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효봉(曉峰)스님에 대한 얘기를 해 볼까요?. 효봉스님 얘기를 하는 것은 그분의 이력이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38세 늦깎이로 삭발 출가하여 대한불교조계종 종정(宗正)까지 지내신 이효봉(李曉峰)스님은 구산(九山)스님과 법정(法頂)스님의 은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효봉(李曉峰)스님은 고종 25년(1888) 평남 양덕에서 출생, 어려서 남달리
영특하여 신동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명은 이찬형(李燦亨)이고 효봉은 그의 호입니다.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유학 법학을 전공하여 26세에 졸업 귀국하여 법조계에 투신하였는데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법관이었습니다.
스님이 10년간(1913-1923) 법관 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만행에 늘 회의와 방황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1923년 스님의 나이 36세 때 평양 고등법원에 근무할 때 큰 사건이 일어나 한 인간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된 후 진범이 나타나 큰 오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사흘 밤을 새우며 고통에 오열했습니다. 결국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판단한 스님은 그 높은 판사라는 관직을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부인과 두 자녀를 두고 서울로 올라와 입고 나온 옷을 팔아 엿판을 구해 엿장수를 하며 3년간 구도를 위한 고행을 했습니다. 3 년 만에 금강산에서 발길을 멈추고 스승을 찾기로 결심, 유점사(楡岾寺)를 거처 신계사(神溪寺)에서 금강산 도인이라는 석두(石頭)스님을 만나 출가를 하니 나이 38세. 법명은 원명(元明)이라 했습니다.
스님 나이 44세(1931) 때, 토굴 속(신계사 법기암)에서 마침내 견성(見性;깨달음을 얻음)을 하였습니다. 스님이 이곳 토굴에서 안거생활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스님은 금강산에서 안거에 들어갈 때 미리 대중스님들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저는 늦게 입산하다 보니까 한가하게 정진할 수가 없습니다. 묵언을 하면서 입선과 방선 경행을 하지 않고 계속 앉아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양해를 얻었습니다. 스님들이 1시간동안 정진하면 10분 포행하게 되어 있는데 효봉스님은 그것도 안한다 했습니다. 해제하면 걸망 메고 만행(卍行)가는데 효봉스님은 해제 결제도 안 했습니다. 6년 동안 계속해서 장좌불와(장좌불와)한 것입니다. 대소변 보고, 먹는 시간 외는 앉아서 정진 했다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스님에게는 일화도 많습니다. 그의 이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초대를 했습니다. 반갑게 맞은 대통령이 나이를 물었습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生不生 死不死) 중한테 생일이 있겠소이까?'”
이 말에 대통령도 정색 (正色)을 했다고 합니다.
불교계에 정화 바람이 불자 효봉스님은 서울에 올라가서 한 번 일을 봐 주고는 내려와 미래사 옆에 토굴을 짓고 숨어 버렸습니다.
그 토굴의 시봉은 상좌들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효봉스님은 토굴에서 참선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늘 좌선을 하면서 자신을 다듬었는데 그 토굴은 대중들이 서둘러 지은 것이라 방구들이 들썩거렸고 숲속의 벌레들이 들끓기도 했습니다.
어느 해 봄, 토굴에서 스님과 상좌가 좌선에 들어갔습니다. 일단 좌선에 들어가면 공양시간과 뒷간 갈 때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돌이 되는 것이 효봉스님이었습니다. 단 두 사람이 좌선을 하니 조용하기 그지없고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스님이 잠시 뒷간을 갔다 돌아오는데, 그만 방구들이 삐걱하고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삼매에 들어가 있던 상좌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내달아 토굴 뒤편에 울력 때 쓰는 도끼를 들고 와서 방구들을 파헤쳤습니다.
선정에 들어 있었는데 효봉스님의 발자국에 구들이 들썩이는 바람에 방해를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 쿵 ! 쿵 !"
조그만 토굴은 이내 방구들 파헤치는 소리로 가득 찼고 효봉은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방구들이 푹 하고 꺼지고 그때서야 정신없이 방구들을 파헤치던 상좌가 소리쳤습니다.
" 스님 ! 부처가 되면 뭐합니까? "
효봉스님은 지그시 눈을 반쯤 감고 그런 제자를 바라다보고만 있자 제자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 부처가 되면 뭐하냐고요 ! "
그러자 효봉스님이 방구들이 꺼진 곳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그러더니 다리를 쭉 펴고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 그래 맞다. 부처가 되면 뭐하겠노? 그만 두자. 그만 두고 놀자."
전혀 엉뚱한 대답이었다.
삼매에 빠져서 화두에 몰두하던 제자가 돌연한 행동을 통해 법을 묻자 효봉은 방선을 풀고 그의 허점을 찌른 것이다. 그것은 임제의 '할' 이나 덕산의 '봉' 보다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자는 자신의 돌연한 행동에 효봉이 진노하여 소리를 칠 줄 알았는데 그것을 뛰어 넘어 부처마저 풀어 버린 것입니다.
" 스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효봉스님의 그런 태도에 제자는 다시 절을 하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습니다. 스님도 다시 가부좌를 틀면서
" 그래? 그럼 다시 부처가 되어 볼까? 공부해야 되겠제?"
상좌는 더 이상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묵묵히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 진흙을 구해다 다시 구들을 메웠다. 그리고 아궁이에 불을 넣어 말렸다.
시봉이 바뀌는 날이 오자 떠나가는 상좌를 보고 효봉스님이 말했습니다.
" 그래, 너 언제 다시 올래. 언제 또 와서 방구들 파헤칠래?"
그 말에 제자는 아무 소리 없이 합장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구들을 파헤쳤던 상좌는 바로 오늘날의 시인 ‘고은’입니다.
효봉스님에게는 ‘엿장수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 ‘너나잘해라 스님’등 별명도 많았는데, 별명마다에는 다 그만한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엿판을 마련하고 엿장수가 되어 고행을 하다가 나중에 엿판을 짊어진 채 금강산에 들어가 삭발 출가해 얻은 별명으로 출가 당시 당신의 학력과 과거 행적을 완전히 숨기고 오직 ‘못 배운 엿장수’였다고 자신을 소개했으므로 모두들 스님을 ‘엿장수 중’으로 불렀습니다.
그 후 같은 법원에 근무했던 일본인 판사가 관광차 절에 왔다가 우연히 스님과 조우, 그동안 숨겨왔던 판사전력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스님은 ‘판사 중’으로 불리게 되었고 사찰의 법률문제만 생기면 효봉스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이 일이 번거로워 금강산을 떠나 남행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 덕택에 남북분단 후 이 나라 불교계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은, 수행을 했다 하면 절구통처럼 꼼짝하지 않고 철저히 했으므로 엉덩이가 짓물러 깔고 앉은 방석이 엉덩이에 달라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지독한 수좌라는 뜻에서 절구통 수좌로 불렀습니다.
6.25동란 때는 해인사에 계셨는데 여기까지 인민군이 밀려오자 피난길에 올랐습니다.효봉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 부산을 거쳐 배를 타고 전라도로 가기로 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통영 여수를 거쳐 해남 대흥사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뱃멀미를 하게 된 스님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통영에서 일단 배를 내려 쉬어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통영 용화산에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마침 비어 있었습니다. 이 도솔암에서 며칠 쉬었다갈 요량이었는데 주저앉은 김에 아주 눌러 살게 되었습니다.
효봉스님이 구산, 원명, 보성, 법흥, 인각 등 제자들과 함께 이 도솔암에서 머물며 정진하고 있으니 뒤이어 소문을 듣고 완산, 경산, 범용, 경운, 탄허, 성수 스님 등 한국불교계의 거물들이 줄줄이 내려와 머물게 되었으니 통영 도솔암은 한국 불교계의 거봉을 배출한 요람이 된 셈입니다. 참으로 묘한 인연입니다.
이 도솔암에 효봉스님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제자가 효봉스님께 다른 스님의 잘못을 고자질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는 술마시지요, 담배 피우지요, 게다가 여색까지 하지요.
그러니 스님, 그 자에게 절대로 중요한 선임을 맡겨서는 아니 됩니다 스님.”
“허면 수행자가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말이지?”
“그렇습지요.”
“담배를 피워도 안 된다는 말이지?”
“그렇습지요.”
“여색을 가까이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지?”
“그렇습지요.”
밀양 표충사에 있는 효봉스님 사리탑
“그걸 잘 알고 있으면……”
“…예 스님.”
“너나 잘해라 인석아!”
효봉스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나쁜 짓인 줄 알고 있으면 너나 잘하면 될 것이지, 어쩌자고 남의 허물만 고자질 하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제자에게는 어김없이 스님께서 버럭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너나 잘해라! 너나 잘해!”
그래서 나중에 효봉스님의 별명이 한 가지 더 늘었습니다.
‘너나 잘해라 스님’
통영 용화사의 용화스님 좌상
밀양 표충사 정문 앞에는 우측으로 난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그 바위 위에 표충사 서래각(西來閣)에서 열반에 드신 효봉(曉峰) 선사의 사라를 모시고 있는
천진보탑(天眞寶塔)이 있는데 그 앞에 효봉선사가 견성(見性)하여 읊은 오도송(悟道頌) 탑비가 있습니다.
海底燕巢鹿抱卵 ( 해저연소록포란 )
火中蛛室魚煎茶 ( 화중주실어전다 )
此家消息誰能識 ( 차가소식수능식 )
白雲西飛月東走 ( 백운서비월둥주 )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 소식 뉘라서 알꼬?
흰 구름 서쪽으로 날고 달은 동으로 달리네
금강산 신계사 토굴에서 6년 증진 후 견성하여 지은 오도송입니다.
어찌하여 바다 밑에 제비가 집을 지을 수 있으며
사슴이 알을 낳아서 제비 집에서 품은 수 있단 말인가! 이해가 않돼죠?.
이 문제는 다음에 풀기로 하겠습니다.
스님은 1966년 10월15일 표충사에서 입적하셨는데
효봉스님이 입적하기 전 지은 열반송(涅槃頌)은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오설일체볍(吾說一切法)
도시조변무(都是早 拇)
약문금일사(若問今日事)
월인어천강(月印於千江)
지금까지 내가 한 말
모두가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이 일천 강물에 비친다 할 뿐이로다.
http://cafe.naver.com/donsim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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