난설헌에게 직접 시를 가르쳤던 오라버니 하곡 허봉은 

조카의 무덤에 넣을 묘지에 애통한 자신의 마음을 글로 남겼다. 


喜胤(희윤)의 墓誌(묘지).

 

태어나서 이삭도 피워보지 못한 아이 희윤아!

아버지는 성립이라 하니 나의 매부이고,

할아버지는 瞻(첨)이라 하니 나의 벗이다.
눈믈을 흘리며 희윤이를 위하여 銘(명)을 짓나니

밝고 밝은 그 얼굴

맑고 맑은 그 눈

만고의 슬픔을

-한줄기 울음에 부친다. 

 

喜胤墓誌(희윤묘지)

苗而不秀者喜胤(묘이불수자희윤)

父曰誠立余之妹壻也(부왈성립여지매서야)

祖曰瞻余之友也(조왈첨여지우야)

涕出而爲之銘曰(체출이위지명왈)

皎皎其容 晳晳其目(교교기용 석석기목)

萬古之哀 寄一哭(만고지애 기일곡)

 

한 해 전에 이쁜 조카 딸 떠나보내고, 이어서 조카 희윤이를 보낸 슬픔을 몇 줄 묘지에 남겼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곱디 고운 얼굴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한줄기 울음으로도 다할 수 없었으리라. 

아버지가 아닌 외삼촌의 마음도 이럴진대 어린 자식 앞세운 어머니의 비통함은 말해 무엇하랴.  

난설헌은 자식 잃은 설움을 哭子(곡자:자식을 위해 울다)라는 시에 담았으니, 읽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 해 사랑스런 딸 잃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 사랑스런 아들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프다. 광주 땅에는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무덤 둘이 마주하고 있구나.


 

* 廣陵(광릉) :  광주의 옛 이름.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쓸쓸히 백양나무에 바람 일면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도깨비불 무덤가에 번쩍이니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 태워 너희 혼 부르고,
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너희 무덤에 맑은 물 올려둔다.

 

*松椒(송초) : 소나무와 가래나무라는 뜻으로 무덤을 말함.

*紙錢(지전) : 돈 모양의 종이. 혼을 위로하는 의식에서 불태운다.

*玄酒(현주) : 맑은 물을 말함.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비록 내 뱃속에 아기가 있지만
安可糞長成(안가분장성)

              어찌 장성하길 바라리오.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부질없이 황대사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토하며 울다가 서글프게 울음 삼킨다.

 

화불단행이라 했던가?

난설헌은 딸을 잃은 다음 해에 또 아들을 잃는다.

또 배 속에 있던 아이조차 유산하는 불행을 당하였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거늘

어리고 어린 아이 둘을 연이어 잃었으니 뱃속의 아이까지 잃었으니

그 애통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

    꿈속에 광상산에 노닐다.                        

 

碧海漫瑤海(벽해만요해)

                푸른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찬 달 아래에......(雨田 辛鎬烈 譯)


현실에서 남편인 김성립과의 불화, 고부 갈등, 어린 자식들의 죽음과 유산 등, 

그야말로 견디기 감내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들로 가득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위와 같은 시로 승화시켰다.

넓고 넓은 세상 천지에서 하필이면 조선이라는 좁은 곳에 태어나고, 

조선에서도 하필이면 여인으로 태어나고, 

많고 많은 남자들 중에 하필이면 김성립과 결혼하게 된 세 가지의 한을 품은 난설헌 허씨.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

 

"부용꽃 스물이라 일곱 송이

차디찬 달 빛 아래 붉은 빛 떨어뜨린다."

 

는 시를 남기고 스물 일곱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佳人薄命(가인박명)이란 옛말이 그르지 않음을 재삼 확인하며

성종태실이 있었던 태전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 난설헌시비 앞에서 필자와 박광민 한국어문회 연구위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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