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 한 노인의 사망 소식으로 인터넷은 떠들썩했다.
'맥도날드 할머니' 권하자씨가 지난 7월 '무연고 변사자'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권씨의 별세에 대한 최초이자 자세한 뉴스를 보도했던 기자가 전하는 맥도날드 할머니의 외롭지만은 않았던 마지막 가는 길.
권하자씨(73)는 인터넷에선 유명 인사였다.
서울 정동에 위치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매일 밤을 지새워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외무부에서 일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왜 노숙생활을 시작해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권씨를 유명하게 만든 건 다른 이들과 다른 노숙생활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백발을 단정하게 묶은 채 트렌치코트를 입고 입었다.
영자신문을 가득 담은 쇼핑백을 항상 들고 다니며, 24시간 커피숍과 패스트푸드 매장 등에서 밤을 새웠다.
이 독특한 생활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알려졌다.
2010년에는 한 공중파 방송에 소개돼 몇몇 사람들이 도와주겠다며 접근했지만,
그는 "내 방식대로 남은 생을 이어가겠다"라고 답해 의문을 자아냈다.
'푸른 눈의 친구', 병세 알고 입원 도와
사람들의 도움을 마다할 정도로 강인한 그였지만, 몸의 질병은 어찌할 수 없었다.
권씨의 몸에 이상이 발견된 건 지난 5월 말.
당시 그와 만나 말동무를 해주던 캐나다인 스테파니 세자리오씨(28)가 병세를 알아채고 병원에 입원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할머니에게서 문제를 발견한 건 석가탄신일 즈음이었을 거예요. 그 전부터 몸이 안 좋았어요.
당시 저는 잠시 부산에 갔다 왔는데, 돌아온 뒤 만난 할머니는 무척 아파 보였어요.
그래서 '반드시 보호소에 가야만 한다'라고 설득해 승낙을 얻어냈죠."
'푸른 눈의 여성'인 세자리오씨가 권씨를 처음 본 것은 2011년이다.
정동 주한캐나다교육원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인근에서 돌아다니는 권씨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밤늦게 항상 맥도날드에 있어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권씨가 자신에게 직접 말을 걸자 생각이 달라졌다.
"제가 할머니를 스타벅스에서 다시 만났을 때, 유창한 영어로
'당신은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사람의 외모만으로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 될 거 같아요."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여성은 매주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의 옛 직장, 학창 시절 이야기부터 정치, 문화, 삶의 문제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자리오씨는 "난 할머니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에 대해 책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권씨의 발병으로 잠정 중단돼야 했다.
권씨의 병세를 알아차린 세자리오씨는 경찰과 119구조대 등의 도움까지 얻어가며 그녀를 국립의료원으로 안내했다.
권씨는 병원에 입원한 뒤 세자리오씨에게 "그때 당신이 날 데려오지 않았다면 난 길에서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병상에서도 지킨 특유의 생활
권씨는 국립의료원에 입원한 뒤 암이 복막까지 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권씨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도 울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당시 권씨를 문병했던 새문안교회 백충현 목사는
"실패를 겪고 병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한 경우가 많은데, 그와는 또 달랐다"라고 회상했다.
품격을 잃지 않고 우아한 태도를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은 병원에서도 이어졌다.
병문안을 온 교회 사람들은 종종 그에게 "용돈으로 쓰시라"라며 돈을 건넸는데,
권씨는 "의료원의 간호가 만족스럽지 않다"라며 일일 간병인을 고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 자신의 용돈으로 포도주스를 사다달라고 자주 부탁했다.
길거리 생활을 해온 그에게 포도주스는 포도주를 대신하는 품격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이런 삶의 방식도 죽음이 다가오자 조금씩 변해갔다.
가장 눈에 띈 것은 무릎께까지 내려온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잘랐던 것.
권씨는 평소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다"라며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다.
하지만 병상에 눕자 긴 머리가 문제가 됐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꼭 긴 머리만을 아름답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를 설득했고,
권씨는 곰곰이 생각한 뒤 수년간 지켜온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임종이 다가올수록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갔다.
권씨는 노숙생활을 시작한 뒤 가족과 연락이 끊겼고, 가족의 소재 역시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병상에서 "오빠가 참 좋았는데, 지금 미국에 가 있다.
나도 미국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수시로 했다.
그가 말한 오빠는 셋째 오빠(83)다.
명문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이민 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도 돈을 보내주는 등 여동생을 도와줬으나 권씨가 연락처를 잃어버려 연락이 두절됐다.
권씨는 가끔 막내 여동생 이야기도 했다.
앞서 그의 여동생은 한 방송에서 "언니가 나타날까봐 겁이 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권씨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동생이 인천으로 시집갔다. 어렵게 사는 것 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투병생활, 그 뒷이야기
권씨의 투병생활은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권씨는 세자리오씨의 도움을 받아 국립의료원에 입원했지만,
난치 판정을 받은 뒤에는 한없이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서둘러 다른 요양원으로 옮겨야 했지만 주민등록이 말소됐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권씨를 돌본 국립의료원 이승민 복지사와 새문안교회 측은 병상에 있는 권씨 대신 그의 주민증을 다시 등록하기로 했다.
그러나 의료원 인근 주민센터에서는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라며 발급을 거부했다.
다행히 그의 이전 주소가 있던 사직동 주민센터에서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수속을 허락했다.
재발급을 위해 내야 했던 과태료(3만원)는 교회에서 부담했다.
주민등록이 재발급됐지만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권씨를 받아주는 요양원은 찾기가 힘들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시가 운영하는 노숙인센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승민 복지사가 요양원들을 수소문한 끝에 '새희망요양병원'으로부터 무료로 돌봐주겠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비로소 권씨는 길거리로 다시 내몰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뒤에는 비교적 평안한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병상에 있을 때는 교회 사람들이 권씨와 함께했다.
새문안교회 백충현 목사는 "내가 기도해드리면 무척 고마워하시고 자주 와달라는 말씀을 하셨다"라며
"행여 바빠 못 가는 날이면 의료원 복지사를 통해 보고 싶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그래서 우린 더 시간을 내 최대한 뵈러 갔다"라고 회고했다.
병원에서 권씨에게 '마지막'을 통보했을 때도 교우들이 옆을 지켰다. 임종기도는 백 목사가 주재했다.
"기도를 시작할 때 할머니는 좋아하던 포도주스도 못 넘기셨고, 거의 의식이 없는 상황이었죠.
'우리 왔어요'라고 인사하니 눈빛으로만 답하셨고, '천국 가실 수 있죠?' 여쭤보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권씨는 이로부터 4일 뒤인 7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연고 변사자로 처리돼 화장된 뒤 경기 파주시 서울특별시립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지만, 그녀는 좋은 사람"
그의 죽음은 비교적 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사망한 지 석 달이 흐른 지난 10월 10일에야 첫 보도가 이뤄졌다.
임종을 지킨 교회 관계자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언론에 알리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터넷에는 추모의 글이 넘쳐났다.
그의 사망을 알린 기사에는 3천 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고, 누리꾼들은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한 누리꾼은 "비록 삶의 방식은 독특했지만, 할머니 뜻에 따라 살다 가신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살아생전 민폐 안 끼치고 사신 분이니, 부디 좋은 곳에 가시길"이라고 전했다.
당초 권씨의 사망은 언론 등에 '외로운 죽음'으로 표현됐다.
권씨의 임종까지 도와준 이들의 사연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이다.
권씨가 투병생활 하는 동안 그를 지켜본 백충현 목사는
"권 할머니 곁에서 많은 이들이 함께해준 만큼, 그렇게 외롭게 가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자리오씨 역시 권씨의 임종을 지켰다.
권씨는 죽기 전 세자리오씨에게 "지금은 당신이 내게 유일한 가족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자리오씨는 "할머니 역시 나를 구한 사람이다"라며
"그녀를 만날 때면 삶의 휴식과 여유에 대해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세자리오씨는 권씨가 떠나는 날 밤, 스스로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전했다.
권씨와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낯선 땅, '특별한' 할머니와의 동화 같은 만남. 그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할머니가 과거의 삶에 붙들려 있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해서 정신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죠.
전 할머니가 영원히 평화롭게 쉬셨으면 좋겠어요.
그녀 역시도 삶이 있었으니까요.
그녀의 바람대로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글 / 박용하(경향신문 디지털뉴스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