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 水鍾寺
운길산雲吉山 수종사水鍾寺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면 1060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 멈춘다>는 운길산.
수종사는 이 상서로운 구름으로 둘러싸인 산을 거처로 삼았다.
운길산(610m) 남쪽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거의 정상(500m)에 자리잡고 있는 고찰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물머리
- <두물머리>라는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은
1890년(고종 27)에 만들어진 <수종사중수기水鍾寺重修記>에 기록된 <이수두二水頭>가 처음이다.
이것이 후에 양수리兩水里로 이름이 바뀌었다.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철원, 화천, 춘천, 가평을 거쳐 두물머리에 이른다.
남한강은 태백산 검룡소(삼척 대덕산라고 하는 것도 있다)에서 시작하여 영월, 단양, 제천, 충주를 지나 온다.
수종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은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가장 앞서는 중창 기록은 1460년(세조 6)이다.
수종사와 세조와의 얽힌 인연을 <봉은사 본말사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조가 즉위 5년에 8도 방백들에게 명하여 운길산 남쪽 기슭에 축대를 쌓아 절을 일구었는데,
세조가 용선을 타고 밤중에 두물머리에 이르렀을 때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종소리가 울린 곳을 찾았더니 바위 굴에 16나한이 앉아 있었고,
바위 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다. >
수종사水鍾寺의 [水鍾수종]은 [물종]이라는 뜻이다.
혹은,
<1458년 세조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강원도 오대산에 갔다가 남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에
용진강 이수두에서 밤을 맞아 야경을 즐기는데,
운길산쪽에서 문득 종소리가 들려 그 연유를 알아보게 하였더니,
(다른 기록 : 세조가 한밤중 자다가 맑은 종소리를 들었는데)
폐허가 된 천년 고찰이 있고, 암굴에 16나한이 열좌하였으며
바위틈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종소리를 낸다고 아뢰니
세조는 이듬해 (1459)에 그곳에 절을 다시 짓고 수종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다산은 운길산 유람기(<수종사기>)에서
< 수종사는 신라 때 지은 옛 절이다.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흘러나와 땅에 떨어질 때 종소리를 내므로 수종사라 한다고 전한다>고 했다.
세조 이전부터 수종사로 불렸다는 주장이다.
수종사는 날아갈 듯이 7, 8분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발아래 경치는 황홀하다.
그러나 물안개가 수시로 일어 보기가 쉽지 않다.
젊은 날 다산 삼형제(정약전 정약종 정약용)는 철문봉까지 올라와 학문과 인생을 논했다.
<학문을 밝혔다>는 뜻에서 [喆文峰철문봉]이다
* 수종사라는 이름을 얻게 해 준 물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 지는 모르겠다.
이 범종을 치면 돌 틈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려나...
운길산은 다산 정약용과 인연이 깊다.
인근에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다.
어릴 때 산 중턱에 있던 수종사에서 뛰놀았다.
다산은 1783년 봄 스물한 살 때 진사과에 합격했다.
바로 그 자축연을 수종사에서 벌였다.
여러 친구들과 수종사에 가서 눈부신 달 아래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 내가 옛날 아이 적에 처음으로 수종사에 놀러간 적이 있었고,
그 후에 다시 찾은 것은 독서를 하기 위함이었다.
독서를 할 때는 늘 몇 사람과 짝이 되어 쓸쓸하고 적막하게 지내다가 돌아왔다.]
다산은 일곱살 나이에 운길산에 올라 지은 시도 있다.
[ 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遠近地不同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 ]
다산은 쉰여섯인 1818년 9월에야 18년의 유배에서 풀려났다.
비로소 운길산 아래 두물머리 마재 본가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운길산은 이제 어릴 적 그 운길산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꼭대기까지 오르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시로써 그 진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 운길산의 수종사 옛날엔 우리 집 정원
마음만 내키면 훌쩍 가서 절문에 이르렀네
이제 보니 갑자기 높아 주군처럼 뾰족하니
하늘 높이 치솟아 묘연하여 붙들기 어렵네. ]
다산은 고향에서 유유자적하며 남은 삶을 보냈다.
유배기간과 똑같은 18년 동안 두물머리에서 살다가 죽었다.
죽기 전에 수종사도 자주 찾았고,
가끔 추사 김정희(1786∼1856), 초의선사(1786∼1866)가 다산을 찾을 때면 그들과 수종사에 머물며 차를 마셨다.
다산은 죽기 사흘 전 유작시를 지었다.
[ 육십년 세월 잠깐 사이 흘러가
복숭아나무 봄빛 신혼 때와 같구나
생이별이나 사별은 모두 늙음을 재촉케 하나니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네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다정하고
지난 유배시절 임의 치마폭에 쓴 먹 흔적 남아있네
헤어졌다 다시 만난 우리 부부가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주노라 ]
수종사의 풍광에 대한 찬사는 일찍이 조선 초기의 문장가 서거정(1420-1488)의 시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수종사에서 한강을 보며 [동방 사찰 가운데 제일의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의 시,
[ 가을 오매 경치는 구슬프게 변해 가는데 秋來雲物易悽悽 @ 悽 : 슬퍼할 처
간밤 비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宿雨連朝水拍堤
하계에서는 연기와 티끌 피할 곳 없더니만 下界烟塵無地避
상방의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上方樓閣與天齊
흰 구름 자욱한데 뉘게 줄까나 白雲歷歷誰堪贈
누런 잎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黃葉飛飛路欲迷
내 이제 동원에 가서 참선이야기 하려 하니 我擬往參東院話 @ 擬 : 헤아릴 의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지니. 莫敎明月怪禽啼 ]
수종사의 처연한 가을 정경으로 시작되는 이 시는,
누구에게도 흰 구름을 나눠 줄 수 없는 고적감으로 나아갔다가,
결국 선禪을 얘기하겠다는 도저함으로 마무리 된다.
# 水鍾寺(八角)五層石塔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
수종사 다보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석탑 안에서 18점의 작은 불상들이 나왔다.
1459년(세조 5)에 건립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지금은 대웅전 옆에 있지만 원래는 경내에서 동쪽으로 벗어난 곳에 있었다.
오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팔각형의 평면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5층석탑이지만 높지 않고 아담하면서도 화려한 탑신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기품이 있어 보인다.
지대석의 각 면에는 장방형(사각형)의 액額으로 2등분한 각 내면에 안상이 조각되었다.
기단의 하대석 역시 각 면에는 장방형 액내에 2구씩의 안상을 배치하였고,
그 아래에 길이가 긴 안상이 각 면 1구씩 배치되었다.
기단부는 마치 불상의 대좌와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의 하단에는 각 면 2구씩의 장방형 액으로 분할한 후 안쪽에 안상을,
위쪽에는 복엽 16판의 복련을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원형 기둥으로 각 면을 분할하였다.
상대석의 하단에는 복엽 16판의 앙련이 조식되었고, 면석에는 각면 2구씩의 안상이 장방형 액내에 새겨져 있다.
상대석의 윗면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받침 1단이 있다.
1939년 해체복원시 사리장치인 고려청자안에서 금동구층탑, 은제도금육각감이 각각 1점씩 나와 보물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1957년과 1970년 탑을 다시 옮겨 세우는 과정에서 모두 18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팔각다츤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석탑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당시 한강을 통한 문화 전파 경로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탑내에서 발견된 불상 등 관련 자료를 볼 때 이 석탑은 조선 성종 23년(1493)을 건립 하한으로 볼 수 있으며,
그후 조선 인조 6년(1628)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 금동지장보살좌상.
팔각오층탑을 수리 복원할 때 나왔다.
높이 9.5㎝의 아주 작은 지장상이지만 그 천진스러운 아기 스님의 자태는 가히 조선시대 불상다운 명작이라 할 만하다.
팔각오층탑을 1957년 수리 복원 때는 20구의 불상이 출토되었고, 또 1970년 해체 이전 때는 12구가 더 발견되었다.
그런데 나중 12구를 분실하여 행방을 모르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6구, 동아대 박물관에 2구가 소장되어 있고, 4구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명문을 보면 이 30여 구의 불상 중 반은 태종의 후비인 {명빈明嬪 김씨}가, 반은 선조의 후비인 인목(仁穆)대비가 발원한 것이다.
조선 초기에 불교가 억압받고 있을 때 왕비들의 후원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조성 배경 때문인지 한결같이 앳된 얼굴에 애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억압 속에서도 버릴 수 없었던 불심 같은 것이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권위와 힘을 강조한 여느 불상보다도 이 작고 다소곳한 불상에서 오히려 더 깊은 예술적 감동을 받고 있으니
예배의 대상으로서 불상과 예술작품으로서 불상은 보는 눈이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 삼층석탑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2호
부도보다도 더 작은 아담한 석탑이다.
기단은 크고 작은 돌 2개로 겹쳐 쌓았고,
1층은 몸돌을 따로 두었으나 2, 3층은 몸돌과 지붕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 수종사 부도 水鍾寺浮屠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57호 왕명에 의하여 세워진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는 기단, 탑신, 지붕이 모두 8각형이고 단층인 부도로 지붕과 기왓골 등 세부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높이는 238cm. 지대석은 4각 돌 네 개를 합쳐 4각의 지대석을 만들고 각 면마다 당초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기단석은 8각으로 2중 기단석을 취하였으며 하층 기단석은 각 면마다 단판의 복련과 양련이 마주하고 모서리 상단에 두꺼비 8마리를 조각해 놓은 것도 이채롭다. 상층 기단석은 각 면마다 상ㆍ하로 구분되고 또 좌ㆍ우로 나누어 하단에는 인동당초문 두 점을 그려 넣었다. 상단에는 국화문을 실감나게 조각하였다. 원통형 탑신의 둘레가 218cm로서 운룡문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두 마리의 용은 여의주를 움켜쥐고 구름을 뚫고 힘차게 비상하려는 자세이다. 옥개석은 8각으로 곡선과 반전이 부드럽고 14.5cm의 두꺼운 낙수면에 다음의 31자의 명문이 여섯 면에 새겨져 있다. [太宗太后貞懿翁主舍利造塔施主OO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立] 태종태후정의옹주사리조탑시주OO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입 이것으로 세종 21년(1439) 왕실의 명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정의옹주부도貞懿翁主부屠라고도 한다. 상륜부에는 복발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에 앙화와 보주를 한 돌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동쪽 불이문 밖 산비탈에 있던 것을 1939년 현 위치로 옮기면서 해체 중수하였다. 이때 복장에서 유물이 나왔다. 이 부도에서는 많은 사리구舍利具가 출토된 바 있다. 1939년에는 사리장치인 청자항아리 내에서 금동구층탑, 은제도금육각감이 출토되었고, 1957년에는 18구의 불상이 발견되어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 부도내 유물
석조 부도를 고쳐 세울 때 발견된 유물들이다. 청자항아리, 금동구층소탑, 금제도금육각감이 발견되었고,
당시 금동구층소탑과 금제도금육각감은 청자항아리 안에 들어 있었다.
1) 청자항아리는 높이 31.2cxm,아가리 지름 26cm로 세로로 골이 파진 것처럼 몸 전체가 장식되었고,
뚜껑은 아름다운 꽃 덩굴무늬가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뚜껑의 가장 가운데에는 모란 꽃송이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청자호의 색깔은 몸체와 뚜껑의 색이 다른데, 몸은 녹청색이고 뚜껑은 녹황색을 띠고 있다.
청자항아리 안에 구층소탑과 함께 들어 있었던 금제도금육각감은 17.3cm로,
이중의 연꽃무늬가 있는 기단에 연꽃무늬와 칠보무늬를 면마다 번갈아 뚫어 조각한 6각의 몸체 위에 6각의 지붕을 얹은 형태이다.
지붕꼭대기에는 연꽃 모양 위에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이 육각감 안에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공모양의 사리병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 구멍을 뚫고 사리를 모셨다.
2) 금동구층소탑은 높이가 12.9cm인 작은 탑으로, 정사각형으로 된 평상 모양의 기단 위에 있다.
1층 탑 몸체는 한 면에 꽃잎 모양의 출입구가 3개 있고, 나머지 면에는 격자무늬 창문이 표현되어 있으며,
2층 이상에는 정면에만 출입구가 하나씩 있다.
각층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사슬을 꼬아 달고 탑의 맨 꼭대기에는 덩굴무늬 장식이 있다.
* 원통형 탑신의 운룡문
- 두 마리의 용은 여의주를 움켜쥐고 구름을 뚫고 힘차게 비상하려는 자세이다.
* 하층 기단석 모서리에 두꺼비 모양을 새겨 놓았다.
* 절마당에서 본 두물머리...
날이 흐리고 안개가 끼어 선명하지가 않다.
- 좌측 앞쪽이 북한강... 산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남한강... 이것이 합쳐져 우측 한강으로 흘러 간단다...
# 응진전의 나한상들
* 불전 외벽의 그림 하나...
# 삼정헌三鼎軒
수종사 석간수는 맛있다.
차 맛이 으뜸일 수밖에 없다.
수종사는 2000년 봄부터 무료찻집 삼정헌三鼎軒을 세워 절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차실茶室로 개방하고 있다.
삼정헌은 [시詩-선禪-차茶]가 하나로 어우러진 절의 내력에서 비롯되었는데,
초의선사와 정약용, 서거정, 김종직 같은 분들이 시를 읊조리며 차를 마시다 선정에 든 것을 기리기 위함이라 한다.
누구나 무료로 차를 즐기면서 발아래 한강을 굽어볼 수 있다.
녹차와 다구가 일체 갖춰져 있다.
스스로 보온병의 찻물로 차를 마신 후 설거지도 해야 한다.
* 액자
百劫積集罪 백겁을 지나면서 쌓은 죄
一念頓蕩盡 한번의 뉘우침으로 모두 없애버리고
如火焚枯草 불이 마른 풀을 태워 없애 듯
滅盡無有餘 모두를 소멸시켜 남은 것이 없네
(시는 솔나리의 번역이므로 내용과 다를 수가 있음)
* 水鍾寺
1. 鍾聲
疊疊靑山萬古靑 첩첩으로 둘러 있는 푸른 산은 언제나 푸르고
滔滔綠水流千歲 담담하게 흐르는 푸른 강은 끝없이 흐르네
人生迷惑未及百 사람이 평생 살아야 백년이나
水寺鍾聲至永世 수종사의 종소리는 영원하여라
2. 放下着
負戴秋心幾千斤 마음에 짊어진 근심은 수천 근이고 @ 戴 : 일 대
掛雲狹寺不能載 골짜기에 서 있는 절은 걸린 구름을 다 담지 못하네
煩着放下漢江水 가슴에 담고 있는 번뇌는 한강 물에 흘려보네고 @ 煩 : 번거로울 번
心乘片雲彼岸在 마음은 구름 한조각을 따라 피안의 세계로 가세
(두 수의 시는 솔나리의 번역이므로 내용과 다를 수가 있음)
*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오전 11시 이후에나 차를 마실수 있단다...)
절을 내려오다가 개인이 경영하는 찻집에서 차 한잔...
아늑한 등불이 정겹다.
# 은행나무와 해탈문
수종사 해탈문 뒤에는 세조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다.
나이가 무려 오백 살이다.
한 그루는 높이 35m, 가슴둘레 2m, 또 한 그루는 높이 25m, 가슴둘레 1.2m.
울퉁불퉁 우람하고 잘 생겼다.
# 일주문과 불이문 :
절로 오르는 숲길에 세워져 있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다.
# 미륵부처상
절로 오르는 숲길 가에 있다.
숲사이로 수종사가 어렴풋이 보인다.
------- 주위에 가 볼만 한 곳---------------------------------------------------------------------------------------------------------
한음 이덕형의 별서 터
송촌리엔 한음漢陰 이덕형(1561∼1613)의 별서 터가 있다.
별서別墅란 오늘날의 별장 같은 것이다.
[漢陰]은 [한양漢陽]과 대비되는 단어이다.
즉 한양은 한강 이북의 햇볕 쬐는 궁궐 땅을, 한음은 한강 이남으로 임금의 음덕을 입은 땅을 의미한다.
한음 이덕형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즉 자신의 고향 조안면 송촌리를 한음이란 호로 나타낸 것이다.
한음은 오성(鰲城) 이항복(1556∼1618)과 항상 단짝으로 거론되는 그 한음이다.
나이는 이항복이 다섯이나 위지만 이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평생 벗으로 지냈다.
한음이 범생이 스타일이라면 오성은 짓궂은 개구쟁이였다.
공부는 한음이 더 잘했다.
두 사람은 1580년 나란히 문과에 급제했다(한음이 장원).
한음은 1592년 서른하나에 조선역사상 최연소로 홍문관대제학에 올랐다.
임진왜란 땐 명나라에 가서 원군을 불러왔다.
1605년 한음이 마흔 네 살 때 이곳 송촌리에 별장을 짓고 살다가, 쉰둘에 이곳에서 죽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한양의 이항복은 한달음에 달려와 구슬피 울었다.
염까지 하고 묘지명도 지었다.
< 知有國而不知有身 나라가 있는 줄만 알고, 자신의 몸의 있음은 알지 못했다>.
송촌리엔 한음이 심었다는 늙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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