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제3회 한민족 효사랑 글짓기 당선작_김은희 [다음 세상에는 내가 엄마, 엄마가 딸]

tkaudeotk 2016. 6. 7. 19:59

다음 세상에는 내가 엄마, 엄마가 딸


                                           --김 은 희--

 

 

  엄마는 떠나겠다고 했다. 

전화 너머 엄마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다. 

굳은 결심을 한 사람처럼 담담함은 물론 약간의 후련함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무슨 말이야. 처음부터 천-천-히, 천천히 말을 해 봐요.”
  이상 기운을 감지한 나는 곧바로 시간을 끌기 위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필이면 나는 아주 먼 곳에 나와 있었다. 

서서히 밀려오는 불안과 공포에 엄마를 외치며 달리고 또 달렸지만 엄마는 떠나겠다는 말과, 

이제 전화를 끊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라는 외침도 목구멍에서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집으로 가는 길도 잘 알 수 없는, 

차도 사람도 지나지 않는 어두운 길목 위에서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악몽이었다. 

베개가 흠뻑 젖도록 눈물과 땀이 뒤범벅이다. 

꿈속에서 달리고 또 달린 터에 잠에서 깬 뒤에도 몸이 욱신거려왔다. 

옆에 누워 노곤한 잠을 자고 있는 엄마를 확인한 뒤 또 한 번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괜한 마음에 엄마의 코 밑에 손가락도 대 본다. 손가락에 따뜻한 콧김이 느껴지고 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효사랑 글짓기에 공모할 글을 위해 ‘나의 불효’를 화두로 몇 주간은 길을 걸을 때나, 

잠들기 전이나 그 생각에 골몰했던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랜 생각 끝에도 나는 그렇다 할 나의 불효 에피소드를 생각하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 그렇다 할 방황조차 하지 않고 지나간 나였다. 

그래서 지난밤엔 반대로 나의 효도 목록을 생각하다 잠에 들었다. 

효도했던 일을 하나하나 반추해 지워나가다 보면, 불효했던 일이 생각날까 해서 말이다.


  잠들기 직전까지 하던 생각을 다시 상기시켜보았다. 
  ‘나는 짧다면 짧고, 길면 긴 24년을 부모님과 함께 하면서 효도를 많이 한 것 같아. 

내가 내 친구 누구처럼 헛짓거리 하고 다니다가 임신을 해 봤나, 

싸움을 해봤나, 가출 한 번을 했나. 어려서부터 큰 말썽 없이 공부하고 오래도록 원하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어. 

학생 때는 종종 임원이나 크고 작은 수상으로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렸고. 

생각해보니 위험한 장난은 하지 않아 큰 사고로 수술을 하거나 병원신세를 진적도 없네. 

그 이유가 자전거도 타지 못할 만큼 겁이 많아서이기는 해도 말이야. 

애교가 넘치지는 않아도 부모님 두 분 생신은 물론이고 

그 분들 부모님인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생신도 잊지 않는 나야. 

크리스마스면 가족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내 생일엔 부모님께 감사의 선물과 편지를 올리는 내가 불효 에피소드 공모전이라니. 

게다가 힘든 가정 형편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부터는 용돈도 받지 않았어. 

대학에 입학해서는 4년째 성적 우수 장학금을 타고, 

나머지 대학 등록금 역시 1원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벌어 다니고 있는 나를 

친구들은 소위 ‘엄친딸’이라고까지 부르곤 하는 걸. 

어머니가 자녀에게 “내 친구 딸 누구는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하며 

비교를 곧잘 하는데서 따와 ‘엄마 친구 딸’을 줄인 신조어로, 모든 방면에서 우수한 사람에게 쓴다는 그 말을……’

 

 대충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 옆에 잠들어 있는 엄마의 모습은 이상하게 슬퍼보였다. 

더욱이 막연하게 밀려오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효도 목록을 끝도 없이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불효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인지, 

나 혼자 깨어있게 된 새벽녘,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밀려오는 꿈 앞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하였다. 

나는 주로 행동보다는 말과 생각으로써 죄를 짓고,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것 같다. 

내가 하고도 가슴 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몇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13년간 외동딸로 자랐다. 

엄마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겨울, 띠 동갑 동생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고 

임신 10주째가 되던 어느 날 다림질을 하는 척 하며 나에게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은희야, 엄마 임신이래. 10주.”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엄마와 엄마의 배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엄마는 같은 곳을 계속해서 다림질하고 있었다. 

엄마는 허락 없이 일을 저질러 버린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엄마의 발목에 꼬여있는 다리미 줄이 차꼬처럼 느껴졌다. 

흥분한 나는 아들을 갖고 싶냐고 반문했고, 큰 딸은 생리 기저귀, 작은 딸은 똥 기저귀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물론 동생 낳아 달란 얘기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외동딸을 마치 훈장이라도 되듯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던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성’에 대해 민감하던 때여서 충격은 더했다. 

지금 동생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보물 1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했던 상처의 말들, 

또 10주 동안 누구에게도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엄마에게 

임신복 하나 사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 속에 사무치곤 한다. 

더욱이 그런 철없는 말들을 지금껏 뱉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니 혀가 내둘러졌다. 

불효한 일들이 하나둘씩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래 전, 대학교 수시 입학에서 오랫동안 꿈꿔 온 국문학과에 합격하면서 

나는 찾고 있던 꿈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커다란 해방감과 자유보다는 꿈에 한 발짝 다가왔다는 그 대단한 기쁨을 몇 번이고 되새김했더랬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을 보상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나는 아주 강했고, 자신 있었다.
  그 해 꽃피는 3월은 상상과는 달랐다. 그즈음, 나는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일을 하던 식당 건물주는 중학교 1학년 여자애였다. 

억대부자였던 그 애의 아버지는 딸애가 세 살 되던 해, 

모든 재산을 그 애송이 앞으로 해놓고 이름 모를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올해로 열 넷 되는 그 애는 ‘갑부’가 되었다 했다. 언젠가, 

그 애가 가게에 놀러오고 나는 일을 하고 있던 날, 아버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돈 많은 아이가 행복할까, 

집에 가면 사지 멀쩡한 아버지가 있는 돈 없는 내가 행복할까 생각했었다.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답하기 어려웠고 이내 미안해졌다.


  대학에 가서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동기들과 빈번한 술자리에 제대로 참석 한 번 못해보고 

나는 아침이면 늘 소화가 안 되는 얼굴을 했다. 

결국 어느 날 밤이면, 나는 이런 대학, 이런 국문과는 오기도 싫었노라고, 부모님 가슴에 한이 될 말들을 풀어놓았다. 

나를 더 칭찬하고 인정해 달라고 소리쳤다. 

부모님이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걱정이나 관심의 말을 풀어놓을라치면 나는 펄쩍 펄쩍 뛰었다.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했으니 내게 잔소리를 하지도, 나를 구속하지도 말라고 말이다. 

그럴 때면 부모님은 말이 없었고, 동물의 시체처럼 잠들곤 했다. 
  거창한 불효 ‘사건’을 떠올릴 수 없을 뿐이지, 사실 나는 효녀와는 거리가 멀다. 

사실 내가 생각한 효도 목록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어찌 보면 나는 나의 자리를 지키며 

또 구속받기 싫어하며 자유롭게 내 할 일을 했던 것뿐이지 효도를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효’는 행동하는 것이다. 

관념이나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보은의 행위이다. 

하지만 그 생각과 마음에 진정성이 없다면 과연 수많은 행동들이 의미가 있을까. 

부모님을 생각해 대학 등록금을 번답시고 내 멋대로 행동하는 것. 

나 잘났다 생각하며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보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효도라 할 수 있을까. 

공모전을 통해 알게 된 ‘김삼열의 효 이야기’의 한 구절은 이런 나의 반성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었다.


 “효란 자신에게 육신과 정신을 주시고 존재하게 한 ‘본’에 대한 순종이며 사랑이며 공경이다. 

천지의 기운으로 인간의 생명이 생기고 생육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그 기본인 자연과 환경을 사랑하고 아끼며 보존하는 것이 ‘효’의 큰 뜻이다. 

천지의 기운으로 창조된 ‘나’는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잘 받들어 모셔야 한다. 

부모를 지극히 공경하면 마음이 겸손해지고 자연적으로 도덕심이 커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흔히 배운 사람일수록 진정성이 없고 인정머리 없으며 효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효는 일방적인 수발이나 봉양의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진정성……. 

부모님을 가슴 깊이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행동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일치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실행한 효도 목록의 일들은 정확히 표현하면 

일방적이고도 이기적인 선심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다시 고개를 돌려 잠든 엄마의 얼굴을 본다. 이럴 때면 늘 익숙하고도 참으로 생소한 얼굴. 혹자는 그럴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정도 생각을 하면 되었다고, 스물 넷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찍이 철이 들었다고. 

하지만 불편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어머니의 얼굴 앞에서 나는 오랜만에 울고 또 울어버렸다. 

풍수지탄이라고 하였는가. 

짧은 악몽처럼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생각을 하니 부모님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구심을 가졌던 어리석었던 내가 떠올라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하였다. 
  지난 내 생일, “기쁘고도 슬프다. 이제는 끌어안을 수 없을 만큼 커 버린 네가, 

어떨 땐 참으로 대견하고, 또 어떨 땐 슬프다.”라고 편지를 보내오던 어머니. 

그리고 그런 감정조차 숨기시는 아버지. 

부모님 작은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늘 겉도는 사람처럼 행동하던 나는 밖에서 새지 않는 엄친딸, 

집에서 새는 바가지 불효자식이었다. 

작은 마음도 채우지 못하고 언어폭력을 일삼는 딸이 온갖 선물과 이벤트를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새 마음으로 나아가고 싶다. 효는 사랑이고 행복이라고 하였다. 

부모님 정해주신 내 이름 ‘은희’의 뜻, 

‘은혜로운 희망’처럼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은혜로 부모님께 다가가고 싶다. 

그래서 부모님께 진정한 희망의 존재가 되고 싶다. 

늘 ‘은희 아빠, 은희 엄마’를 훈장처럼 여기며 살아오신 두 분이 남은 하루하루는 두 분 스스로의 이름으로 

보다 즐겁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효도하고 싶다.
 부모님, 특히 엄마, 제가 더 잘할게요. 평생 해도 다 못할 효도가 남으면, 

우리 다음 세상에도 또 엄마와 딸로 만나요.

 그 땐 내가 엄마 할께. 엄마가 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