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시아버님의 과거

tkaudeotk 2013. 10. 23. 15:52



연아 씨는 결혼 4년 차인 새내기 주부다.

결혼 후 첫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심해고생을 했는데 
둘째를 연년생으로 임신해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남편과는 5년의 연애 끝에 결혼한터라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연아씨를 사랑하고 늘 집안일도 도와주려는 남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느껴지곤 했다.

 큰아이를 키우면서 둘째까지 임신하자 다니던 직장을 사직했다. 
때론 그것이 너무 아쉽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자기 아이는 자기 손으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었던 터라 오랜 고민 없이 직장을 떠났다.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고 오후쯤되면 가끔씩은 우울한 마음도 들었다. 
퇴근한 남편은 이런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없지?”라고 무심하게 한마디 던지고 끝이었다.

 어느 날 저녁 집으로 걸려 온 시아버님의 전화를 받던 남편은 전화기에 대고 
“예, 아버지. 그렇게 해야죠. 당연히 우리집에서 해야죠.”라고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 뭔가를 한다는 말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 친구분들 친목계가 있는데 이번이 아버지께서 유사*여서 
우리 집에서 식사 대접하면 어떻겠냐고 하시길래 그렇게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어.”
 “….”
 “날짜는 다음 달 7일이고 부부 동반으로 20명쯤 될 거래. 
아직 한 달이나 남았고, 일요일 저녁이니까 별 문제 없겠지?”

 연아 씨는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을 못했다.
‘지금 내 몸 하나 가누는 데도 지치고 힘든 상황인데 집에서 음식 대접을 해야 한다니.’ 
더구나 남편은 자기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덜컥 승낙하고선 일방적으로 통고를 하는데, 
아내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만난 듯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결혼만 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 줄 것처럼 말했던 남편이, 
결혼 후엔 가끔 청소기 돌려 주는 것이 전부이면서 임신한 몸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주는 게 아무리 남자라고는 하나 너무 야속하고 미웠다.

 큰아이를 등에 업고 무거운 몸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마음속으로는 원망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남편뿐 아니라 시아버님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일 내가 며느리가 아닌 딸이라면 이렇게 하실 수 있을까?’라는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날 음식을 다 드시고 나가시면서 “에이그, 배가 아래로 처졌네, 처졌어. 쯧쯧! 
이런 몸으로 음식을 했어? 너무 힘들었겠네. 
그냥 식당에서 하지 그랬어?”라고 한마디씩 하시는데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남들도 이렇게 힘든 것을 알아주는데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이럴 수가 있을까? 
연아 씨는 인정머리 없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 년 후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마음속에 쌓인 속상한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고 응어리가 되어 
마치 체한 사람처럼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간직하고 일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자신의 인생이 손해를 본 것 같았다. 
별일도 아닌데 자주 화가 나기도 하고 집에 혼자 있으면 슬프기도 하고 남편이 너무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끔 시아버지의 전화가 오면 말로는 상냥하고 친절한 예의(?)를 갖추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서운한 감정이 되살아나 진심으로 다가가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마음이 불편하고 싫었다.

 어느 날 연아 씨는 남편에게 이런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여보, 난 일 년 전의 그 사건 때문에 마음속에 당신과 시아버님에 대해 정말
너무 섭섭하고 속이 상해요.”
 “일 년 전의 사건이라니? 도대체 무슨말이야?” 당황한 남편이 물었다.
 “일 년 전, 내가 둘째 임신 7개월 때쯤 아버님 친목계 사건 있잖아?”
 “그래, 그런데 그게 무슨 사건이야?”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남편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다들 식사잘하고 가셨잖아? 무슨 일이 있었어?”
 “난 그때 큰애가 막 돌이 지났었고, 둘째가 임신 7개월 째 되어 몸도 너무 무거웠고 마음도 가끔 우울하고 그랬어. 
그런상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게 너무 힘들었고, 
나도 입덧으로 잘 먹지도 못하면서 음식 간을 보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황이었어. 
그런데도 당신은 그런 나를 이해하기는커녕 나와는 아무 상의 한마디 없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아버님과 둘이서만 결정했잖아. 
아버님도 너무 배려심없고 차가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으로 다가가지지를 않아.”

 이제야 무슨 뜻인지 감을 잡은 듯 남편은 자세를 고쳐 앉더니, 상기된 목소리로 아버님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난 당신이 그 일로 그렇게 마음 상했는지 정말 몰랐어. 
당신이 그런 서운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건 당신 마음을 잘 살펴주지 않은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언젠가 우리 엄마가 아팠던 이야기 당신한테 했었잖아.
통증으로 잠 못 이룬 엄마가 고생만 하시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고…. 
그 후 아버지 혼자서 우리 어린네 자녀를 키우셨지. 
그러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없이 늘 꿋꿋하게 버티신 거야.
그래서 친구분들과의 부부 모임에도 혼자이지만 꼬박꼬박 참석하셨고 
식사 차례가 되면 식당에서 대접할 수밖에 없었던거지. 
그런데 우리가 결혼을 했잖아. 내심 아버지는 그게 너무 자랑스러우셨고 혼자서 자식들을 키웠지만 
이렇게 번듯하게 잘 키워서 좋은 며느리까지 보았고 손자도 낳은 모든 것이 정말 기쁘고 좋아서 
친구분들에게 보여 주고 싶으셨던 거야. 
그 마음을 안 나도 두말없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받아들였던 거지.”
 이렇게 말을 이어 가던 남편의 눈가에는 어느덧 촉촉히 물기가 어려 있었다.

 “여보….” 아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연아 씨는 그간 남편과 시아버님을 오해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진즉 자신의 속 마음을 열어 나누지 못하고 혼자만 속병을 앓았던 지난 일 년의 세월이 억울해 함께 눈물을 흘렸다.
 소통하지 않는 순간에 문제는 시작된다. 
그리고 정서적 단절에서 불화는 시작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통즉불통(痛卽不通) 불통즉통(不通卽痛)”이라는 말이있다. 
소통을 하면 고통이 없지만 소통이 없으면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서로의 마음이 막히면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표현하지 않고 가슴에 쌓아 두면서 세월을 낭비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다.
 “아버님, 너무 죄송해요. 그리고 이렇게 좋은 신랑,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미야!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어미! 너 더위 먹은 거 아니냐?”
 안재순
행복한 가정 아카데미 원장