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겨졌다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신사임당이 태어날 당시부터 이미 상당히 굵었을 고목 매화를 보아온 추억을 살려
훗날 매화 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 역사성이 깊은 나무이다.
매화의 여러 품종 중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 종류이며,
3월20일 전후 꽃이 필 때는 은은한 매향이 퍼져 오죽헌을 더욱 경건하게 한다.
다른 매화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굵은 매실이 달리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강릉 오죽헌 내 사당앞 정원에 위치한다
이 나무는 생육가는 북한계선 지역에 남아있는 것으로는 최고목으로 추정되며
나무의 높이가 부산의 배롱나무보다 작은 것은 겨울철에 윗부분이
얼어죽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죽헌 배롱나무는 높이 4m 밑둥에서 세갈래로 나눠져
세줄기를 이루며 이들은 각각의 가슴둘레 높이가
105cm 89cm 72cm이다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날 때도 심어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수령은 대략 54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1982년 11월 13이에 시나무 제63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문화유적 분포지도 --강릉시(강릉대학교박물관 1998)
김형섭 "강릉시의 자연환경과 천연기념물 지방기념물(자연물) 및 지정보호수
"강릉의 문화와 역사유적--(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출처:디지털 강릉 문화대전
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오죽헌은 조선 중종(中宗) 31년(1536)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탄생한 곳이며,
오죽헌은 율곡의 이종제 권처균(權處均)의 호(號)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조 가옥인 오죽헌은
강릉 향현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이 처음 지었고,
그의 아들인 최응현(崔應賢)은 다시 사위인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주었고,
이사온은 다시 사위인 신명화(申命和:신사임당의 아버지이며,
율곡의 외할아버지)에게, 신명화는 또 사위인 권화(權和)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후손이 1975년 오죽헌정화사업이 시작될 때까지 소유하였다.
<BR 이 정화사업으로 오죽헌 안에 있던 어제각(御製閣) 자리에 문성사(文成祠)를 새로이 건축하였다.
또 경내에는 기념관과 정문인 자경문(自警門)이 새로 건립되었다.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며,
문성사라는 명칭은 율곡 이이의 시호인 문성공(文成公)을 본 따지은 것이다.
이 사당에 봉안된 율곡선생 영정은 1968년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것인데,
이전의 것은 1926년 조선총독부에서 교육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어제각은 원래 정조의 어명으로 지어졌는데,
1788년 정조는 오죽헌의 주인집에 율곡선생이 손수 쓴 격몽요결(擊蒙要訣) 원본과
선생이 쓰던 벼루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강원 관찰사로하여금 가져오게 하였다.
정조는 이를 보고난 후 격몽요결에는 서문을 벼루의 뒷면엔‘어제어필(御製御筆)’이라 새기게 하고
이것을 소장하는 집을 지으라는 어명과 함께 이 유품을 되돌려 보냈다.
이 어제각의 상량문은 당시 강원감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쓰고, 강릉부사 맹지대(孟至大)는 기문을 썼다.
건축당시 건물 규모는 2평 정도의 목조팔각지붕의 전각형(殿閣形) 건물로 주위는 돌담을 둘렀고,
정문은 운한문(雲漢門)이라 하였다.
1976년 정화사업 당시 헐렸다가 1987년에 복원되었다.
율곡 이이가 쓰던 벼루와 토지 양여서이다.
벼루는 가운데가 타원형으로 오목하게 패여 있고, 위쪽과 아래쪽에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양각하였다.
벼루의 뒷면에는 글씨가 새겨 있는데, 정조 12년(1788)에
정조가 율곡 이이의 유품이 강릉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보시고, 쓰신 것을 그대로 새긴 것이다.
보신 후 율곡의 유품을 소중히 보존하기 위해 어제각이라는 건물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토지 양여서는 율곡이 그의 소유의 토지를 이종 권처균(權處均)에게 양여 한다는 증서로,
계약서나 각서와 같은 성질의 문서이다.
이 문서는 선조 12년(1579)에 율곡이 친필로 작성한 것으로,
이 때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해주 석담에 가서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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