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곳

전등사 정족산성 1

tkaudeotk 2014. 12. 5. 23:20











전등사 대웅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대웅전을 건축하던 도편수가 공사 기간 동안 절 아래 주모와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녀가 도편수를 배반하고 야반도주하자,
 그녀를 벌하기 위해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마니산 참성대가 있는 강화도를 대표하는 절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 381)에 아도화상이 처음 지은 절이라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대로라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짐과 함께 지어진 최초의 절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진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다. 
처음에는 ‘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고려 때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조정에서는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등사 안에 가짜 궁궐을 지었다.
이때 이 절이 크게 부흥했으며, 이후 고려 충렬왕 8년(1282)에는 왕비가 이 절에 경전과 옥 등을 시주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등사’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의 화재를 겪으며, 전각이 모두 소실됐고, 1621년 2월에 옛 모습을 되찾아 지금에 이른다. 
보물 제178호인 대웅전도 이때 지은 건물이다. 조선 숙종 때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로 발전했다.

전등사가 자리한 정족산에는 사적 제130호인 정족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석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성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등사 (대한민국 여행사전, 2009.03.20, 터치아트)









현재 전등사로 들어가는 문은 둘이다. 전등사 정문인 삼랑성문이 동문이고 남문이 외돌아 있다.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들을 뒤로하고 삼랑성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서 있다.
 이 또한 절집에서 만나는 색다른 정서이지만 바로 이런 모습들이 강화 전등사가 걸어온 기념비적 역사이다.

울창한 나무 아래로 한참을 걸으면 대조루에 닿는다. 
대조루를 비껴서면 그림 같은 대웅보전이 눈앞에 다가서는데 다포집의 우아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창방뿌리에 연꽃을, 공포 위 보머리에 도깨비를, 그리고 추녀 밑에는 나체의 여인상을 조각해놓았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산지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 전등사는 보물 제178호인 대웅전이 정남을 향하고 있다. 
그 왼쪽 옆으로는 대웅전과 같은 형식으로 지은 약사전이 있어 마치 두 채의 대웅전을 보는 느낌이다. 
1880년에 조성한 대웅전의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 중국 북송 때 주조한 범종, 
고려시대 유물로 보이는 청동물동이, 대웅전에 불을 밝혔던 옥등이 값진 유물로 남아 있다.

전등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 원종 5년(1264) 5월 삼랑성 가궁궐에 불정도량과 오성도량을 4개월간 시설케 하고 법회를 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처음이지만, 이때까지도 '전등사'라는 절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가궁궐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왕실과 매우 가까운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승() 인기()에게 부탁해 바다 건너 송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인출해다 '전등사'에 보관케 했다"는 기록이 비로소 나오는데, 
그 주인공이 충렬왕비 정화궁주1)였다. 
목은 이색(1328∼1396) 또한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정화궁주가 송나라에 스님을 보내 대장경을 인출해 오던 시기는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한지 12년 뒤인 1282년이었다. 
이로써 고려 고종이 삼랑성에 세웠다는 그 가궁궐이 그대로 전등사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또 하나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해 전등사라 불렀다지만, 
그보다 진리의 등불은 시공()에 구애됨 없이 꺼지지 않고 전해진다는 불교 본래의 의미로 '전등사'()라 불렀음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숙종 4년(1678), 조정에서 실록을 보관하기 시작해 사고() 역할을 하면서 전등사는 조선왕조와 더욱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1707년 강화유수 황흠은 사각()을 고쳐 짓고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했으며,
 이곳을 왕조실록과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는 곳인 보사권봉소()로 정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등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초판 1996, 15쇄 2012, 돌베개)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 서쪽에 있었으며, 실록의 보관이 중심 업무였다.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성주()의 사고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이 해주()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와 객사()을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사고에 옮겨져 복간되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과 함께 선원각()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

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규장각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로 이어졌다.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족산사고 [鼎足山史庫] (두산백과)



1986년 4월 1일 강화군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등사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궐터는 전등사 경내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가궐은 1259년(고려 고종 46) 풍수도참가 백승현의 건의로 고종이 세웠는데, 

궁궐 건물은 몽골군의 칩입으로 불에 타 없어졌으며 지금은 넓은 궐터만 남아 있다. 

당시 고종이 백승현에게 가궐터를 하문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지으면 나라가 부강해져 주변국들이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장군 조문주, 국자제주 김구, 장군 송송례 등이 왕의 명을 받들어 가궐을 건립하였으며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족산가궐지 [鼎足山假闕址]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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