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미식평론가 브리야 사바랭은,
“한 국가의 운명은 그 나라가 식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달려있다”라고도 말했다.
그의 말처럼, 먹는다는 것은 일상적 행위인 동시에 모든 것의 집약이기도 하다.
때문에 ‘미식(美食)’이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인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넘어서 음식과 먹는 행위의 전후 사정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음식이나 그것을 먹는 행위와 관련해 오감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과
정신적인 아름다움까지 포함한 식문화의 미적 양식을 총칭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음식을 대하고, 먹는 방식은 어떨까.
사실 현재의 우리는 더 이상 잘 먹기도 어려울 만큼 ‘잘’ 먹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음식’이라는 코드가 방송과 인터넷을 점령할 만큼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음식과 먹는 행위의 아름다움까지도 총체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흔히 ‘먹방’이라고 칭하는, 음식 먹는 것을 보여주는 방송들은 ‘VJ특공대’ 등 정보 프로그램의 맛집 소개 코너로 시작해,
‘테이스티 로드’, ‘수요미식회’ 등 특정주제 하에 맛집을 탐방하고 논하는 단독 프로그램으로 점차 발전했고,
‘삼시세끼’처럼 음식재료를 구해서 만들어 먹는 과정에 충실하거나,
‘마스터셰프 코리아’, ‘냉장고를 부탁해’처럼 요리 대결과 서바이벌을 펼치며, 요리하는 방송인 ‘쿡방’으로의 변용을 거듭했다.
또한 맛집과 요리가 대결의 도구로 사용되며,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든든하게 보장하는 자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에 더해, 인터넷에서는 스토리도 없이 시종일관 BJ(1)가 음식을 먹는 모습만 보여주는 개인방송이 인기를 끌며,
‘먹방’으로만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방송후원금을 벌어들이는 인기 BJ들도 생겨났다.
이렇게 ‘맛’에만 집중해 쾌락을 극대화하는 방송, 영화, 인터넷 콘텐츠들을 통틀어 ‘푸드 포르노’라고 하는데,
이것은 보는 이의 혀끝 욕망을 자극하고, 맛집이나 음식을 찾아서 도시를 헤매게 하며,
궂은 날씨도 불사하고 긴 줄을 서는 진풍경까지 연출한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가 맛을 제대로 아는 미식가들인가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다큐멘터리 영화 ‘트루맛쇼’에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촬영을 위해 만든 레스토랑이 맛집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맛’이라는 것이 개인의 기준과 판단을 배제하고 미디어와 자본에 의해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확대되며, 재생산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아는 맛은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머리로 아는 맛, 순수하게 주관적이지 않은 맛이 더 많다.
물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음식이 맛있고 서비스가 괜찮은 집을 선택하기 위해
방송을 참고하거나 블로그 리뷰를 검색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선택과 차후의 재 선택에 있어 개인의 기준과 판단이 부재한, 몰개성과 몰취향은 걱정할만한 일이다.
음악이나 미술을 누리는 ‘좋은 취향’이 중요하듯이 음식에 대한 ‘좋은 취향’ 역시 중요하다.
또한 다양한 취향 역시 중요하며, 개성 있는 판단 기준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맛에 대한 취향은, 미디어에서 ‘좋은 취향’이라고 규정한 것을 주입시키고,
일반 대중이 SNS를 통해 이를 반복학습하며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무방비상태로 받아들이다 보면, 방송에 나온 맛집을 모두 찾아가서 먹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만 같고,
맛집 블로거가 리뷰한 식당이 맛이 없으면 아무래도 내 입맛이 문제인 것만 같다.
취업을 위해 공통된 스펙을 갖추고, 유행에 따라 외모를 가꾸는 것처럼, 음식 취향까지도 정해진 기준에 따라 맞추어야 하는 것일까.
취향이라는 것은 다양한 교육적·자본적 요소의 결합으로 형성되며,
엘리트가 스스로와 대중을 사회적으로 구분하고자 할 때 계급의 지표로 사용된다.(2)
취향도 그러한 문화자본으로서,
언뜻보면 음악이나 미술보다 더 쉽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능하며, 저렴하고 빠르게 충족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간편하게 경험을 갖추고, 일정수준 이상의 취향을 형성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때문에 맛집에서의 ‘인증샷’을 SNS에 올리는 것은 일상적 표현을 넘어서,
본인이 ‘미디어에서 공인한’ 좋은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며 무의식적으로 만족을 획득하는 행위이자,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자본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받는 사회적 인증을 내포하는 행위가 된다.
영혼의 그릇을 채우지 못한 ‘맛집' 욕망
한편 맛에 대해 스스로 정립한 판단 기준을 가진 소수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맛집 탐방객들은 맛에 대한 판단이 과연 진정한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맛집 탐방과 인증의 과정에서, 다음 선택에 참고할만한 자신만의 취향을 쌓지 못한 채,
차후에도 그 맛집을 가거나 또 다른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는다.
또는 지나가다 들렀던 식당의 맛이 그저 그렇더라도 ‘맛집’이라는 이름으로 SNS에 업로드한다.
이것은 음식 취향의 발전이라기보다는, ‘맛집’에 대한 집착과 재경험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욕망으로 선택한 것인지 모를 어느 맛집의 식탁에서 일시적 쾌락과 허기를 충족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영혼의 그릇은 비어 간다. 무엇에서 오는 허기인지 모르고 자꾸만 다음 그릇을 찾는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3)
사회적 인간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인정과 소속이라는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진정한 자신의 욕망이 아닌 사회가 원하는 욕망을 추구한다.
방송에서 요구하는 맛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혀끝의 쾌락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사회로부터의 소속감이 결핍되고
개인의 영혼이 허기졌다는 사실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유명한 음식 영화 ‘남극의 셰프’에서, 남극 기지의 대원들은 외로움이라는 정신적 허기와 싸우며 매일의 식사에 집착하며, 영화
‘스키야키’에서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각자 경험한 가장 쾌락적인 맛에 대해 돌아가며 진술하고,
함께 상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들의 집착은, 맛이야말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따뜻함이자 쾌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처럼 혀끝의 쾌락에 집착하는 우리의 영혼은, 남극이나 교도소처럼 단절된 공간에 유배돼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음식은 쾌락과 욕망의 목적물로만 사용되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롤랑바르트가 비프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을 통해 프랑스의 문화를 읽어냈듯,(4)
음식은 그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문화적 상징이자 기호이다.
푸드라이터 나이젤 슬레이터의 유년기를 다룬 영화 ‘토스트’에서 계모의 화려한 요리보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었던 단순한 토스트나,
소년 나이젤이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던 다 태운 대구 요리가 마음을 끄는 이유,
그리고 드라마 ‘심야식당’에서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요리가 추억에 대한 오감을 일깨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음식의 사회적·관계적 가치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은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 역사 또한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먹는 프라이드치킨이나, 소 창자를 바싹 튀긴 ‘아부라카스’라는 음식은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나
오사카 도축장 근로자들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울푸드이다.(5) 가까운 곳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각 지역 전통음식의 특색이 모두 다르며, 나와 이웃이 즐겨 먹는 음식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와인이 기후나 토양의 특성인 ‘떼루아(Terroir)’를 온전히 품고 있는 것처럼,
음식 역시 한 입에 지역의 환경과 역사, 개인의 추억을 버무려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것이 음식이기에, 고유한 기질을 품지 못하고 점점 획일화돼가는 음식 취향이 유난히 아쉽다.
물론 쾌락은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감각에 충실한 것이 천박한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아타락시아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한 쾌락에는 정신적 영속이 필요하다.
인생의 주요한 즐거움인 음식에서 찰나의 쾌락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을 얻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영속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더 나은 미식이 필요하다. 음식이 담은 의미들은 삶의 본질과 다름 아니기에,
자본이나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돼야 한다.
말초적 쾌락에 대한 경박한 만족의 재경험이나 집착이 아니라, 음식에서 얻는 쾌락의 전후 상황을 모두 소중히 여기고,
‘맛’을 넘어서 음식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기능을 두루 향유하며 먹는 행위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미식을 누린다면,
인증샷으로 인정과 소속감을 갈구하거나, 방송에 나온 맛집에 줄을 서는 것으로 결핍을 충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목적에서, 유기농 식품을 넘어 지역과 문화 특성에 맞는 다양한 음식 문화를 존중하는 ‘슬로푸드’나
식품의 장거리 운송을 지양하는 ‘로컬푸드’ 등이 국내에서도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지구와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문화이자 책임이다.
그 자리에 타자의 욕망을 대입시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진정한 자신이 진실로 욕망하는 것을 찾아서 취향과 기준을 키움으로써,
식탁 앞에서 내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뱃속 허기를 채우고 소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정신적 허기도만족스럽게 채우고 말끔하게 소화되도록 먹을 수 있었으면 한다.
글·김지연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무석사를 받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2006~2008년) 싸이월드 페이퍼와 올리브TV홈페이지 등에 미술에세이를 연재했다.
(1) ‘Broadcasting Jockey’의 약자로서, 아프리카TV와 같은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개인 방송 활동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2)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으로, 사회·교육·계급 등에 따라 후천적으로 길러져,
개인의 문화적인 취향과 소비의 근간이 되는 성향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계급을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로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이 질서를 유지하는데 교묘하게 이용된다고 한다.
(3) 자크 라캉,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1994
(4)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동문선, 1997
(5) 우에하라 요시히로, <차별받은 식탁>, 어크로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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