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성에 대해서는 참 이상한 나라이다. 오래전 한 여대생은 ‘성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라는 나의 물음에 우리나라의 성은 ‘빨간색’과 ‘검정색’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너무 엄격하고 점잖아야 하거나 아니면 너무 야하고 선정적인 것의 두 모습이라는 뜻이겠다.
얼마 전 유명한 다국적 제약 회사가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이 인생에서 중요한가?’에 ‘그렇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무려 87퍼센트로 우리나라가 1위를 차지했다.
그렇게 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성에 대한 이야기는 건강하게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오히려 아직도 ‘쉬쉬’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언론에서도 성폭력 이야기는 쉽게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밝은 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기 어렵다.
부부 대상 프로그램에서도 ‘섹스’, ‘성관계’라는 말은 하지 못하게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라치면 심의에 걸린다며 전전긍긍해한다.
세계 많은 곳이 여전히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더욱 성에 대해 이중적인 시각이 강하다.
몇 년 전, 유명한 아침 방송에 나가서 부부의 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제작진과 진행자가 알맞게 망가져 주고,부부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껏 하라고 하며
무척 개방적인 분위기라서 일부러 ‘섹스’라고 발음하며 즐겁게 녹화를 끝냈다.
나는 성관계를 ‘섹스’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아니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섹스’라는 말과 ‘성관계’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섹스’라고 하면 왠지 야하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성행위를 연상한다.
그런데 ‘성관계’라고 하면 또 어떤가?
왠지 지루하고 경직되고 오래된 부부 사이의 성(聖)스러운, 점잔을 빼는 관계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뜻은 사실 똑같은데 왜 우린 이렇게 상상하는 걸까?
어쨌든 이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한가지로 모았으면 해서 일부러 ‘섹스’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곤 한다.
그런데 방송이 나오던 날 그 프로그램을 모니터 하던 내게 직원이 문자를 보내 왔다.
“선생님, 섹스라는 말이 전부 무음 처리되고 있어요.”
나는 말을 한 사람이니 그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사실 방송에서는 섹스라는 말을 할 때
입모양만 나올 뿐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진 성에 대한 생각이다.
섹스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야해지고 이상해지고 성적 충동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그런 말조차 못하게 하는 것일까?
방송에서 피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콘돔을 사용하는 것을 보여 줄 수는 더욱 없다.
아마 콘돔을 사용하는 법을 보여 준다면 아마 마녀 사냥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피임을 가르치면 어떻게 섹스를 부추길 수 있느냐는 비난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부모가, 학교에서, 사회에서, 방송에서
‘피임’에 대해 말하고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는 미혼모가 많아지고 낙태율이 높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우리나라와 미국이 아주 대표적이다.
그러나 미혼모에 대한 의식과 그들을 돕는 사회적 인프라가 일천한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그나마 미혼모에 대한 사회 보장 제도와 복지가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되어 있다.
물론 그 나라도 미혼모에 대해 시각이 좋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아기를 포기하지 않고 살 수는 있도록 도와준다.
어쨌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부부 관계를 주제로 하는 방송에서도 ‘성관계’라는 말 대신 ‘부부 관계’라는 말을 사용해 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막연히 부부 관계라니. 세상에!” 부부 관계에는 대화며 성관계며, 얼마나 많은 요소와 의미가 존재하는가?
이렇게 합법적으로 섹스를 용인받은 사이인 부부조차 성은 거론하는 것이 금기이다.
오죽하면 ‘가족 간에 섹스를 어떻게 하냐?’는 농담이 회자된다.
그런데 섹스를 가족 간에 안 하면 누구랑 하려는 걸까?
이렇게 성에 대해 이야기도 못하게 하고, 가족간에는 ‘섹스’도 안하고, 정말 점잖은 사람들처럼 행동하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정말 성에 관한 한 어디까지 가려는지 걱정이 된다.
어린 학생들이 다니는 길목에 성매매, 성적 서비스를 광고하는 명함이 난무하고,주택가 깊이 성매매가 들어가 있다.
젊은 연예인들의 섹시 화보가 언론 매체들의 사이트에 청소년조차 너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올라와 있다.
꼭 섹시 화보가 아니라도 언론 보도인척 하며 선정적인 포즈의 연예인의 모습을 담는 언론은 마치 관음증 환자 같기도 하다.
도처에 섹시한 포즈로 유혹하는 눈빛의 젊은 여성들의 거의 벌거벗은 모습의 사진들이 도시 거리의 커다란 광고판에,
심지어 달리는 버스에도 붙어 눈을 두기가 불편하다.
또 걸이라며 10대 어린 소녀들을 섹시 아이콘으로 훈련시키고,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허리춤을 추게 하고 남자를 유혹하는 눈빛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죄의식을 줄여 주기 위해 포르노는 야동으로 부르고,
소녀 가수들에 대한 어른 남성 팬들을 삼촌 팬으로 불러 죄의식을 줄여 준다.
이러한 언론의 태도가 사회 관음증화를 부추긴다.
IT 산업의 발달은 인터넷을 통한 섹스 산업과 이어져 있다.
심지어 얼마 전 어떤 대도시에는 젊은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귀를 파 주는 ‘귀 파 주는 방’이 등장했다니 정말 아연할 일이다.
영화 속에서도 섹스가 어떤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표현되거나,
섹스만이 인생의 즐거움과 괴로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등
우리 사회가 섹스 지상주의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우리가 섹스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섹슈얼리티’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성교육,성 상담, 성폭력, 성매매 등의 성은 바로‘섹슈얼리티’이다.
우리가 건강하고 정확한 성에 대한 정보를 알아 자신의 성 생리와성 심리를 잘 관리하고,
또 그런 존재인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잘 유지할 것인가,
즉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섹슈얼리티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성에 대해 알면 알수록 행복하게 살수 있다.
성은 우리의 근본이며, 야하거나 선정적이거나 감각적이기만 하거나 아니면 고답적, 윤리적이기만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성은 생물로서 우리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하기 위한 건강한 우리의 생식 방식이며,
특별히 우리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표현과 확인 방법으로써 훌륭한 소통 방법이기도 하다.
그저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행위라는 뜻이다.
2013년에는 성에 대해서 건강하고 긍정적인 정보를 마음껏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이 부끄럽고 숨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 스스로를 잘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꼭 유념해야 할 대상으로서 여겨질 수 있기를 바란다.
배정원 |
성 칼럼니스트, 섹슈얼리티 컨설턴트, 행복한 성 문화센터 소장, 성 상담 게시판 '배정원의 LOVE & SEX 컨설팅' 운영 등 각종 신문과 방송 언론 매체를 통해 성 칼럼 및 성 전문 자문 등으로 활동, 현재 MBN 황금알 출연, 이화여대 보건학 박사 수료, 현재 세종대학교에서 ‘성과 문화’, ‘연애와 결혼 관계론’ 출강 중, 저서로 <유쾌한 남자 상쾌한 여자>,<여자는 사랑이라 말하고, 남자는 섹스라 말한다> 등.
http://www.baejw.com / 이메일 byav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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