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전등사 정족산성 2

tkaudeotk 2014. 12. 5. 23:28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되었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11:00부터 봉행된다. 
이 광성보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이 잘 남아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 오기에 좋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과 돈대의 곡선 모양이 인상적이다.

* 좌 홍이포 - 포구장전식 화포로서 사정거리 700m이며 조선영조때 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 중간 소포 - 장전후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 300m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 우 불랑기 - 불랑기는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것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서 
                    포1문에 다섯개에서 아홉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 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 광성 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5년(1679)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성보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 5년(1679)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1]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1]

대포는 홍이포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1]

소포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1]

작은 것은 불량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정의

음력 10월 20일을 전후해서 부는 바람과 추위를 손돌이라는 인물과 관련지어 설명한 설화.

줄거리

고려 때 뱃사공 손돌이 몽골군에 쫓겨 강화도로 피신하는 고려 왕을 모시게 되었다. 

손돌은 바가지 하나를 물에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갈 것을 간언하나,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으로 오해한 왕에게 참수를 당한다.

 죽은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손돌의 묘를 만들고 제사를 드렸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손돌목이라 부른다. 

음력 10월 20일쯤 오는 추위를 죽은 손돌의 원혼이 바람과 추위를 몰고 온다고 하여, ‘손돌바람’과 ‘손돌추위’라고 한다.

분석

『동국세시기()』와 『열양세시기()』에 따르면, 

음력 10월 20일경에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손돌이 죽은 장소를 ‘손돌목[]’이라고 하였다. 

‘손돌목’과 관련한 연구로는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손돌목의 유래를 살펴본 연구와 

손돌전설을 풍신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전승하는 손돌전설의 유형을 분류하고 

그 성격을 파악한 연구 그리고 문헌과 구전자료를 토대로 <손돌목> 전설에 내재된 민중 의식을 살펴본 연구들이 있다.

 <손돌목>전설에서 풍신의 성격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시기에 전하는 내용과 현지에 남아 있는 묘비 그리고 구전되는 설화를 볼 때,

 손돌목은 손돌이라는 인물과 관련해서 유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특징

손돌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인 전란은 ‘고려, 임진왜란, 일본전쟁, 전란’ 들로 그 의미가 퇴색되어 있다. 

설화 전승 집단에게 있어 손돌목에 등장하는 전란은 역사의 혼란기인 어느 시기쯤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전승과정에서 많은 변이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전설의 증거물로 제시되었던 손돌추위와 손돌바람도 기상 이변과 주택, 피복 같은 제반 여건이 과거와 비교하여

 월등하게 향상된 관계로 증거의 활용도는 약화될 것이다. 

이에 비해 손돌목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중심으로, 바가지를 이용해 손돌목을 빠져나가는 형태의 이야기 위주로 전승될 것이다.

 김포군에서 김포의 3대 얼로 손돌공의 충성심을 선정하여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앞으로 이 설화는 손돌의 충정을 돋보이게 하는 경향의 설화로 심화될 것이다.

집필

  • 이영수(李瑛洙)/인하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손돌목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국립민속박물관)






이 비는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등

조선군이 열세한 병기로 미국 아세아함대의 해군과 백병전을 벌여 모두 장렬히 순국하자 나라 위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어씨문중에서 세웠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 이하 53명의 장병은 최후의 한 명까지 포로되기를 거부하고 의연히 전사함으로써 
외침에 줄기차게 항쟁하는 우리 민족의 살신호국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쌍충비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초판 1996, 15쇄 2012,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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