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밥먹다가 아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tkaudeotk 2016. 4. 6. 11:55

저는 평소 꿈을 잘 꾸지않는데 며칠 전 삼 일 연장으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도 내리 세 번 연속으로 악몽을 꾸었죠.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 덕에 잠을 설쳐서 머리가 멍해지는 통에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지난 주 어느 날 일어날 시간이 훨씬 지난 것같아 방문을 열고 나가다가 

마침 거실에 서서 달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아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오늘이 금요일이면 미리 주말에 쓸 잔돈을 삼십만 원 정도 바꾸어놓아야 하기에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그러면서 "그것도 몰라? 맞춰봐." 그러더군요. 

제가 머리를 긁적이며 "목요일인가?" 하고 되물었더니 아내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황홀한 금요일이잖아!" 하며 베시시 웃는데 아무리 오래되고 그동안 서로 볼꺼 못 볼꺼 다 본 사이지만 

문득 처녀적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며 아직은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금요일이 황홀하다는 아내의 말이 하도 어이없고 뚱딴지같아서 제가 그랬습니다. 
"정신 차려. 이 아줌마야. 황홀하기는 뭐가 황홀해.당신하고는 아무 상관없어. 

당신이 지금 무슨 이십 댄줄 알아?" 

그랬더니 아내가 주방으로 가면서 나즈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탄조의 독백을 장맛비처럼 길게도 쏟아내더군요. 

"아이고 내 팔자야. 무슨 경상도 남자 아니라칼까봐 사람이 저렇게도 무드가 없어요. 

다른 경상도 남자는 그래도 밥도, 아는? 자자, 세 마디는 한다카던데 

저 양반은 밥도, 아는? 이 두 마디가 다네." 그러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이고 가들도 내 나이 돼 보라캐라. 아마 내 나이 되면 한 마디도 안 할껄.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지금 당신 나이가 몇 갠 줄 알어?" 
그러자 아내가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를 내뱉고는 또 수줍은 듯 소리없이 살포시 웃었습니다. 


투정 반 애교 반 투로 내 나이가 어때서를 반복하며 돌아서는 아내의 뒷모습이 

서리를 거뜬히 이기고 향기롭게 피어난 노란 국화꽃에 어둠이 내리면 곧 사라질 빨간 노을이 입맞춤하듯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제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고생을 내색하지 않고 

제 옆에 아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에게만은 세월이 멈추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후 같이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제 왼쪽에 앉아있는 아내와 또 눈이 마주쳤습니다. 

제가 밥먹는 게 영 시원찮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사실 악몽을 꾸어서 밥맛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제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몽? 내가 돈달라는 꿈을 꾸었구만." 

허허~~ 
꿈보다 해몽이 한참을 앞서 가더군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돈달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는 아내가 그런 말을 다 하다니 

서로 말은 안해도 아내는 매일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제 속마음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먼 훗날 아내가 저로 하여금 진정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 

저는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써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갑오년 윤달 구월 스무닷새 소녀의 일기장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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